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hain
쌔그

"제 고향이요?"
율(Yule) 족 청년의 길고 풍성한 꼬리가 가볍게 살랑였다. 사내는 마침 얼굴을 향해 포로로 날아드는 작은 위습을 쫓아내려 손을 휘젓던 중이었다. 율 족 특성인 크고 털이 많이 난 귀와 부드럽고 긴 꼬리 덕에 개과 혹은 고양잇과 동물의 몸짓을 닮아 보였다. 기어코 청년의 머리 위에 위습이 살포시 앉았다. 율 족 청년―아이바는 가벼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그란 도깨비불이 무어라 떠들어대는데, 아이바의 귀에는 정전기들이 츠즛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냥, 궁금해져서."
아이바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위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습은 남자의 손가락 위로 날아와 그 위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남자는 가볍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연한 갈색 동공 주변으로 무화과 과육의 색과 무화과 잼의 색이 꽃잎처럼 겹겹이 피었다. 모닥불과 위습의 빛들이 일렁이며 검은색 로브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나무 장작 머리카락 빛 위에 이파리의 색, 나무 그늘의 색이 덧입혀졌다. 그동안 잘 못 느꼈는데. 리하(Litha)는 꽃과 나무의 여신의 가호를 받아서 그런지 화려하구나. 아이바는 간이 조리대를 설치하며 문득 든 생각을 애꿎은 국자를 휙휙 저어대며 털어내려 했다. 아이바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생긋 웃었다. 투명한 연갈색이기도, 불그스름한 색이기도 한 눈동자가 ‘방금 내 생각 했어?’라고, 짓궂은 투로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준다면서, 네가 태어난 곳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해줬잖아.”
“관계가, 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관계가 있으면 삼 년 동안 헤매고 있진 않고.”
남자가 얌전해진 위습에 대고 물방울을 튀기듯 가볍게 손장난을 쳤다. 화들짝 놀란 위습이 폴짝 뛰어올라 남자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남자의 이마에 한 번, 코에 한 번 제 몸을 부딪쳤다. 격렬해진 깜빡임이 인간들이 씩씩대며 화내는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나도 기억이 났을 거고.”
아이바의 귀가 다시 정전기들이 맞부딪혀 즈즛거리는 소리를 잡아냈다. 롭이어 토끼처럼 축 처진 귀가 움찔거렸다.
“얜 말이 많네.”
남자가 대놓고 위습을 귀찮아했다. 남자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도깨비불이 가로로 늘어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또 지직, 즈즛, 파지직. 아이바에겐 여전히 정전기가 일어나는 소리로 들리는 언어로 말하다 홱 돌아서서 아이바와 남자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니까 가라고 했더니 삐졌네.”
“위습 언어도 알아들으세요?”
“마물이라도 무턱대고 검부터 뽑지 않아서 좋은 인간인 줄 알았더니, 역시 인간들은 다 똑같아. 라며 지 멋대로 팽.”
“좀 더 상냥하게 대하는 편이 앞으로도 좋았으려나요….”
“뭣 하러. 쟨 내가 지하미로에 살 때 만난 위습들보다 백배는 말이 많아서, 너나 나만 성가셔.”
남자는 손을 내젓고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껴안았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야지. 남자가 샐쭉 웃었다. 아이바는 남자가 눈꺼풀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어 웃으면 가슴 깊숙한 곳이 쿡쿡 쑤셨다.
너는 정이 쓸데없이 많아서 아무나 간도 쓸개도 빼줄 놈이다.
고향 어르신들은 찬트를 연구하러 고향을 떠나 여행하겠다는 아이바를 두고 혀를 끌끌 찼다. 오지랖이 넓은 이들은 수도에서 한 번쯤 겪어봤다던 사기꾼의 소문으로 오두방정을 떨었다. 저, 그 정도로 맹하진 않은데요. 반박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현자라도 되느냐, 왕도 현자도 넘어가는 게 사기꾼들이여. 역정을 내며 사기꾼을 잡아 심문했다는 사료(史料)를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아이바는 괜히 스튜를 휘휘 저으며 마음속으로 열심히 반박했다. 니노미야 씨는 사기꾼이 아니다. 니노미야 씨가 말주변이 좀이 아니라 심각하게 좋지만 사기의 사 자도 관심이 없으며(정확히 말하면, 없어 보이며) 니노미야 씨의 과거를 이리저리 추측해 보면 나에게 사기를 칠 건덕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삼 년간 그럴 기미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사기라고 부르기엔 무리인 규모지…. 지금 중요한 건 오늘 저녁 식사다. 이쪽에 집중하자. 아이바는 자기 몫의 그릇에 스튜를 덜어 간을 봤다. 슬슬 ‘필살기’를 투입할 마무리 단계에 돌입할 때였다.
“내가 있던 지하미로는 네 고향과 한참 떨어져 있었다며.”
“음…. 그러네요. 그 던전에 들어가게 된 것도, 니노미야 씨를 만나게 된 것도 정말 우연이에요.”
“…우연이라.”
아이바는 캠핑용 가방을 뒤적거렸다. 스튜에는 이걸 꼭 넣어야 하는데. 아이바는 초조해하다가 가방을 거꾸로 들어 내용물을 탈탈 털까 고민하다, 그럴 시간도 아까웠음을 깨닫고 손을 더 깊숙이 넣고 빠르게 더듬었다. 냄비에 걸쳐놓은 나무 국자가 땅바닥으로 미끄러지기 직전. 아이바는 비상식량 주머니에서 목표물을 성공적으로 찾아내 스튜에 부었다.
“…정말 우연일까.”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니노미야는 고개를 쭉 빼어 수프의 무사를 확인했다. 빛깔도, 냄새도 먹음직스럽다. 고기가 적은 점 빼고는 이 정도면 합격점을 줄 만했다. 니노미야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이바는 스튜가 보골보골 끓는 다용도 냄비에 손을 살짝 데고 말았지만. 조건반사적으로 튀어 나려오던 신음은 니노미야가 살짝 잡은 손에 소리를 잃었다. 니노미야의 작은 손은 얼음장 같았다. 니노미야는 뻣뻣해진 아이바에게서 손을 스르륵 빼내고, 고갯짓으로 냄비를 가리켰다. 냄비 옆면에 기댄 국자가 미끄러져 스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나무 국자가 스튜의 맛을 더하는 사고를 막은 아이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에 집중해야지, 식사 당번. 니노미야가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바에게 나무 그릇을 내밀었다. 국자 맛이 안 나면 덜어줄래? 언제까지 끓이고 있을 거야? 놀리지 마세요. 아이바가 눈썹을 휘고 꿍얼거려도, 니노미야의 두 눈은 놀릴 건수를 찾아 도르륵 굴러갔다.
“그. 제, 고향은요.”
아이바는 그릇을 받아들고 급하게 원래 대화 주제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노미야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방실대는 낯이었다. 아이바가 당황하고 허둥대는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했다. 아이바는 괜히 스튜 표면 위로 생기는 공기 방울의 수를 세며 평정심을 찾았다. 그러니 일단 던지고 본 고향의 풍경도 떠올릴 수 있었다.
머리 위로는 낮에는 푸르고 해 질 무렵에는 선홍빛, 밤에는 보랏빛이기도, 검푸르기도 하며 새벽녘에는 초록빛을 품기까지 한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낮에는 하얀 것은 구름이고 밤에는 별과 달이었다. 가운데가 조금 볼록한 초원엔 구름처럼 하얀 양이 풀을 뜯었고, 별처럼 하얀 풀꽃이 흩뿌려졌다. 멀리서 보이는 산맥 사이에서 불던 바람 소리가 선선하고, 자주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어 모자를 써야 했다.
"평범한 고원지대 마을이에요."
뜨거우니까 충분히 식혀서요. 아이바는 스튜를 가득 담아주고 바질 이파리를 올렸다. 니노미야는 스푼을 입에 물고 스튜가 어느 정도 식기를 기다렸다.
"평범한?"
"그러니까…. 율 부족 마을이라고 해서 루(Lugh) 족 고원지대 마을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래도 인카루시 대륙은 루가 과반수이니까, 그쪽이 익숙하시려나. 해서요…."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전부 꼬리를 달고 있어서, 좁은 공간에선 털이 좀 날린다는 정도? 아이바는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니노미야의 눈이 느리게 몇 번 꿈뻑였다가. 눈썹 위는 천천히 일그러지고, 눈썹 사이도 비슷한 속도로 구겨졌다.
“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 잘 몰라.”
아이바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그릇을 엎을 뻔 했다. 실수했다. 니노미야 씨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지. 최대한 니노미야를 의식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는데도, 상식 이상을 넘어 ‘당연한 삶’에도 의문을 표하는 니노미야에겐, ‘당연한 기준’ 밖의 이야기였다. 니노미야의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잔뜩 구겨진 얼굴이 펴지며 환한 미소를 담아냈다.
“농담이야. 너랑 본 게 있는데.”
내가 그 정도 눈치가 없진 않아. 니노미야는 바질을 숟가락으로 톡 건드리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평범한 인간’의 기준이 이해하기 힘든 건 맞아. 예전에 인간 마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 안 나기도 하고.”
“….”
“지금은 네가 여기저기 보여주고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니노미야가 로브 후드를 벗었다. 조그맣게 난 검은 뿔이 모닥불 빛에 반사되어 반질거렸다. 니노미야의 뿔은 고양이의 귀나, 산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한 건 리하 족 극히 일부에게서 나타난다는 나뭇가지가 몸에 돋는 식물 동화 현상으로 보기엔 힘들었다.
“인간도 마족도 아니면서, 여기저기 여행하는 건 큰 행운이지.”
니노미야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자조적으로 느껴졌다. 아이바는 스튜를 담은 나무 그릇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이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아이바의 말재주로는 말을 돌려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다. 니노미야는 바질을 아이바의 스튜 위로 옮겼다. 역시 사냥을 해야 했어. 스튜치곤 너무 부실해. 반찬 투정은 분명한 농담조였다.
아이바에게 니노미야는,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바와 니노미야가 2인 파티를 맺어 던전 탐사를 시작한 지도 벌써 3년 남짓 흘렀다. 짧은 시간이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봤다고 생각했고 ―서로 ‘평범한 인간 생활’의 상식이 부족한 니노미야가 벌인 사고라던가, 그렇잖아도 덜렁대는 편인 아이바의 환장의 실수 대잔치를 수습하곤 했다― 그만한 유대감도 쌓았다고 느꼈는데. 막상 니노미야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으면 확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변덕이나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표현은 어딘가 맞지 않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니노미야는 평생 풀리지 않을 매듭 같았으니까.
―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면….
「햇빛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면」으로 시작하는 옛 연가(戀歌)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이바의 기억에 멜로디로만 맴돌던 노래였었다. 유년기에서 자라 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된 아이바에게는 언제나 함께 부는 바람 같은 노래였다. 아주 울적하거나 외로운 날엔 마을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노래를 열 번쯤 부르고 내려오면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어 좀 나아졌고. 즐거운 날에는 어깨를 지나가는 바람들이 같이 기뻐해 주듯이,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양을 세는 대신 이불 안에서 노래를 웅얼거리고 눈을 감으면 베개가 꼭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이바는 베개를 끌어안고 아침 햇살의 향기를 맡으며 희미해지는 꿈결에 대고 속삭였다.
보고 싶어.
찬트 연구가의 길을 걷기로 한 이유도 제목을 모르는, 가사는 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노래 때문이었다. 아무도 모를 리가 없어. 나만의 멜로디일 리가 없어. 확신에 가까운 집념으로, 아이바는 낡고 삭아버린 자료들의 무덤에서 겨우 짧은 악보 한 장을 찾아냈다. 제목은 없었다. 익명의 기록자는 자신이 작곡자가 아님을 밝혀두며, 이 노래를 찾아다녔을 아이바 같은 이들을 위한 메모를 남겨두었다.
「―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밑으로 무언가가 더 적혀 있었는데, 해석하지 못했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나를 찾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아이바는 익명의 기록자에게 묻고 싶었다. 죽은 사람에게 따져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아이바는 악보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직감을 나침반으로, 노래가 인도하는 대로, 하늘의 빛을 실은 바람을 길 삼아 무작정 걸었다.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던 날은 언제일까, 아이바는 노랫말을 되뇌며 지하미로 구조로 지어진 유적 던전 최하층에서 나가려던 참이었다. 메아리로 울리던 노랫소리가. 아이바의 발을 멈추어 세웠다.
― …나는, 너를….
무지갯빛이 귀 밑으로 지나가고, 은하수가 꼬리를 물들인, 비 온 뒤 낮과 밤의 하늘빛을 머릿속에 그리고, 기록자가 남긴 마지막 메모에서 나를 찾고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일지 무수한 상상을 해왔다. 그보다 더 많이 상상한 것은 왜 기억도 나지 않는 탄생의 시작에서부터. 낳아준 부모조차 모르고 자장가로도 흥얼거리지 않은 이유. 유명한 학자도 음유시인도 모르던 이 노래의 기원(冀願)과, 기원(基源)이었다.
아이바는 목소리가 들리는 벽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차하면 벽을 뚫을 방법까지 고려하려던 찰나, 벽이 밀려 반 바퀴를 돌고. 아이바를 벽 반대편으로 떠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리벙벙해졌다. 아이바는 회전하는 벽에 밀려 나동그라진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 …다시, 만나러….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가깝게 들렸다.
소년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머리에는 새까만 뿔이 솟은, 아이바 또래의 조그만 사내였다. 사내는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밀가루 반죽처럼 허여멀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 …너를 다시, 만나러 갈 거야….
사내는 작은 손을 뻗어 아이바의 두 뺨을 어루만졌다. 그는 아이바의 귀를 주무르고, 아이바의 꼬리를 쓰다듬다가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역경과 고난 끝에 마침내 손에 넣은 모험가처럼. 눈을 뜨고 세상을 처음 보게 된 동물들처럼.
사내의 눈망울에 어른거리던 반짝임이 이슬로 내려와 맺혔다. 아이바는 조심스럽게 남자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투명한 물줄기가 아이바의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왜, 우세요? 많이 놀라셨어요? 제가 잘못한, 아니 잘못했어요. 수많은 물음은 사내가 아이바를 와락 끌어안으며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쑥 들어갔다. 아이바는 훌쩍이거나 숨을 가다듬는 소리 없이, 아이바의 옷깃을 적시는 남자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 …마사키….
아이바를 끌어안은 미지의 존재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눈물에 젖은 앞섶이 조금씩 마를 즈음. 아이바는 한 품에 들어오는 남자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아이바는 간질거리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고동은 이 남자만을 위해 존재했다는 듯이, 무의식에서부터 받아들였다. 노래를 부르다가 잠이 들면 흐려지는 이유 모를 그리움이 맑아 왔다.
― …저기….
― ….
― …제 이름을, 아세요?
남자는 품에 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아이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눈빛을, 어디서 만난 적 있었던가? 아이바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 조금은 이질적인 느낌이 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입을 먼저 연 사람은, 아이바의 옷을 덥석 잡고 확 당긴 남자 쪽이었다.
―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
조금 가라앉아서, 끝이 갈라지는 덤덤한 목소리는,
― 그 사람을 찾으려면 내가 태어난 화원으로 가야 해.
절박했다. 절박하고, 간절하다는 표현 외에는 어떤 단어도 가져올 수 없었다.
― 이름이 뭐예요?
― 니노미야. 니노미야 카즈나리.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싶었다. 니노미야의 손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아이바는 손을 놓지 않았다. 니노미야가 자신의 손을 놓지 않도록 단단히 깍지까지 끼웠다.
― 밖으로 나가는 길은 제가 알아요.
아이바의 손이 먼저 벽을 밀고 나갔다. 아이바의 코는 정확하게 지나온 길을 지시했다. 아이바는 뒤를 돌아가며 니노미야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처음에 뒤를 돌아봤을 땐 얼떨떨하더니, 세 번 정도 돌아보니 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주변에서 니노미야를 발견한 지하 미로 마물들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마물들은 아이바와 니노미야를 앞질러 입구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수가 너무 많았다. 미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몰려든 마물들을 처리할 전투력이, 아이바에게는 없었다. 니노미야가 손을 놓았다. 아이바는 재빠르게 뒤를 돌았다. 아이바의 등 뒤에 있어야 할 니노미야가 보이지 않았다.
― 무르구나.
니노미야가 아이바의 옆을 소리 없이 지나쳤다. 힐끗 돌아보는 눈이, 아이바를 나무라는 것 같았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손을 끌어 잡았다.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손을 잡지 않은 손에 보이는 마법진과, 마물의 머리 위에 떠오른 똑같은 마법진에서 내리치는 낙뢰의 섬광과, 미로를 뒤흔드는 우렛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이 불었다. 눈을 뜨니, 던전 밖이었다. 아이바는 사막 모래밭에 몸이 반쯤 파묻혀 허우적댔다. 사막의 밤은 뼛속까지 시렸고, 몸이 달달 떨렸다. 아이바는 입 안에 들어온 모래를 뱉고 잔기침을 했다. 지하미로를 나왔나? 그 사람은? 니노미야 씨는 어디에 있지? 아이바는 고개를 푸르르 털어 머리와 귀에 들어온 모래를 털고 니노미야를 찾았다.
― 네 동정심이 종말을 불러올 거야.
아이바는 오한을 느끼며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니노미야가 감흥 없는 얼굴로, 사막에 출몰하는 거대 마물의 목을 조르고 내팽개쳤다. 마물이 고통스러워하며 모래밭을 굴렀다. 모험가들 몇 명이 몰려와도 소용없었고, 많은 여행자를 사막 망령으로 만든 그 괴수를, 니노미야는, 손끝에 모은 마력탄 단 한 발로 검은 연기로 되돌려 보냈다. 아이바는 찬트의 기원을 배우며 귀에 박히게 듣던 전설을 떠올렸다.
이 세상에는 인간에도, 마족에도 속하지 않는 절대 악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난 종말의 안내자. 이 세상에 끝을 선고하러 올 살아 있는 재앙.
인간과 마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을 「웬」이라고 불렀다.
웬은 인간으로 살아오다, 어느 순간 머리 위에 뿔이 자라고. 세상에 피할 수 없는 혼란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 재해는 종말의 전초가 되며. 웬이 세상을 만족할 만큼 부수고 수많은 피 위에 선다면, 종말로 가는 문이 열린다는, 잊혀진 전설이 있었다. 찬트는 웬을 봉인하고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신에게 바치는 성가(聖歌)였다.
― 나는 언젠가 이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절망이거든.
무대 위 배우가 오랫동안 연습한 대사를 관객에게 건네듯, 니노미야는 아주 초연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말했다. 니노미야는 손가락으로 아이바의 턱을 치켜들었다.
― 도망치고, 부정해도, 다시 나를 가두려고 해도 소용없어. 이미 벌어진 파국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 ….
― 걱정 마. 네가 역적에서 구세주가 될 기회를 줄게.
니노미야는 망설임 없이 아이바가 허리에 찬 단도를 빼어 아이바의 손에 들려주고. 손을 확 잡아당겨 서늘한 칼날을 목으로 들이밀었다.
― 나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이지 않으면, 오늘을 아주 많이 후회하게 될 거야.
칼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같은 사람이 맞을까. 지하미로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이바의 이름을 부르며 안기고.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니노미야는. 웬은. 세상을 종말로 이끄는 재앙은. 정말로 같은 사람일까.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거나, 태어난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도, 그 눈물도. 전부 거짓말일까?
― …알고 있었어요.
― 정해졌네. 그러면….
― 함께 찾아요. 당신이 태어난 화원.
단도의 날이 니노미야의 목이 아닌, 사막의 고운 모래를 갈랐다. 니노미야는 단도를 주운 아이바의 손목을 낚아챘다. 손을 벗어난 칼은 아슬아슬하게 니노미야를 비켜 나가 아이바의 발밑 모래더미에 꽂혔다. 아이바는 칼을 주우려 뻗은 니노미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깍지를 끼웠다. 니노미야가 아이바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 전혀 그리워하지 않을 수도, 찾고 나서도 기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시작이 거기 있잖아요.
니노미야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켰다. 아이바는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전부 거짓말이 아니었네. 저항은 없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드디어 만났잖아. 이대로 놓칠 거야? 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 칼로 목을 긋고 싶어서, 열심히 찾아다닌 게 아니었잖아.
네 앞에 있는 그가 죽으면. 너는 오늘을 아주 많이 후회할 거야.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그리고 그는. 그런 결과를 바란 게 아니야.
아이바는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강한 직감과 염원의 편을 들었다.
― 찾는 사람이 있다면서요.
그 후, 어떻게 사막을 건너 마을까지 도착했는지는, 다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끄집어내려고 해도 말끔히 사라져서 시작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바의 말에 흔들린 니노미야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 …왜?
아이바의 답을 들은 니노미야가 주저앉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는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아이바?”
니노미야가 귀리 빵을 식량 주머니에서 꺼내 아이바에게 건넸다.
“빵, 먹을 거지?”
“…아, 네!”
“먹으면서 이야기 계속해줘.”
귀리 빵이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아 아이바의 손 안으로 쏙 들어왔다. 아이바는 빵을 찢어 스튜에 찍었다.
눈가가 메마르고 뻑뻑해질 정도로 실컷 운 니노미야는 지쳐 쓰러졌다. 아이바는 의사에게 그를 데려가려다 니노미야의 머리 위에 솟은 뿔을 보곤 생각을 접었다. 대신 그날 받은 의뢰비를 털어 그 마을 여관에서 가장 구석자리의 1인실을 잡았고. 니노미야에게 침대를 내주었다. 뿔이 베개를 찢으면 안 되는데. 아이바는 품이 큰 로브 후드에 덮인 뿔을 만지작대다가, 앞으로 닥칠 종말이니, 재앙이니, 니노미야가 경고한 마지막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절망의 차가운 손을 잡으면서도 그를 죽이지 않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일어나면 짐작 가는 곳이 있냐고 물어봐야지. 계획이 분명해지자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고. 부스스 일어나니 아침이 밝았다. 커튼 사이로 스며오는 햇빛이 눈부셨고. 아이바는 비몽사몽한 정신을 한참 만에 붙잡고 나서야 먼저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는 니노미야를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일단, 꼬질꼬질했다. 무화과 비슷한 향기가 났지만 오래된 지하미로에서 나는 꿉꿉한 이끼 냄새도 묻어 있었다. 투명한 두 눈동자는 아이바를 담았고. 희멀건 볼과 턱에 난 점은 흰 종이에 뿌려진 잉크 흔적 같았다.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넓은 나뭇잎 모양 귀가 보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데. 살짝 부어오른 그의 눈가가 거짓말 같았다. 니노미야는 굉장히 언짢은 얼굴로 아이바를 보고 있었다. 비뚜름하게 비튼 입술 사이에서 처음으로 새어 나온 말은.
배고파.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저희 마을은 신들의 서사시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아요.”
“학자나 샤먼?”
“음유시인에 가까워요. 주로 고대 찬트를 해석해서 지금 쓰는 마법 찬트로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요. 수요가 많거든요.”
“던전이 많이 발견되어서 그런가?”
“그렇죠…. 어르신들이 요즘 음유시인은 전투만 한대서 걱정이 많으시더라고요.”
아이바는 일단 니노미야를 방 안에 딸린 욕실로 밀어놓고, 여관 주인에게 팁을 밀어주며 방으로 아침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여관에서 만들어준 식사는 따뜻하고 맛있었다. 메뉴는 비프 스튜와 에그노그가 올라간 샐러드, 빵이었다. 아이바는 스튜에서 없는 고기 대신 감자를 열심히 건져내 니노미야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맛있었는데, 거기 비프 스튜. 현실은 채소밖에 없었다. 육포라도 담글 걸 그랬나.
씻고 아이바의 여분 옷으로 갈아입은 니노미야는 왼손으로 서툴게 아이바의 숟가락질을 따라 했다. 배고프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동작이 빨랐다. 빨랐지만 정말 생존을 위해 숟가락으로 스튜를 떠서 입에 넣는 행위부터 영 떫은 얼굴빛이, 시장이 반찬인 데다가 영양소와 맛까지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아이바는 빵을 건네주며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 니노미야는 덤덤하게 말했다. 뿔이 나면서부터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니노미야는 오랫동안 빵을 우물거리다가 물었다.
― …정말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줄 거야?
니노미야는 품이 큰 아이바의 옷소매를 둘둘 걷었다. 아이바는 그의 팔뚝에 언뜻 보이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보고 꼬리를 늘어트렸다가.
― 제가 먼저 말했잖아요. 같이 찾자고.
일부러 귀를 쫑긋거려가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 하나보단 둘이 낫잖아요. 저 사람 찾기는 몰라도. 길 찾기는 자신 있어요. 어제 보셨잖아요.
니노미야에게서 엷은 미소가 어슴푸레 비쳤다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고 앞으로 떠날 길을 논의하는 동안 입꼬리에 미소가 드문드문 보였다. 아이바가 니노미야가 첫인상과 다르게 밝게, 그것도 많이 웃는 편임을 깨닫기까진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눈가가 부어오를 정도로 우는 일은 더 없었다. 니노미야는 문득 두 눈에 반짝이는 투명한 빛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말없이 올려다보곤 했다. 아이바는 쓸쓸한 옆모습을 보며, 니노미야가 울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저처럼 타고난 마나가 부족하면 잘 해봐야 왕립 도서실이나 기록실이나 음유시인 길드에 들어가는데, 그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자 그렇잖아도 축 처진 편이던 귀가 더욱 가라앉고, 긴 꼬리도 힘없이 늘어졌다. 전공 불문, 연구가는 밥 벌어먹기 힘든 직업이었다. 수많은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이 많아지고, 무술도 문명도 발전할 수 있는데. 연구자를 제대로 대우해주는 길드는 거의 없었다. 하물며 주 근무처인 도서실이나 기록실에서도 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며 달달 볶았다.
그나마 아이바가 있는 길드 ‘잊혀진 계절’의 길드장이 고대 마법을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 출신 모험가여서, 던전 탐험가 길드치곤 학자와 연구자 수가 많았다. 그런 길드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바는 길드 내에서 ‘찬트 연구가’보다 ‘쓸 만한 수색 전문가’로 임시 파티에 끼고, 의뢰를 받았다. 다른 연구자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비슷비슷한 현실을 체념한 지 오래였다.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인 아이바의 은행 잔고는 니노미야를 만나면서 수도 상업지구의 가장 좋은 여관에 묵고, 주말에 비싼 식당을 예약해도 여유가 될 정도로 나아졌다. 니노미야는 던전에 드나드는 마족의 언어와 문화, 마물들의 생태와 습성을 잘 알고 있을뿐더러 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했다. 마나 보충, 던전에 흐르는 마나의 흐름과 상관없이 고대 상급 마법을 쓰고, 자체 회복력도 빨라 회복 보조도 필요 없었다.
“그래서 별로 안 놀랐구나. 웬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테니까.”
이유는 간단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그래서 버려졌던 거겠지? 인간들은 도움이 될 만한 힘보다 ‘인간이냐’가 더 중요하니까. 아이바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재앙은 그를 버린 인간들을 저주했다. 그의 힘은 증오에서 왔고, 인간을 향한 원망 하나로 강해졌다. 자신의 진실을 숨기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니노미야를. 정확히는 ‘니노미야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많았다. 아이바는 한동안 니노미야 앞으로 온 청탁을 대신 거절해주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니노미야는 그를 향한 세상의 경외심에 환멸이 나 충동적으로 몇 번이나 그의 뿔을 감추었던 로브를 벗으려고 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와 눈을 마주치면, 앓는 소리를 내며 모자에서 손을 거뒀다. 니노미야의 가라앉은 눈이 말했다.
나는 영원히 인간을 좋아하지 못할 거야.
아이바는 어떤 말도 니노미야의 환멸을 달래줄 수 없음을 잘 알았다. 아이바는 이것저것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대신 니노미야를 꼭 껴안았다. 차가운 몸이 조금이나마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감히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수준의 깊이가 아니었다. 니노미야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감정이 있는 이상 현상에게 아이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면 만들자는 오기이기도 했다. 니노미야는 팔을 아이바의 허리에 두르고 아이바의 온기를 나누어 받았다.
나를 데려온 책임을 지는 거야? 아니면 내가 종말을 앞당길까 봐 무서운 거야?
아이바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땅한 이유를, 분명히 전할 수 없었다.
― 그냥요.
“놀라긴 했어요.”
“말로만 듣던 웬이니까?”
“아뇨. 그것보다는….”
웬은 니노미야 하나만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와 여행하며 던전에서, 유적에서, 어떨 때는 사람이 많은 광장 한복판에서 웬과 마주쳤다. 웬은 사람이라기보단 마물을. 마물이라기보단 무언가를 빚다 만 덩어리, 부서지고 녹아내린 덩어리 형태에 가까웠다. 웬은 인간을 습격했다. 던전 안에서 만난 웬은 마물을 먹어 치우고 마족을 덮쳤다. 재앙의 씨앗이란 건 인간이 감당할 게 아니야. 니노미야는 뿔만 남기고 자멸해 녹아버린 웬의 흔적에서 눈을 돌렸다.
― 세상에 절망을 가져다주기 전에 자신에게 절망하거든.
그래서 인간의 이성과 육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니노미야는 머리 위에 솟은 자신의 뿔을 만지작거렸다.
니노미야처럼 머리에 뿔이 달렸을 뿐. 인간의 몸이 무너지지 않은 웬은 단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왜 나만 인간형인 걸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연극배우가 독백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뿔을 노려보는 눈만큼은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이것밖에 없었어.
― 내가 제일 최악이니까.
농담조인데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텅 빈 눈빛이, 학습된 절망이, 이제 더 절망할 기운도 없고, 희망을 바랄 기운은 더더욱 없어 그저 심연을 주어진 운명으로 생각하고 빠져들려고 하는 감은 눈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이바는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그런 말을 듣는 건 싫어요.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무화과 향이 나는 절망은 다정했다.
― 왜 네가 울고 그래. 네가 그럴 일은 없는데.
뺨을 문지르는 손이 부드러웠다.
나는 웬이야. 인간이고 마족이고 할 것 없이 적이야. 니노미야는 자신이, 운명이 그은 선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무고한 사람을 해친 적이 없잖아요. 인간도, 마족도. 하물며 던전 광산에서 보석을 캐내는 코볼트도. 지하미로를 막았던 마물은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말을 하고 싶은데 딸꾹질이 방해해서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 …니노미야 씨를 믿어요.
믿고 싶은 게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믿어요. 숨이 가빠서 나머지 말들을 잇지 못했다.
― …왜?
아이바는 딸꾹질과 함께 니노미야를 절대로 납득시킬 수 없는 대답을 토해냈다.
― 그냥요.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니노미야는 픽 웃으며 스튜를 떠서 먹었다. 정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제는 숟가락질이 자연스러웠다.
“또?”
“또? 라뇨. 진심이에요. 믿어주세요.”
“정말 그 이유만으로 나를 지하미로에서 나오게 해주고, 내가 태어난 곳을 찾아주고, 사람도 찾아주고?”
“진짠데. 처음 만났을 때 똑같이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니노미야 씨….”
정말 많이 울었잖아요.
아이바는 뒷말을 삼켰다. 별로 떠올리고 싶진 않겠지. 니노미야는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아이바를 가는 눈으로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빵을 스튜에 찍었다.
니노미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두려움과 놀라움보다 반가움이 더 앞섰다. 나를 찾고 있던 사람은 저 사람이었구나.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기쁘고. 니노미야가 안겨서 자신의 이름을,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자 미안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같은 노래를 부르며, 마물이 나타나 길을 막는 미로를 헤매고. 미안해요. 아이바는 주저앉아 눈물을 떨구는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늦게 찾아서 미안해요. 밤바람이 찼다. 아이바가 손을 잡았다가 품에 안은, 때를 모르는 종말은 더 시렸다.
“믿어.”
니노미야가 아이바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이바의 꼬리가 털을 부풀리고 빳빳하게 섰다. 아이바는 빨갛게 자국이 남은 이마를 문지르며 니노미야를 억울한 눈으로 흘겼다.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네가 그 말을 했던 마음만큼은, 처음 말해줬을 때부터 믿고 있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스튜는 바닥을 보였다. 아이바는 냄비에서 으깨진 감자와 채소 조각들을 싹싹 긁어내다 니노미야의 그릇으로 시선을 옮겼다. 숟가락질도, 비워지는 속도도, 아이바 기준에선 영 시원찮았다.
"입맛에 안 맞아요?"
축 처진 귀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고기가 없죠. 부실하죠. 제가 마물을 못 먹는 건 아닌데 그 시궁쥐를 잡는 건 너무했잖아요. 여기 물도 그런 편이라 끓여야 먹을 만한데 위생상 어쩌구저쩌구. 니노미야는 아이바가 그러건 말건 긁어낸 감자 조각을 퍼서 우물우물 씹었다. 몇 번 씹지 않아도 감자는 부드럽게 넘어갔다.
“맛있어서 아껴 먹는 중이야.”
“….”
“진짜야. 좋아하는 맛이야. 나만 먹고 싶다고.”
기운 없이 늘어졌던 아이바의 꼬리가 좌우로 천천히 살랑거렸다. 울적하게 휘었던 눈썹도 쫑긋 올라갔다. 니노미야는 스튜의 감칠맛을 음미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애플버터를 왜 붓나 했더니.”
“저만의 비법이에요!”
스튜에 사과를 넣으면요. 잡냄새도 사라지고 사과 냄새가 향긋해져서 기분도 좋아져요. 감칠맛도 좋아지거든요. 원래는 그냥 사과를 쪼개 넣으면 더 맛있고 아삭아삭하고…. 걱정을 금세 날려버린 꼬리가 붕붕 돌아갔다.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이바는 귀를 파닥거리며 더 쓰다듬어달라고 어리광을 피우려다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머리를 치웠다. 깜,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주인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졸라대는 강아지처럼 굴었어. 아이바가 벌렁벌렁한 심장을 부여잡으며 방심한 사이 니노미야의 손이 다시 올라와 아이바의 머리를 잔뜩 헤집었다. 이번엔 양손이었다. 앗, 잠시만요. 털 날려요! 간지러워요! 아이바는 귀를 다시 파다닥거렸다.
“그 노래는 친구가 가르쳐 줬어.”
아이바는 붕 뜬 머리를 가라앉히다가. 다시 머리를 쓰다듬는 차분한 손길과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부르진 못했지만. 음색이 좋아서. 매일 불러 달라고 졸랐어. 귀찮을 텐데 싫은 티를 한 번도 안 냈지.”
“….”
"누구에게나 다정했어. 나에게도 상냥했고. 이 답 없는 세상까지 사랑할 정도로.”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쓰담던 손을 거두고 다 식은 스튜를 떠 입에 넣었다. 입김으로 식힐 필요가 없으니 먹는 속도가 빨랐다.
“그 애는, …아팠었는데. 그걸 오랫동안 숨기고 있었어.”
잘 먹었습니다. 니노미야는 빈 그릇을 아이바에게 들려주고 모닥불에서 끓던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찻잎을 한 스푼 컵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곧았다.
“어떻게든 낫게 해주고 싶어서, 갖은 애를 썼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어. 못하는 게 있으면 되게 했고.”
“….”
“그런데 아무것도, 어떤 방법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어.”
컵 바닥에 가라앉은 찻잎에서 붉은 꽃잎이 피어났다. 니노미야는 턱을 괴고 물이 붉게 물드는 과정을 구경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그 애가 이 세상을 사랑했던 이유가 아직 있기 때문이야. 그게 뭔진 아직도 모르겠고. 알더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
“그냥, 내 개인적인 원한보다 미련이 더 크게 남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너한테 정도 많이 들었고.”
니노미야는 각설탕 한 조각을 차에 넣었다. 퐁당. 찻물이 던전 바닥에 튀었다.
“니노미야 씨가, 찾는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찾아, 그 애가 눈 감은 자리라도 찾으려는 거야.”
“….”
“거기가 우연히 내가 태어났던 꽃밭 근처였을 뿐이고. 삼 년 동안 묻고 싶었잖아?”
큰 냄비에 설거짓거리를 모으던 손이 허공에서 뚝. 멈추었다. 네. 정말 묻고 싶었어요.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니노미야 씨가 태어난 화원으로 가야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식기가 부딪혀 달각달각, 자잘한 소음을 냈다. 진짜 묻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니노미야가 해준 이야기가 아이바에게 실낱같은 기대의 끈을 쥐여주었다. 지하미로에서, 니노미야가 아이바를 끌어안고. 아이바에게 처음으로 건넸던 말의, 이유.
“…제가, 그분이랑….”
― …보고 싶었어. 마사키.
“…닮았어요?”
정적이 흘렀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에게 화가 나 달아난 위습이 항의차 돌아와서 시끄럽게 조잘조잘 떠들어주길 바랐다. 괜히 물어봤어. 이렇게 어색해지기 싫은데.
퐁. 니노미야가 찻물에 설탕을 담그는 소리가 등 뒤에서 다시 들렸다.
“그 애 이름도 마사키였어.”
“….”
“…닮았냐면, 응. 아주, 많이.”
침묵이 흘렀다. 니노미야는 찻물을 던전 바닥에 부었다. 너무 오랫동안 우려 향이 떫어지고, 텁텁해져 새까매진 수색에 덜 녹은 설탕 알갱이가 섞여 흘렀다.
"…오늘은 제가 망볼게요."
아이바는 팔을 걷고 웃었다. 욱신욱신 아려오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면, 니노미야의 그리움에 감히 자신을 비교한 치기를, 니노미야의 소중한 이를 부러워했던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면, 평소처럼 웃어야 했다.
“늘 니노미야 씨가 불침번이었잖아요. 피곤하실 텐데.”
“난 인간이 아니잖아.”
“이제까지 여관에 도착하면 바로 베개에 머리 대고 자던 사람이 누군데.”
니노미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시선을 무시하고 가방에서 그의 침낭을 꺼내서 펼쳤다.
― 니노미야 씨,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요.
동부 유적 던전 탐사를 도와주고 보수와 팁 외에 수도 전통 방식으로 빚었다던 독한 술을 답례로 받아 함께 마셨던 적이 있었다. 술이 센 편이었던 아이바에게도 한 잔 마시자마자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핑글 돌 정도였다. 그 술은 결국 니노미야가 전부 비웠는데, 니노미야는 얼굴만 조금 붉어질 뿐 발음이 새거나 꼬이지도 않고, 눈이 풀리지도 않고 아주 말짱했다. 와, 치사해. 웬이라고 인간 술도 안 먹혀요? 어쨌거나, 한 잔 만에 가버린 아이바는 탁자에 엎드려 꼴사납게 울었다.
― 또 그 소리. 경각심을 좀 가지라니까.
― 진짠데. 저는 니노미야 씨를 만나서 정말 즐거워요!
시작은 분명 훈훈했다. 훈훈했는데.
― …그런데, 니노미야 씨를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훅 몰려온 술기운에 갑자기 북받쳐서는.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하소연을 했다.
― …저는, 니노미야 씨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좋아하는데요….
― …아이바.
― 니노미야 씨는, 제가. 싫으신가요….
니노미야는 술주정뱅이와 같은 여관방을 쓰기 싫다느니 뭐니 하며 베개를 던지려다가. 아이바가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하자 아이바를 와락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 미안해.
눈물이 무거워 어물어물 감기던 눈이 뜨였다.
솔직히, 니노미야가 나는 원래 변덕쟁이라느니, 나와 파티를 짜면서 그 정도 각오도 안 했냐느니 키득댈 거라고 생각하고, 술기운으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었다.
― 네가 모르는 나를, 아직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아.
― ….
― 미안해. 그냥,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니노미야는 아이바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 확실하게 말할게. 나는 네가 좋아.
― …니노미야 씨….
― 술 취해서 일어나면 다 까먹겠지만. 네가 좋다고. 네가, 너무, 좋다고….
― …왜 우세요…?
지금 생각하면 니노미야가 정말로 울었는지는, 그 방에 초를 켜지 않아서 확실하지 않았다. 니노미야의 말에 놀라긴 했어도 술기운이 전부 달아난 건 아니었고, 펑펑 운 쪽은 아이바였으니 시야가 눈물로 번져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니노미야는 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울긴 누가. 주정뱅이는 얼른 자. 술버릇으로 우는 놈들이 꼴불견이라더니,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질질 끌어 침대에 눕히고,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던졌다. 니노미야 씨도 취했어요? 술에 취한 척, 철없이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이바는 자신을 짓누르던 이불 뭉치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 …니노미야 씨.
― …왜.
― …좋아해요.
― ….
― …정말, 많이….
선(善)은 초라하고, 악(惡)은 화려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칫하면 악에 손을 뻗고 악을 동경하게 되어 쉽게 물들곤 했다. 그래서 웬이 태어나고, 세상은 재앙의 위협을 받았다.
― 울고 싶으면요.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잔뜩, 펑펑 울었으면 좋겠어요.
― …안 울었다니까.
― 싫다면 저를 불러주세요.
아이바가 누운 침대에 기대 앉아 있던 니노미야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달빛이 니노미야의 머리 위에 장막을 펼쳤다. 니노미야가 투명한 눈을 깜빡였다. 아이바가 마주한 악은 여렸다. 슬픔에 솔직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픔을 끌어안고, 억지로 덮었다. 새어나오는 아픔을 필사적으로 잡아서 눌렀다. 니노미야 카즈나리의 경계는, 처절한 발악에서 왔다.
― 제가 니노미야 씨를 속상하게 하면, 꼴도 보기 싫겠고 저도 면목 없지만요….
― ….
― …그래도, 저한테 기대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
― ….
― …미더운 구석이 하나도 없더라도요.
시무룩하게 내려간 꼬리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니노미야가 침대에 손을 짚고 올라왔다. 니노미야는 하얀 이불을 걷어내고, 하얀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 그건 싫어.
삼 년간 아이바의 몸은 니노미야의 체온에 익숙해졌다. 여름에는 더위를 먹고 니노미야에게 착 달라붙어 시원하게 해달라는 둥 헛소리를 해서 명치를 걷어차인 적도 있었다. 아이바의 뺨을 감싸는 작은 손은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나무 그늘의 서늘함을 실었다. 숨도 한기가 느껴지네.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입술과 입술 사이 거리를 단숨에 좁히고, 낯선 체온을 살포시 내리기 직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살포시 감은 속눈썹이 아이바의 눈꼬리 근처에 난 점을 간질이고 나서야.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자신에게 온기를 나누어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 널 좋아한다고 했잖아.
입술을 지나간 온기는. 환하게 웃는 얼굴만큼이나 따뜻해서, 아이바는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니노미야가 또 장난을 치는 건지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밤을 새웠다.
그런 고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고백을 하고. 긍정인지, 같은 마음인지 모를 키스와 말을 화답으로 받은 지가 고작 며칠 전이었다. 아이바는 상상 속에서 꼬리를 꼭 껴안고 엉엉 울며 데굴데굴 구르고 발이라도 허공에 뻥뻥 구르고 이불을 걷어찼는데. 니노미야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요즘 잠을 못 자.”
예전과 똑같이 아이바를 대했다.
니노미야는 씻고 와서 침낭 안에서 한참 동안 뒤척거리다가, 잠이 안 와. 아, 진짜 안 졸린다니까. 차를 너무 많이 마셨어! 생떼를 써가며 아이바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다고 불침번을 또 서는 건 좀.”
“너 잘 때까지 내가 안 자면?”
“그 전에 다시 눕히고 자장가 불러줄 거예요.”
“방법도 참.”
니노미야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혀를 찼다. 아이바는 가방에서 컵을 꺼내 미지근해진 차를 따라주었다. 투명한 아카시아 꽃송이 두 개가 함께 흘러왔다. 던전으로 가기 전, 근처 마을 시장에서 식량을 사다가, 이번 던전에 있는 우물은 그냥 먹을 수 없대요. 찻잎이라도 가져가자는 아이바의 성화에 못 이겨서 산 아카시아 꽃차였다. 아이바는 던전에서 틈만 나면 식수로 차를 홀짝였다. 복슬복슬 긴 꼬리가 공중에서 반원을 그렸다.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던전에 봄을 가져다주었다.
“차를 그렇게 좋아했어?”
“그, 좋아하는 꽃이라서. 궁금해서 사자고 했어요.”
“그럴 줄 알았어.”
“고대 어느 브리이드(Brighid) 족 마을에선 아카시아꽃이 「다시 만난 희망」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좋아하게 됐어요.”
호기심이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네요. 아이바는 찻물을 떠다니는 아카시아꽃을 후후 불었다.
“…나도 그래서 좋아해.”
니노미야는 찻잔을 내려놓고 벽에 등을 붙였다. 니노미야가 마시다 만 차 위에서 피어난 꽃들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니노미야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눈꺼풀을 내렸다. …잘못, 들은 건가? 아이바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면. 나는 너를 만나러 갈 거야….”
아이바는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으면 자주 노래를 불렀다. 아이바와 니노미야가 만나게 된 계기였고, 첫 번째 공통점이었으며, 이제는 함께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이바는 조금은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첫 소절을 불렀다.
“…달무지개가 내 머리 위를 비추고. 은하수가 너의 어깨를 스치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우리가 만난 날은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르지도 않았고, 달무지개도, 은하수도 뜨지 않았는데. 아이바는 노래를 부르다가 피식 웃었다. 왼쪽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니노미야 씨가 조용하네.
“…나는 바람이 만든 길을 달려. 별빛과 달무지개, 햇살을 손에 쥐고 하늘을 날아….”
“….”
“…니노미야 씨?”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니노미야의 뿔 끝이 아이바의 보조개를 꾹 찔렀다. 잠 못 잔다더니. 아이바는 볼을 문지르다가 니노미야를 이부자리에 눕혔다. 잘만 자잖아.
“…긴 여행의 끝에서 만날 네가. 이 시(詩)를 사랑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니노미야는 아이바 쪽으로 돌아눕고 등을 굽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이바는 담요를 펼쳐 니노미야에게 덮어주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그 날에서. 약속한 그날에서부터….”
“….”
“…언제나….”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동그란 이마가 예뻤다. 아이바는 홀린 듯이 그 위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래도 될까. 고민할 새도 없이 아이바의 입술은 잠든 니노미야의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잘 자요.”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태초의 인간들에게 숨을 불어준 네 여신님. 인간에게 운명을 부여한 시공의 여신님. 그가 꿈을 꾸는 동안은 슬퍼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면. 나는 너를 만나러 갈 거야….
― 카즈. 그 노래 좋아해?
그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에 보드랍고 화창한 말씨로 말을 걸곤 했다. 니노미야는 그의 목소리와 말씨를 좋아했다. 그의 니노미야를 향한 눈과 입꼬리가 따뜻한 미소로 물들었다. 니노미야는 대답으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니노미야의 머리 위에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 카즈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 네가 가르쳐줬으니까 좋아하는 거야.
둘이서 부르는 노래도. 애플버터를 넣어서 만드는 스튜도. 다시 찾은 희망이라고 부르는 꽃도.
네가 가르쳐주고, 네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전부. 그중에서도.
― 나는 네가 제일 좋아. 마사키.
그의 미소에 수줍음이 피었다. 자연스럽게 마주 잡은 손이 따뜻해서, 니노미야는 그와 손을 잡고, 같은 곳을 보고. 같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을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이번 생에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니노미야는 그가 나오는 꿈을 꿨다. 뿔이 자라기 전에는 잊혀진 꿈이었고, 뿔이 자라고 난 뒤에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되었다. 니노미야는 기쁨을 그의 미소에서, 슬픔을 그의 죽음에서, 분노를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세상에서, 즐거움을 그와 달리는 꽃밭의 추억에서 배웠다.
지하미로에서 따뜻한 손을 잡고 나온 날부터, 그가 니노미야의 기억을 두드리는 일은 잦아들었다.
“전부 미련이겠지?”
니노미야는 과거를 놓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하는 과거의 자신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여서, 기억을 곱씹고 되새기면 이번 삶의 슬픔이 전부 가시기도 했다. 기억에서 깨어나면 출구를 알 수 없는 차가운 벽과, 색이 바뀌지 않는 미로가 니노미야를 조롱했지만.
― 니노미야 씨. 그 노래 좋아하세요?
네가 나를 찾아줬으니까. 이제 슬프지 않아.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봄바람 같은 목소리와, 함박눈을 녹이는 햇살 같은 말씨에 이끌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를 향한 눈과 입꼬리에 여름의 녹음처럼 물드는 미소를. 가을 하늘처럼 맑고 높은 웃음소리를 좋아하게 됐다. 손을 잡아끌기도 하고, 말재주가 없고 어딘가 어설퍼서 꼭 안아주는 아이바를. 다시 태어난 그를.
“…네가, 전부 좋아하게 해줬잖아….”
아이바가 잠결에 니노미야의 옷자락을 쥐었다. 니노미야의 허벅지를 베고, 쌔근쌔근, 편안한 숨소리를 냈다.
― …카즈, 난 괜찮아. 울지 마.
그는 니노미야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상냥했다. 죽음 앞에서 상냥함은 잔인한 칼날이 되어서, 사라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다. 그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에, 보드랍고 화창한 말씨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니노미야는 괜히 눈을 벅벅 문질렀다. 눈물방울이 떨어지면, 아이바가 잠에서 깨어 그와 똑같은 목소리와 말씨로 걱정을 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왔잖아.
― 그래도 결말이 이렇게 됐잖아. 내가 틀린 거야.
눈물을 참으려 짓씹고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참고 참았는데, 그의 마지막 순간만 떠오르면 결국 눈물이 차오르고 만다. 니노미야는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고개를 들었다. 눈가를 촉촉이 적시고 내려오는 물줄기는 주인의 의지를 뒤늦게 알아듣고, 뺨에서 멈추어 섰다.
― 나는 카즈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
― 저는 니노미야 씨를 만나서 즐거워요.
똑같아. 전생이나 지금이나. 니노미야는 뺨에 묻은 물기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 카즈가 절망으로 태어났어도. 나에게는 희망이 되어주었으니까.
―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누구더라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니노미야는 담요를 가져오려다가 어깨에 둘렀던 망토를 아이바에게 덮어주었다. 붕 떠오르는 머리카락들이 민들레 홀씨에 난 솜털 같았다.
― 언젠가, 내가 다시 태어나면. 나를 꼭 찾아줘.
“…그런 약속은 무책임해. 마사키.”
― 너무 늦지 않게, 만나러 와줘.
“너 없는 세상에서 내가 계속 살아갈 거라고 믿다니. 바보.”
못 견뎠으니까, 나도 다시 태어났는데.
전생의 끝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전생의 아이바가 마지막 숨을 쉬고, 심장이 멈춘 후. 자신의 심장도 멎었으리라 믿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를 끌어안으며 자신을 절망으로 태어나게 한 신을, 끝내 절망으로 밀어버리는 세상을 저주했고, 이렇게 살게 할 거라면 한 번 더 행복해질 기회를 달라고. 햇빛이 비추지 않고, 달과 별이 뜨지 않는 하늘에, 매서운 바람에 두고 소리쳤다. 괘씸했겠지. 그러니까 이번 생에 또 이렇게 태어났네. 니노미야는 쓰게 웃으며 뿔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네가 이번 생에도 만나러 와줬지만.”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지, 아이바의 긴 꼬리가 가볍게 살랑거렸다.
"…이번에는 나를 선택하면 안 돼."
“….”
"너라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희망이 될 수 있을 거야. 나를 행복하게 해줬잖아."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어깨 위에 앉았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노래를 불렀다. 머리맡에서 사랑하는 이를 재우는 애정 어린 자장가처럼, 잔잔한 목소리였다.
햇살이 바람을 실어 하늘을 가로지르면, 나는 너를 다시 만나러 갈 거야.
달무지개가 내 머리 위를 비추고. 은하수가 너의 어깨를 스치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어.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와 램프의 불꽃을 흔들었다. 꽃향기가 났다. 여명이 오고 있었다. 아이바가 옷자락을 놓고 니노미야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나는 바람이 만든 길을 달려. 별빛과 달무지개, 햇살을 손에 쥐고 하늘을 날아.
"…그러니까 이번엔, 네 다정함을 기다리는 존재가 더 많은 이 세계를 선택해야 해."
악보가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만난 지 일 년쯤 되었던 땐가. 니노미야가 무심코 노래를 흥얼거리자 아이바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악보를 가져왔다. 아이바는 악보 밑에 그려진 글자를 가리켰다.
― 이 마지막 문장을 모르겠어서요. 무슨 말 같은데, 니노미야 씨는 아실까 하고요.
― 고대 마족 언어야. 지금은 마족들도 오래 산 사람만 기억해서 인간들의 기록으로도 별로 남았을 텐데. 가사를 기록한 언어도 꽤 옛말이고…. 인간과 마족이 척치고 살지 않던 때였나?
― 무슨 뜻이에요?
평소에도 곧잘 살랑살랑 거렸던 아이바의 꼬리는 그날따라 니노미야를 보채듯 더 빠르게 움직였었다.
― 사랑하는 누구에게, 대강 그런 말이야. 편지 끝에 쓰는 거.
― 암호 같네요….
― 읽어줄까?
― 아, 아뇨. 함부로 알면 안 될 것 같아요….
― 왜? 마족 언어라서 어둠의 봉인 같은 게 풀릴 것 같아?
아이바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수줍게 웃었다.
― 연서(戀書)잖아요.
아이바는 삼 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그 편지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누구에게 갔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거, 네가 쓰자고 한 거야.”
“….”
“…「마사키가, 사랑하는 카즈에게. 카즈가, 사랑하는 마사키에게」라니. 유치해.”
“….”
“유치하지만, 나는 좋아해.”
니노미야는 픽 웃고 노래를 이어 불렀다.
“…긴 여행의 끝에서 만날 네가. 이 시를 사랑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며….”
밑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바가 니노미야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망토가 구겨지며 난 소리였다.
“…니노미야 씨….”
아이바가 잠꼬대를 웅얼거렸다.
“…좋아해요….”
뺨이 발그레 물들고, 볼우물이 피어났다. 니노미야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그날에서.
약속한 그 날에서부터.
언제나.
“…응. 나도 좋아해.”
예전의 너도. 지금의 너도.
전부.
영원히.
*
그리운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그립다고밖에 표현하질 못하는 것들이 부쩍 늘어갔다. 시작은 아이바만이 기억하고, 불러왔던 노래였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바람 냄새. 첫눈의 모양. 처음 피는 꽃망울…. 이러다가 햇살까지 그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이바는 한참을 꾸물대다가 눈꺼풀을 쿡쿡 찔러대는 빛에 못 이겨 힘겹게 눈을 떴다.
아이바가 흐릿함과 선명함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시야로 가장 먼저 본 풍경은,
“일어났어?”
활짝 웃는 니노미야의 얼굴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이바는 눈과 머리를 재빠르게 굴려 천천히 상황을 파악했다. 던전의 새로운 하루를 알리는 빛나는 깃털 마물들이 주변을 살랑살랑 날아다니고, 벽에는 나팔꽃을 닮은 이끼가 피어 있다. 아, 내가 불침번을 하겠다고 해놓고선 잠들었구나. 아이바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에 잡힌 망토가 잔뜩 구겨졌다. 이거 니노미야 씨 건데.
“언제까지 누워 있을 건데?”
니노미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바의 뺨을 꾹 찔렀다. 아이바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주위를 한 번 더 꼼꼼히 살폈다. 니노미야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 뒤로는 어두운 천장이 빼꼼 삐져나왔다. 이 눈높이에, 머리에 대는 감촉이. 설마. 내가 지금 베고 있는 건, 니노미야 씨의….
아이바는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털이 잔뜩 부풀려져 빳빳하게 세운 꼬리와 양옆으로 파닥파닥 정신없이 움직이는 귀는 한동안 진정하지 못했다. 니노미야는 시뻘게진 아이바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가며 박장대소했다. 웃지 마세요! 아이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으로 기어가 쭈그러들었다. 니노미야는 눈꼬리에 맺힌 물기를 닦으며 끅끅거리다 딸꾹질까지 했다. 저 놀리는 거 재밌어요? 아이바는 양손과 귀를 동원해 얼굴의 열을 빠르게 식혔다.
"차 마실래?"
이쯤 되면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아니라 뻔뻔함을 타고난 데다가 철판이 상상도 못할 수준 이상이 아닐까? 아이바는 홍조가 남은 얼굴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니노미야가 건네준 차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아이바가 잠결에 맡았던 어딘가 그리운 향의 근원이었다. 아이바는 약초학 지식을 더듬었다. 굳이 비슷한 향을 꼽자면, 아침이슬이 맺힌 상쾌한 박하 향기를 떠올릴 만한 싱그러움이었다. 박하 같은 거 아냐. 니노미야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마셔봐.”
“…그렇게 말하면 재료가 좀 의심되는데요….”
니노미야는 던전을 오랫동안 탐사하다가 아이바가 잠깐 쉬는 사이, 거대한 마물을 사냥해와 잘 손질하면 먹을만하다며 고기를 바싹 익힌 적이 왕왕 있었다. (니노미야 왈, 자기는 레어와 미디움은 덜 익혀서 못 먹는다나) 생각보다 괜찮았긴 했다.
아이바는 마물의 위장에서 꺼낸 덜 소화된 풀 쪼가리만은 아니길 속으로 빌며 (그런 적은 없었지만) 한 모금을 넘겼다. 입 안에 풋풋한 향이 퍼졌다. 이어서 새콤달콤한 과일과 은은한 허브 향기가 어우러지고, 목 넘김은 부드럽고 깔끔했다. 찻물은 투명한 적갈색에 오렌지빛이 돌았다. 박하와 콘플라워, 라벤더에 레몬 필링이 블랜딩된 어린잎으로 만든 루이보스 티인가요? 아이바는 컵에서 입술을 뗄 줄 모르고 차를 정신없이 마셨다. 니노미야 씨, 언제 차 사신 거예요? 꼬리가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렸다. 반응이 즉각적이고 구체적이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컵에 차를 더 따라주었다.
“던전에서만 자라는 꽃을 따서 우린 거야. 가을에만 피는 꽃이거든. 마족 말로 뭐라고 하더라, 까먹었는데. 대충 「겨울을 기다리는 모닥불」이라는 뜻.”
“….”
“독 안 들었다.”
“그, 그게 아니라요!”
찻물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조그만 초승달이 떠올랐다. 아이바의 인영이 어른거리다가 찻물에 녹아들었다.
“…어딘가 좀 그립다고 해야 하나….”
감기 걸렸을 때 누가 만들어 준 건가? 아이바의 처진 귀가 가볍게 들썩거렸다가 차 한 모금이 몸에 스며들자 안정을 되찾았다.
“처음 마시는데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마음이 따뜻해져?”
니노미야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인데? 아이바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아지랑이 같은 김에 코끝을 가져다 대었다. 두 눈에서부터 기분 좋은 웃음이 향기처럼 번졌다.
“앞으로 이 차를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니노미야가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것 같았어. 네 취향이잖아. 제철 채소로 만드는 요리.
“오늘 아침은 뭐로 할까요?”
“뭐가 되었든 수프나 스튜는 이틀 내내 삼시 세끼로는 좀.”
“…죄송합니다….”
“사과 들으려고 한 말은 아냐.”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입에 푸르딩딩한 과일을 물려주었다. 당도가 떨어져 텁텁하고 밍밍한 데다가 퍼석퍼석해 절로 오만상이 지어졌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 보이니까. 나가면 바로 여관에서 푹 쉬자.”
“어, 벌써요?”
“지나가는 가고일이 준 정보대로라면. 바실리스크가 자기들도 골칫거리라서 인간들이 처리 좀 해달라고 빌더라.”
그건 끼니 때울 뭐라도 달라고 하니까 가고일이 준 거. 니노미야는 익숙하게 과일을 와그작 깨물었다. 맛없어도 네가 그렇게 강조해대는 영양가는 엄청나니까 먹어. 덜 익은 게 아니라요? 아이바가 울상을 지었다. 그거 수도에서 하나에 금화 삼천으로 처먹더라. 아이바는 군말 없이 과일을 깨작깨작 거렸다. 맛없어.
“지금부터 서두르면 두 시간 안에는 문제의 바실리스크가 길을 막는 구역이 나올 거래.”
니노미야가 던전 지도를 꺼내 가고일이 알려준 지름길을 표시했다. 이쪽 길이 마물이 적으니까, 해가 질 때쯤엔 바깥 공기 마실 수 있다더라. 아이바는 짐을 재정비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니노미야는 던전 지도를 돌돌 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처음 길 가르쳐 준 고블린 만나기만 해 봐. 하루 걸리는 던전을, 뭐? 왕복 이틀? 아이바는 등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모른 체 하며 평화롭게 세 시간 동안 나눌 만한 대화 주제를 생각했다.
“참, 곧 있으면 이승과 저승 사이 문이 열리는 날이래요.”
아이바와 니노미야가 처음 만난 날이기도 했다.
죽은 이를 잊지 못하는 산 자들이 저승문이 열리는 던전에 발을 들이고, 미련이 남은 죽은 자들은 이승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그리운 이를 만나러 갔다.
어젯밤 이야기가 너무 신경 쓰인 나머지, 주제넘게 오지랖을 떨었다. 아이바를 닮았다던, 니노미야에게 정말로 소중했던 친구. 니노미야 씨에게 좋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안 닮은 것 같은데. 아이바는 밤새 니노미야가 이따금씩 짓는 애틋한 표정의 이유를 짐작하다, 니노미야가 그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문이 열리는 날. 그가 환생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이 열리면 니노미야를 찾아서 이승으로 올라온 적이 있지 않을까.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고 싶으니까.”
아이바는 마음의 소리를 속삭인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았다. 니노미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 지도가 어디 있지? 아이바는 괜히 부산을 떨며 대륙 지도를 찾았다.
“문이 열리는 제일 가까운 던전이…. 남동부 늪지대에 있던가. 찾아볼게요.”
“괜찮아.”
니노미야의 눈에 어린 투명한 빛방울들이 가볍게 너울거렸다.
“만났으니까.”
“…네?”
“그 애를 말하는 거라면 좀 됐어.”
니노미야는 싱긋 웃었다.
“…뭐라고, 했어요?”
니노미야가 사르르 눈을 감았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하더라.”
니노미야의 손이 컵을 부드럽게 감쌌다. 팔을 벌리고, 마주 대어 뛰는 심장 박동에 다정한 마음을 실어 나누어주는, 포옹과 비슷해 보였다.
“그게 싫으면 울고 싶을 때, 꼭 자기를 불러 달래.”
“….”
“…내가 너를 울렸다면 꼴도 보기 싫겠고 나도 면목 없지만, 그래도 기대주면 좋을 것 같아서래.”
“….”
“죽은 사람한테 기대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데, 그치?”
“….”
“잘 알면서 그 애 죽은 자리를 찾겠다는 나도 참 미련해.”
니노미야는 살며시 눈을 뜨고 던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샛별이 가라앉아 아침으로 넘어가야 할 시간. 새벽녘의 안개에 빛이 가리어졌다.
“…카즈.”
컵을 입가로 가져다 대던 니노미야의 눈에 빛이 반짝였다. 유성이 순식간에 밤하늘을 스치듯, 아주 잠깐. 니노미야는 천천히 아이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해. 아이바는 컵을 꽉 쥐었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 건 니노미야 씨인데.
“…라고, 불렀…어요?”
내가 왜, 뭐라고 눈물이 나올 것 같지.
니노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즈라고 불러줬지.”
“…그랬, 구나. 그럴 것 같았어요. 친구니까.”
“카즈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래도 돼.”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뺨에 손을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부드럽고, 포근하고 산뜻한 서늘한. 소나기를 실은 초여름 바람 같은, 니노미야의 체온. 아이바의 뺨에 제 온도를 전하던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머리 위에 폭 올라왔다.
“던전 나가면 뭐부터 할래?”
그런 생각을 하면 발이 좀 빨라지겠지? 니노미야가 양 쪽 입꼬리를 올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다정함이 흘렀다.
“…따뜻한 밥이 먹고 싶어요.”
내가 한 거 말고. 남이 해주는 밥이 최고로 맛있더라고요.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따라 웃었다.
“저녁, 같이 먹어요.”
“언제나 같이 먹었잖아?”
“그랬네요….”
“뭐 먹으러 갈까?”
던전 밖에서는 저녁 메뉴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바가 손에 쥔 컵에서 찻물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니노미야 씨가 좋아하는 식당으로 가요.”
“다진 고기 뭉친 거 구워주는 그 집?”
“네, 거기요!”
“나는 좋은데. 너는 좋아하려나?”
“좋아해요. 분명 이 차와 잘 어울릴 거예요.”
니노미야는 웃음을 터트리고 아이바의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그래, 그러자.
아이바는 이 순간만큼은 앞으로 닥칠 종말 따위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늘 그랬듯. 지금 당장의 행복을 생각하기로 했다.
* Samhain
‘서우인’ 또는 ‘삼하인’.
드루이드의 종교 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고대 켈트 족의 축제. 한 해의 끝과 시작. 여름의 끝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날. 밤이 낮보다 길어지는 날이다.
이승과 저승간의 문이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신과 요정, 죽은 자와 산 자가 자유롭게 서로의 세계를 오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할로윈의 기원이 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