오늘의 레시피.
미카즈키

니노,내일은 밖으로 놀러가자. 아랫 마을에 단풍이 들기 시작했어.
내일?좀 갑작스러운데.
시간 안되는건 아니잖아.,꼭 보여주고 싶은데 나,단풍.
그래 그럼,제 손바닥 반뻠 만큼이나 클까 말까 한 게임기에 시선을 고정한 체,일인용
소파에 푹 묻힌 작은 머리통을 끄덕이며 니노미야는 느리게 눈을 슴벅였다.
아이바의 말대로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집 밖으로 나간지도 오래 됐으니까.
준비야 말 꺼낸 쪽에서 다 해줄테지,늘 그래왔듯이.
니노는 몸만 준비해,도시락도 여행코스도 내가 다 짤게.
그래 그래,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뱉어낸다.뽕뽕,아 게임 클리어다.
게임기,아이바가 밑엣 마을에서 구해온 것 중 가장 니노미야의 마음에 드는 물건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애정하는 물건이었다.툭툭,제 입가를 두드리는
손길에 아기새 마냥 입을 벌리면 도르륵,입 안으로 포도가 굴러 들어온다.동그란
포도를 몆 번 입 안에서 굴려보다가 이로 깨무는 순간,혀가 아릴 정도로 짙은
단 맛의 과즙이 입 안 가득히 터져나온다,사탕같아.
이거 달고 맛있네,뭐야.
밑에 마을에서 사 온 포도야,인간들은 사탕 포도라고 하더라.사탕처럼 달아서.
사탕 포도,어쩐지 무지하게 달더라.잘 사왔네.했더니 대답하기를.니노가 좋아할줄
알았어-니노,의외로 과일은 단 거 좋아하잖아.란다.이럴때면 기분이 묘해지고 만다.
새삼 자각하게 되버리는 것이다,내가 생각보다 이 덜렁이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단
사실을.이 덜렁이 마법사가 내 일상에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건 좋다기 보단 나쁜 감정에 가까웠다,일종의 불안감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의지 해 버리면 나중에 얘가 없으면 어떻게 사나,하는 막연한 불안감.
이런게 싫어서 늘 적당한 거리를 두고싶은데,이 녀석은 도대체 그걸 모른다.
남의 속도 모르고,내가 니노에 대해 모를게 뭐가 있어.하며 웃어보이는게 그렇다.
포도나 하나 더 줘,이런 놈에게 제 심정을 구구절절 읉어봤자 이해도 못해줄 것이
뻔해 그냥 다시금 입을 벌렸다.이로 힘주어 씹는 순간 툭,팟 하고 퍼지는 아린 단 맛.
입술에도 묻어버린 과즙은 살짝 혀를 내어 핥았다,그랬더니 난데없이 쪽.제 입술을
부딪히고선 웃어보인다,멋대로 뽀뽀해놓고 뭘 잘했다고 웃어 너.
그치만,니노가 해달라고 하는것 같았는걸.애인이 입술로 혀를 핥는데.
키스가 아니라 뽀뽀면 무지 많이 참은거거든요.
하여간에 저거,아주 입만 살았다니까.변태-장난스래 미간을 구기며 저리 가,하고
밀어내니 왠일로 순순히 알았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긴 몸뚱이를 올려다봤다,
삐쳤어?아니,저녁 하려구.니노도 한 시간 후엔 식탁으로 와야 해.
저녁이라,부엌으로 사라지는 뒷 모습을 보며 니노미야는 게임기를 껐다.
저녁,뭐해줄건데.
치즈 함바그,니노가 제일 좋아하는거.
치즈 함바그라,입맛이 까다로운 니노가 드물게 좋아하는 인간 음식 중 하나였다.
비리지 않았고,해산물이 아니었으며,제대로 익히기까지 한 가히 완벽한 음식.
적당히 익은 고기 위에 치즈를 눈처럼 얹은 것일까.노란 치즈라면 함바그를 가르는
순간 꿀처렁 치즈가 흐르는 타입일지도 모르지.확실한건 어느쪽이던 맛이 좋단 것.
아이바가 만드는 것은 대게 그랬지만,항바그가 유달리 맛있었다.
부엌에선 마법을 쓰는 소리가 아닌 칼질 소리가 들려온다,아이바가 오는 날에는
저게 일상적인 소리다,요리는 꼭 손으로 해야한다는 묘한 고집이 있는 녀석이니까.
아니나 다를까,부엌으로 들어가니 앞치마를 입고서 채소를 다듬는 뒷 모습이 보여,
니노미야는 조심스래 다가가 꼬옥,그 마른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곤 웃어보인다.
있지,내가 도와줄건 없어?
해애,드문 일이네,니노는 요리하는거 안좋아하잖아.
함바그니까,함바그는 요리하는 것도 좋아.
맞아,함바그니까 좋은거야,아이바상이 좋은게 아니라.
그럼 옆에서 체소 같이 다등자,당근 좀 썰어줘.
으응,당근-어떻게 썰어야 하려나.대충 손길 가는대로 툭툭 칼질을 해본다.
흘끗 옆을 보니 제법 고른 모양으로 잘린 아이바의 당근이 보인다.그에 반해
제가 자른 당근은 크기도 모양도 가지각색,제 개성이 너무 뚜렷하다.
요리도 주인을 닯는걸까나,평소라면 심통이 났을텐데도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으와-니노,진짜 칼질 서투르네.모양이 엄청 제각각이야!
놀리지 마,나름 엄청 노력한거거든?마법을 안써서 그래.
마법 써서 잘랐으면 내가 자른게 아이바상 것 보다 예뻤을걸.
그래?그렇구나-그럼 니노가 나 배려해준거야?고마워,니노!
역시 니노는 친절하다니까.
바보,이걸 또 믿는거냐고.저렇게 순진해서 환자들한테 돈은 안때이나 모르겠다.
있지 아이바상,환자들한테 돈은 제대로 받고있는거지.치유해주면서.
그럼 당연하지!걱정 마,나 바보 아니다 뭐,돈은 안때여!
무료로 치유해준 적은 있지만!
......보통 그걸 돈 때였다고 해,아이비상.
헛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돈은 안 때인다고 의기양양하게도 말하길래 왠일로
돈 계산은 칼 같나보네 했건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진짜 돈 때인 적이 있을줄이야.
마법사가 인간 돕다 돈 때이는 건 네가 유일할꺼야,장난스래 던지는 말에 또 울컥
한건지 오리마냥 입이 툭 튀어나와선 나쁜 짓 하다 때인 것도 아니니까 괜찮잖아.
하는 것이 귀여워 고기를 조물거리는 데 집중한 틈을 타 이번엔 제 쪽에서 볼 위로
촉,짧게 입술을 붙였다 때보인다.눈이 구슬마냥 동그래진 애인을 향해 아까 한
기습 뽀뽀의 복수야,하니 또 좋다고 흐흐흥-웃음을 흘린다,바보같은데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다니까.그런 부분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균일하게 만든답시고 몇번이고 다시 자른 당근이니 자잘한 체소들을 넣고
적당히 간해 섞은 고기를 불에 달군 팬 위에 올리는 건 니노의 몫이었다.이 역시도
평소였다면 내 예쁜 손 다칠까 겁나니 아이바군이 대신 해줘-하며 애교로 넘어가는
일이었지만 오늘은 왠일로 제가 하겠다고 나서선 뒤집개까지 집어들었다.
육고기 익는 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벌써부터 맛있잖아.안에서는 꽉 들어 찬
치즈가 녹고 있겠지.슬슬 뒤집어 볼까.뒤집개를 팬에 가져다대는 순간,새로 올라온
하트 모양 함바그에 니노미야의 미간이 좁혀지고 만다,아이바상.응?니노 나 왜애-?
먹는걸로 장난치면 돼,안 돼. 장난친거 아닌데!니노를 향한 내 마음인걸~
마을에서 또 헛짓거리 배워왔지 너,몇번 말해.그런거 재미없다니까.
하여간 애를 키우지 내가.그런 거에 의미 둘 필요 없다고 열번은 넘게 말했건만.
착,착,다른 고기들을 다 뒤집고나서야 하트 모양으로 빚어진 함바그의 차례다.
말이야 쓸데없네 어쩌네 했다지만 그래도 이왕 모양 내 준 거니까,역시 될 수
있다면 지켜주고 싶단 말이지.신중에 신중을 기해 뒤집는 순간.지그르르 퍽.
.......우리 사랑,니노를 향한 내 마음이,갈라져버렸어....
......마법으로 다시 붙이면,어떻게 안되려나....
아작이 나 버리고 말았다,우리 사랑.내용물은 다 터져나오고 페티는 조각조각.
우리 사랑 이대로 괜찮을까,진짜 사랑이 깨지기라도 한 듯 울먹이는 표정이 되선
눈썹도 눈꼬리도 축 쳐진 아이바의 모습을 바라보던 니노미야가 별안간 푸흐,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만다,우리 너무 웃긴다.저까짓 함바그가 뭐라고 이래 우리.
함바그 하나 부서졌다고 울먹이는 마법사도,마법으로 붙이려는 마법사도 아마 우리
밖에 없을거야,안그래?이제 슬슬 밥먹자,다행히 다른건 다 멀쩡하잖아.
반으로 잘라졌으니까 말이지,하트 함바그.서로 반씩 먹으면 안되겠어?
아아,그것도 괜찮겠네~역시 니노는 똑똑하다니까!
결국 하트 모양의 함바그는 실제로 둘이서 오붓하게 나눠먹었다,서로의 사랑의
반쪽을 나눠먹는거라고 말하는 우리도 이해하지 못할 핑계를 붙여가면서.
식사 후에는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디저트의 시간이었다,냉장고에서 미리
마법으로 만들어둔 초콜렛 케이크를 꺼내고 홍차를 탄다.언제 불을 땐건지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이 집 안의 공기를 덥히고 기분 좋을 정도로 훈훈해진
집 안의 공기가 사이사이 섞여든 꿀 향,우유 향,홍찻잎 향 같은 것에 금세 포근하고
달큰한 공기로 얼굴을 바꾼다,테라스에 있던 테이블은 또 언제 안으로 들여온건지.
.
니노,이리 와봐.여기서 보니까 별이 무지 잘 보여.
잔뜩 들뜬 목소리와 얼굴로 손짓을 하는 것이 꼭 엄마에게 별이 떴다고 말하는 들뜬
아이같아도 보인다고,그런 생각을 하며 홍차와 케이크가 든 트레이를 들고서 의자에
앉은 니노미야였다,문득 바라본 테라스 창 밖의 하늘 가득 별이 수놓아져있다.
푸른빛이 주를 이루는 남색 비단 위에 반짝이 가루라도 흩뿌려놓은 듯한 풍경.
아,홍차랑 케이크-언제 준비한거야?
케이크는 마법으로,홍차는 손으로.아이바상은 내가 탄 홍차,좋아하잖아.
그치-니노가 타주는 홍차는 특유의 포근포근한 맛이 있거든.
용캐도 기억하고 있네 니노.
벌쎠 몇백년을 같이 했으니까,기억하지 못하는게 이상하지.
그런가-하기사,몇백년이면 모르는게 더 이상하긴 하겠다.
그래서,방하늘을 본 소감은?
......예쁘네,반짝 반짝.딱 아이바상 취향이지.
흐흥,맞아-내 취향이야,내일은 날이 맑을 것 같아,다행인 일이지?
그러게,다행이네.내일은 날이 맑겠어.있지 아이바상.
응,나 왜 니노.무슨 할 말 있어?
아이바상은,후회 안 해.
의문문같기도,완결문 같기도 한 니노의 말에 아이바는 느리게 눈을 굴린다.
후회한다니,내가?뭐를?
마을에서,의사로 사는 거,후회하지 않느냐고.그걸 묻고 있는거야 난.
아,아이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뭔가를 계속 말하고 싶어하더니 저거였던건가.
있지 니노,나는.
알아,아이바상은 인간을 사랑하지.나랑은 다르게.
난 그런 아이바상을 머리로는 이해 해,근데 가슴이 이해가 안돼.
다시 물어볼게 아이바군은 아무렇지도 않아?
아이바군의 힘으로 인간을 살리는게,행복해?
아이바군은 대체,자길 죽이려 했던 족속들의 후손을,어떻게 그렇게 사랑할 수 있어.
몇백년전의 그 날,인간에게는 온점이 찍힌 체 과거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하루.
그러나 마법사들에게는 쉼표가 되어 계속 되는 악몽이자,끝없는 오늘.
인간들이 마법사를 이 땅에서 몰아낸 때가 있었다,그것을 탄압이라.혹은 개혁이라
부르는건 인간들 뿐이었다,마법사들은 그 날을 학살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아둔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지구의 주인이자 가장 우월한 생명채가 되려는
자만과 욕심에 눈 멀어 버려 저지른 대학살인 동시에 대죄,그것은 어느날 새벽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니노,니노 어서 일어나,니노!다급한 아이바의 목소리에
눈을 떴을 때,니노미야가 가장 먼저 들은 소리는 비명소리였다.
문 밖에서 나는 처절한 비명 소리,마치 짐승이 울부짖는듯한 그 소리에 저절로
몸의 털이 곤두서고 잠이 달아났다,그제서야 알았다.집 안 가득 연기가 차 있었다.
마을에 불이 났다고 아이바는 말했다,집 안 가득 연기가 찬 게 그 이유였던건가.
그럼 불을 끄면 되잖아,분명 자연계 마법사나 수빙계 마법사들이.... 전부 죽었어.
....죽었다고?사고 회로가 정지되고 말았다.마을에 불이 나고 사람들이 죽었다.
이제보니 아이바의 팔에도 꽤 깊게 배인 상처가 나 있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인간들이,마을에 불을 질렀어.불을 끄러 나온 자연계,수빙계 마법사들은 모두
죽었고,치유계의 마법사들도 대부분 죽었어,이제 너랑 나 뿐이야,니노.
우리,둘이서 마을 밖으로 도망치자-.
이해하고,받아들이는 시간 조차도 사치가 되는 순간이었다.뭐 하나 챙길 시간도
없이 로브 하나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마을 뒷 산으로 무조건 달렸다,뒤도 보지
않고 달렸다,문을 연 순간 보인 아비규환의 현장을 니노미야는 아직도 기억한다.
마을 곳곳에 붉게 붉게 꽃이 피듯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바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시체가 난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창과 칼 따위에 찔려 피를 토하며 죽어간
시체도,불에 타 검게 그을린 시체도,고통에 사무쳐 눈조차 감지 못한 시체도.
그 시체들을 밟고서 뛰었다,당장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롭던 니노를 잡아준건
앞장서서 달리는 아이바의 손만이 유일했다,니노미야는 그 손을 더 꽉 움켜쥐곤
산을 올랐다,이 손을 놓는 순간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으니까.무너져내려서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어둔 산길을 얼마나 해치고 달렸을까.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니노미야의 귓가를 스쳤다,아이바가 니노미야의 손을 놓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인간이 쏜 화살에 맞은 왼쪽 어깨에서 벌겋게,피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이바,아이바 일어나,우리 도망가야 하잖아,어서 일어나,어서...!
니노,잘 들어,우리-같이는 갈 수가,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무슨 말이야,왜 같이 갈 수 없는건데.넌 어떡하겠단건데.
난,이 곳에 남을꺼야.니노,혼자서라도 도망 가.가서,비를 내려줘.
지혈을 위해 다친 어깨를 잡고있던 탓일까,벌겋게 핏물 벤 손으로 제 작은 손을 잡고
힘겹게 말을 잇던 그를 앞에 두고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니노미야는 고개를 저으며
숨이 넘어갈 듯 울었다,내가 너 없이 어떻게 가,나 너 없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가야,해 니노.여기 있으면,둘 다 죽어.살기 위해선,비가 내러야 해.
할 수,있지 니노.이거,가지고 정상으로 가,가서,신께 기도 해,비를 불러.
내가 시간을 끌 동안,네가 나 대신 비를,불러줘.
벌겋게 핏물이 범벅된 자연계 마법사들만이 가진다는 초록빛 돌을 받아들고,니노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산길을 뛰어올라갔다,네가 날 살려줘야 해.그 말
한 마디를 수천 수만번 속으로 되뇌이며 뛰었다.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굴러도 또
일어나 뛰었다,뛰지 않으면 죽는 사람 마냥 뛰어선 정상에 올라 곧장 무릎을 꿇었다.
제발,비가 내려주기를.너무 늦지만 않게,아이바가 죽기 전에 한 방울이라도,제발.
뭐에 미친 사람마냥 주문을 외워댔다.스투피 파이,스투피 파이,스투피 파이,스투피-
쿵,쿠르르릉-하늘이 울었다,빛이 번쩍였다.때 이른 소나기가,억수같이 쏟아진다.
툭툭,제 얼굴 위로 닿는 빗방울의 감각에 아이바는 힘없이 웃었다.어딜 얼마나
찔리고 배인건지 기억조차 희미했다,다만 일어설 수 없을만큼 다쳤다는건 확실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손가락 하나 까딱 할 힘도 없었다.하늘이 보이다 보이지 않길
반복한다,니노에게 가야 하는데,기다리고 있을텐데,자꾸만 눈이 멋대로 감겨온다.
왼쪽 어깨에 붙어있던 불도 빗줄기에 젖어 꺼져간다,통증이 옅어지는 동시에 의식도
점점 더 흐려지고 만다,헬리트-헬리트,몇번이고 반복해 마력을 써보려 해보지만
의식만 더 흐려질 뿐이다,스스로는 치유하지 못하는 치유계 마법사라니 진짜 웃겨.
주르륵,웃고 있는데도 눈물이 나고 말았다.이제는 시야의 대부분이 어둠 뿐이다.
미안,미안해 니노,나 너한테,돌아가지 못 할 것 같아-.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죽은 듯이 기절해버린 아이바를 살린건 니노였다.
비가 그치자마자 산길을 다시 내려 와 쓰러진 아이바를 부축해 이 오두막에서 몇날
며칠을 머무르며 아이바를 간호하고 보호했다.인간들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 후
수 백년이 지났다,아이바는 그때의 흉터를 몸에 새기고 인간들을 위해 마을로 다시
내려가 터를 잡고 의원을 냈다,니노미야는 아이바를 이해했다.머리로는 그랬다.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몇백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길어
인간에게는 지나간 과거의 일이겠지만 마법사들에게 몇백년은 마치 찰나같아서.
아직도 그 날 그 때의 연장선에 서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적어도 자신만은.
그러나 아이바는 달랐다,아이바는 언제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간다.
그런 아이바를 알기에,인간을 위해 마을로 내려가겠다는 그 뒷모습을 미처
붙잡지 못하고 홀로 이곳에 남길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수만번 묻고 싶기도 했다.너를 죽이려 했던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을 후회하진 않느냐고 도대체 너는 왜.
너는 왜,그렇게도 인간을 사랑하는건데.어떻게 그게 돼.
자기들이 이 지구상에 주인이자 가장 우월한 생명체가 아니고선 견디질 못해
동물보다 더 동물같이 굴기도 하는 그 족속들을,넌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거니.
말을 뱉어내는 순간,가슴 한 켠이 허하게 비어 버리고 말았다.
잘게 떨려오는 손 끝을 애써 숨기고 당장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한 울음을 삼키며
찻잔을 들고 홍차를 들이켰다,미적지근하게 식은 홍차에서 떫은 찻잎 향이 올라와
입 안을 채운다,원래 이렇게 떫은 홍차였던가,잘 모르겠다 이제는.
아이바의 옅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게,생각해보니 나는 속도 없네.날 죽이려던 인간들의 후손들을 위해
내 힘을 써주고 있는거잖아.우습기도 하다.근데 있지,니노.몇백년을 넘게 살다보니
알게 된게 있어,인간이란 생명체는 참 신기해.고작 몆 십년을 사는 생명체인데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넘어지고,깨지고,일어나.그리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변해.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고 일어나면서도 꾸준히 앞을 향해 가지,과거를 반성하면서.
그 모습을 사랑하지 않을수가 없어,무너지고 쓰러져도 그걸 계기로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그 작고 영민한 생명채를. 내가 사랑하는 인간은 말이야,그때 우리를
죽인 인간들의 후손이고,동시에 새로운 인간이야.그때의 인간들보다 앞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들,그 인간들에게는-죄가 없잖아.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이 앞으로,어떤 앞을 향해 걸어가게 될지-.
하,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너는 그런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는구나.
너에게 인간은 매일매일을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는 아이와 같은 생명채구나.
내 앞에 너는 도대체,얼마나 어른스럽고 박애주의적인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이런 대단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거구나.
.....있지,아이바.
응,니노.말 해.
나는,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믿을게 못된다고 생각해.
그렇구나.
아직도 잠이 들면,네가 내 눈 앞에서 죽는 꿈을 꾸기도 해.
그럴때면 나는 겁이 나,네가 날 떠나게 될까봐 무섭도록 겁이 나는거야.
난 아직,너랑 다르게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있거든.내 기억은 늘 쉼표니까.
니노,
그래도,그래도 노력해볼게,인간을 사랑하고 용서해볼게.
내 세계는 너고,너만이 내 세계인데.내 세계가 그릇된 것을 사랑할 리 없잖아.
나는 그렇게 널 믿어,그래서 네가 사랑하는 것들도 믿고싶어,네가 사랑하는 거니까.
나는 이런 마음으로,네가 가져오는 모든 인간 문물들을 받아들였어.너니까 한거야.
그러니까 난,내일도 너만 믿고 나갈꺼야.인간들이 아니라 너를 믿어볼거야.
날 꼭 지켜줘야 해,보여 쥐,그들이 네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체란걸.
걱정 마 니노,나는 몇백년 전에도 너를 지켰어.몇백년 후에도 너를 지킬꺼고.
그게 내일이라고 다를리 없지,분명 니노도 인간을 사랑하게 될꺼야.
인간들은 모두 신기하게 빛나는 생명체거든,마치 지상에 뜬 별 마냥.
내일 우리가 볼 풍경들은 지금 이 밤하늘보다도 수천배는 아름다울꺼야,분명.
다시금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인다,아까와는 다르게 달큰한 꿀향과 우유 맛이
입안을 감싼다,그래.분명 내일 내가 볼 세계는 아름답겠지.네가 사랑하는 것은 늘
아름다운 것들 뿐이었으니까,살아 숨쉬는 나무들,작고 여린 생명들,정직과 신념.
그런 네가 선택하고 머무르는 세계가 아름답지 않을리 없지,하지만 아이바.틀려.
그 세계가 아무리 눈부시게 아름답더라도 이 순간 만큼은 아니야.
있지,아이바상.
으응,왜 니노?아,슬슬 피곤한거면-
오늘은 자고 가,내일 같이 도시락도 싸고 준비해서 나가자.
....어?진짜?그래도 돼?나 자고 가도 돼 니노?같이 준비도 해줄꺼야?
아니 뭐,싫으면 말고.지금 돌아가도 되긴 하는데.
싫을리가 없잖아,완전 최고야!오늘은 같이 자자 니노!
또 또 변태같은 소리하지 진짜,장난스래 미간을 구기며 괜스래 볼맨 소리를
뱉어내보인다,아이바상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꺼야.몇백년 전의 그때부터
줄곧,내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은 당신과 둘이 있는 모든 순간들이라는걸.
그 안에서 뭐가 더 예쁘고 덜 예쁘고,그런건 전부 의미를 잃고 만다는걸.
오늘보다 더 예쁜 내일,같은건 없어.오늘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벅차도록 아름다울
내일이 있을 뿐이지,그러니까 아이바상.그걸 직접 깨닫기 전까지는.
침대에 자꾸 올라오지 마,바보 아이바상.변태같아-
침대에는,접근 금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