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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か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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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금 하나 가지 않은 제 방의 천장이었다. 바깥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의 인기척이 있고 심지어 간간히 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마저 나서, 무심코 연 커튼 밖에는 푸른 하늘과 눈으로 뒤덮인 거리가 있었다. 당연히 '그것'의 소리는 온데간데 없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대부분이 두툼한 패딩점퍼에 목도리를 두른 차림이었다. 도로는 한적했고 삑 삑 울려대는 호루라기나 확성기의 소리도, 누군가의 시선을 돌리려 켜놓은 사이렌의 굉음도 없었다. 그저 조금 이르게 눈이 내린, 기상이변이 걱정되기 시작할 쯤의 11월의 풍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왜? 가장 처음 떠오른 질문은 그것이었다. 끝났다는 기쁨이나 놀람보다 당혹스러움이 먼저 머리를 채웠다. 어떤 막대한 위험을 물리친 슈퍼히어로들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안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남은 삶을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이바는 어제도 그나마 부서지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워서 다시 모포를 덮고 혹시라도 들춰진 틈으로 들키는 일이 없도록 천막을 꽁꽁 고정시켰다. 그런 다음에는 똑같이 모포를 깔고 누워 모포를 덮은 니노미야에게 잘 자라는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 그게 끝이었다.

 

뒤에 숨겨진 음모를 파헤치다 흑막을 찾아낸다든가 '그것'들의 숙주를 찾아 물리친다든가 그런 일은 구경꾼의 위치에서도 본 적이 없었고 애초에 일어날 거라는 기대조차도 한 적이 없었다. 이대로 버티다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지고 다시 이전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잠깐이나마 가져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안이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아이바는 마치 아주 긴 꿈을 꾸고 일어난 사람처럼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가 휴대폰을 켜고 떠오르는 가장 첫번째 번호를 눌렀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별안간 끊기더니 부스럭거리는 이불의 소음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상한 인사에는 아직 덜 깬 잠기운이 섞여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에 비하면 한없이 평화롭고 따스하며 갈라지지도 마르지도 않은 아주 일상적인 소리였는데 아이바는 그 잠열이 남은 목소리를 듣다가 무언가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종료버튼을 눌렀다. 미안. 잘못 눌렸나봐. 수습이랍시고 핸드폰을 꾹꾹 눌러 메세지를 남겼다.

 

그리고 아이바는 그로부터 5분 후, 방으로 달려들어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니노미야를 보게된다. 집에서 입던 옷에 얇지만 푹신한 외투를 걸치고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로. 새로 맞은 2019년 11월 4일의 아침이었다.

 

아이바는 병 속에 든 물을 컵에 천천히 따랐다. 쏟아진 물줄기는 컵의 벽을 휘돌고 아래에 고여 물결을 만들었다. 아이바가 병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을 때 그 물결은 이미 잠잠해진 후였다. 파동조차 일지 않는 잠잠한 수면을 아이바는 그저 내려다보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컵을 내려놓자 직직 끄는 걸음이 침실을 향했다.

 

아이바는 휴대폰을 들고 뚝 뚝 그리 길지 않은 메세지를 보냈다. 발신인은 아이바 마사키이며 수신인은 니노미야 카즈나리다. 아이바는 배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은 채로 휴대폰이 바닥을 보도록 두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고 깜빡이는 불빛이 주름진 이불 위를 밝히자 아이바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뭐해? 두 글자로 보내어진 물음에는 두 글자의 답변이 돌아왔다. 게임. 그러고보면 이번 주말에는 밤샘 게임으로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던 것도 같았다. 그런거라면 조금 답장이 느렸던 것도 이해가 된다. 아이바는 게임. 두글자가 적힌 화면을 한참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내렸다. 처음 샀을 때보다 조금 부피가 죽은 솜베개가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받쳤다.

 

*

 

"그럼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니노미야는 말했다. 젓가락이 빨간 방울토마토를 한번에 집지 못하고 몇번 헛돌다가 가운데를 쿡 찔러 꿰뚫었다. 얇은 막이 찢어지고 새콤한 즙이 빨간 표면 위를 흘러내렸다. 니노미야는 그것을 입 안에 쏙 넣고 젓가락만을 빼낸 다음 입 안에 든 동그란 과육을 이로 톡 터뜨렸다.

 

"글쎄"

 

아이바는 말 끝을 흐렸다.

 

"일본인의 저력, 같은 말은 좀 이상하고···."

 

*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악몽도 없이 맞이한 햇빛이 눈을 밝혀서 아이바는 이마를 찡그리며 자리에서 뒤척이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열한시에서 열두시로 넘어가기 직전인, 아침이라기엔 늦고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아이바는 들러붙은 눈꺼풀을 문지르며 멍하게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막 일어났을 때는 몰랐는데 달달한 계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부모님께서는 오늘도 아침일찍부터 가게 준비를 하러 나가셨을테니 지금 계실 리는 없고 아마 아침에 미리 해두고 가신 계란찜이나 계란말이의 잔향이 거실을 감돌다 새어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이바는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잠이 들 뻔 하고는 몸을 바로 앉히며 기지개를 쭉 켰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오래 잔 모양이었다.

 

문고리를 잡은 후에야 밖에 인기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바는 고개를 돌렸지만 이제는 그저 학용품이나 책이 몇개 늘어져 있을 뿐인 방에는 손이 닿는 곳에 야구배트도 필통도, 책가방도 놓여있지 않아서 아이바는 옆에 있던 물병이라도 집어든 채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벌컥 잡아 당겼다.

 

"너 뭐 하냐."

 

쏟아지는 것은 끈적거리는 체액이나 귀청을 뜯어놓을 것 같은 괴성이 아니라 어이없어하는 니노미야의 목소리였다. 입을 비뚜름하게 하고 아이바를 이상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이바는 얼른 물병을 뒤로 숨기며 어 그게, 하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아서 아이바가 적당한 변명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니노미야는 애진작에 방 안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아이바를 돌아보고 있었다.

 

"엄마가 가져다주래. 너 아직 밥 안먹었을거라고."

 

그제서야 쟁반에 담긴 음식이 보였다. 아직도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계란말이가 크기마저 일정하게 나뉘어서는 하얀 접시 위에 정갈하게 담겨있었다. 아이바는 어색하게 물병을 내려놓으며 뒤늦은데다가 어설프기까지 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도둑인 줄 알고···.

 

"무슨 바보같은 소리야."

 

허술하게 내려앉은 변명을 니노미야는 단 한마디로 일축해버리고는 쟁반의 건너편에 걸터앉으며, 쟁반을 드느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게임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게임기의 시작버튼을 누르고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여전히 문 앞에 서있을 뿐인 아이바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안앉아?"

 

그제서야 아이바는 어정쩡하게 침대 위에 몸을 앉힌다. 방의 주인은 아이바임이 분명한 데도 어딘가 뒤바뀐 듯한 모양새다. 하지만 아이바는 그런 사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그저 니노미야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숟가락을 들다가 그대로 니노미야를 바라보았다.

 

"왜."

 

닿는 시선을 의식한 건지 니노미야가 게임기를 내리며 아이바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잘자. 인사를 하던 일주일 전처럼.

 

"아니 그냥."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하는 말 끝에는 조금 웃음이 섞였다.

 

"무슨 개소리야. 일주일 전에도 봤잖아."

 

니노미야는 늘 그렇듯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다시 게임기를 들었다.

 

"보고싶었다고 하려는 거면 번지수 틀렸어."

 

그리고는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제 사귄다고 닭살돋는 말 해도 안받아줄거니까. 웅얼거리는 말소리에는 투덜거림이 섞여있었다. 아이바는 이제 다른 의미로 니노미야를 바라보다가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빨개진 귓볼을 발견한다.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끌려올라갔다.

 

아이바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니노미야의 입가에 가져갔다.

 

"뭐야 안먹어."

 

아무것도 켜져 있지 않은 게임기의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니노미야가 고개를 틀었다.

 

"먹자. 맛있잖아."

 

"아침 안먹는데."

 

부루퉁한 목소리에도 아이바는 굴하지 않고 니노미야는 다시 한 번 느슨해진 거절을 냈지만.

 

"그래도 먹어. 날 봐서."

 

그 말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바보같아. 하고 못이기는 척 입을 벌렸다. 노랗고 네모난 계란말이가 입술 사이로 쏙 들어갔다. 우물거리는 입 안에는 푹신한 감촉이 있었다. 니노미야는 설탕이 들어가 달달한 계란말이를 흥미없이 몇번 씹고는 그대로 넘겼다.

 

그제서야 아이바는 젓가락을 내리고는 두 손을 모아 잘먹겠습니다. 하는 활기찬 인사를 냈다. 어디에서 찾았는지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쌀밥이 그릇이 가득 담겨있었다. 솟아오르는 김에 달달한 밥알의 냄새가 섞여있었다. 따스한 향이다. 평온의 냄새가 나는.

 

아이바는 숟가락을 들어올려 밥을 한 술 뜨려다 문득 멈추고 다시 니노미야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니노미야가 고개를 든다.

 

"아 맞다. 니노 있잖아."

 

*

 

"그런 느낌 아니야?"

 

아직 안끝났나. 한참의 침묵 후,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는 이야기에 니노미야는 겨우겨우 일본인의 저력이 어쩌고 하며 끝을 맺은 문장을 떠올리고는 죄없는 방울 토마토를 데굴데굴 굴렸다. 이번엔 분명히 먹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녀왔어おかえり'하는."

 

니노미야는 그것이 무슨 질문에 대한 답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질문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았다.

 

"갑자기 웬 '다녀왔어おかえり'?"

 

"그냥. 그런 느낌인 것 같아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아이바상"

 

*

 

"다녀왔어."

 

이번에는 정말 게임을 시작하려던 니노미야가 손에 든 게임기를 내리고 아이바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게임기는 시작하기 직전에 멈추어 있고 니노미야는 마치 아이바를 꿰뚫어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저 아이바를 바라보고 있다가 게임기의 '이어하기' 버튼을 누르며 고개를 내렸다.

 

"어서 와."

"저기 니노. 밥이란 뭐라고 생각해?"

 

아이바는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밥이란 뭐라고 생각하느냐니. 점심시간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식사론을 펼치는 건 다소 뜬금없다. 심지어 아이바가 먹고있는 건 밥도 아니고 점심 종이 치자마자 달려나가 사온 매점의 명물, 야키소바빵이다. 푹신한 빵 사이에서 소스와 함께 볶은 면발 특유의 짭짤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니노미야는 젓가락으로 밥을 한 술 크게 뜨며 되물었다.

 

"갑자기 웬 밥?"

 

니노미야가 밥을 입에 밀어넣자 젓가락 위로 솜사탕처럼 크고 하얗게 뭉쳐있던 밥이 스르르 녹아들듯 입 안으로 단번에 사라졌다. 이때 니노미야는 대답을 구하듯 아이바를 바라보았는데 아이바는 갑자기 웬- 하고 튀어나온 질문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로 반쯤 베어문 야키소바빵을 진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니노미야도 입을 오물거리며 네모낳게 각진 제 도시락을 내려다본다.

 

계란말이에 몇가지 볶음을 반찬으로 넣고, 빨간 방울토마토와 이름 모를 푸른 잎들로 구색을 맞춘 도시락은 부모님께서 두분 모두 요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것들과는 달리 평범하고 소박했지만, 다만 물조절이 딱 맞게 된 밥알이 입 안에서 알알히 퍼지고 이 사이로 뭉개지며 꼭 알맞게 달콤한 맛을 냈다.

 

아밀레이스. 어제 수업시간에 들었던 효소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밀레이스는 소화 효소 중에 하나로 침샘과 이자액을 통해 분비되며 녹말을 말토스와 덱스트린으로 분해시키고···. 니노미야는 젓가락을 든 손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글쎄.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생명유지수단?"

 

니노미야가 흥미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

 

아이바는 덮고 있던 겨울용의 두터운 이불을 걷어내며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이마를 가득 적신 식은땀때문에 어깨에 걸쳐질 만큼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뺨이며 목에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었다.

 

부서져 내린 건물 잔해에 짓눌려 폐가 졸리고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 하던 감각은 급히 몰아쉰 숨에 썰물이 밀려가듯 발끝으로 씻겨내려가고, 찢기고 흥건하고 얼룩진 데 없이 평범하고 익숙한 방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비명소리도 무언가의 으스러짐도 없는 고요한 새벽녘이었다. 해가 반쯤 떠오른 시간에는 으레 그렇듯 특유의 채도 높은 푸른빛이 창 밖에서 새어들어와 방 안의 모든 벽지와 바닥과 가구를 같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이바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필사적으로 갈구하던 공기를 폐 속에서 죄다 끄집어 뱉어냈다. 그제서야 곁에서 색색 고르게 숨을 쉬는 소리가 신경을 끌고, 새로이 폐를 채우는 숨에 익숙한 체향이 쏟아져 들어왔다. 저녁이 오기 전에 했을 샤워의 따끈한 물냄새와 비누냄새가 은은하게 뒤섞여 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향이었다. 햇볕에 잘 말린 보송보송한 수건이나 새로 꺼낸 이불같은 이미지가 노란 후드티로 덮힌 따뜻하고 말랑한 품의 감촉과 함께 떠오르는.

 

반틈의 이불 아래로는 엎드려 누운 등판이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상하운동을 하고 있었다. 물을 흥건히 탄 물감처럼 색이 옅은 눈동자와는 다르게 이불 밖으로 흩어진 머리카락은 새까만 색이었고 그의 체구만큼이나 작고 동글동글한 손의 끄트머리가 잠들기 전까지 가지고 놀았을 게임기나 휴대폰 따위와 함께 삐죽 나와있었다.

 

니노미야다. 걷힌 이불 사이로 찬 바람이 드는지 니노미야는 몸을 둥그렇게 말고 뒤척이며 으음 하고 잠기운을 앓았다. 아이바는 더운 공기가 더이상 빠져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고, 손을 뻗어 베개 옆에 놓인 휴대폰을 쥐었다.

 

아이바가 휴대폰 옆면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환한 빛이 어둠을 뚫고 곧장 눈으로 쏟아졌다. 간신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이기지 못해 밝기를 낮추면 비로소 갈색의 코트와 좋아하는 선수의 빨간 유니폼 위로 하얗고 반듯한 필체로 적힌 여덟자리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날짜는 2 0 1 9 네개의 숫자로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당연한 사실을 몇번이고 확인한 후에야 안도가 몸을 녹여서 아이바는 눈에 띄게 뭉그러진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부볐다.

 

그러니까 모두 꿈이었던 것이다. 죄다 망가지고 무너져 폐허가 된 도시도,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공포감도, 모두 그저 아직 벗어나지 못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뇌파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인 눈꺼풀이 다시 그 무게를 늘렸다.

 

아이바가 핸드폰을 저만치 밀어놓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기댔다. 아이바가 몸을 뉘이자 단단한 프레임 위에 놓인 매트리스가 하얀 시트와 함께 아이바를 포근히 끌어안았다. 일어났을 때 등이 배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푹신함이 정말 모든 게 끝났다는 사실을 일러주인 어떤 사인처럼 느껴졌다.

 

몸을 눕힌 후에도 평범했을 하루의 세부사항-니노미야가 언제 집에 놀러왔는지 어쩌다 자고 가게 되었는지 같은 그런 세세한 사실들은 희무룩하게 뭉개져 어느 것도 제대로 떠올릴 수는 없었는데 푹신한 침대 덕분인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잠은 쏟아지고 눈은 감겼다.

 

어쩌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지도 몰랐다. 그저 아직 잠이 덜 깬 해마가 일을 시작할 타이밍을 놓쳤거나 그간의 일들을 정리하기에 바빠서 부팅이 좀 느려지는 것 뿐이겠지. 까맣게 잠긴 시야처럼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아이바는 새어나가는 숨처럼 생각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정말로 다 끝난 걸까. 생각의 끄트머리를 엷은 불안이 물었다 놓고 사라졌다. 그리고 마치 그 의심이 합당한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현듯 쿵 하는 소리가 쏟아지던 잠을 치워냈다.

 

쿵. 아이바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소리는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바닥을 두드린 소리는 인기척이라기엔 지나치게 묵직하고 이상하리만치 거대했는데 때문에 플라스틱이나 금속, 떠올릴 수 있는 가전제품이나 자질구레한 소품의 그 어느것과도 달랐으며 구름과 땅, 혹은 지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모든 자연발생적인 현상들의 그것과도 달랐다.

 

무엇이라고 딱 짚어 설명할 수는 없으나 굳이 빗대자면 'EAT ME'라고 적힌 케이크를 먹었던 어떤 소녀가 벽과 벽 사이에 몸이 가득 낀 채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치는 메르헨적인 광경이 떠오를 법한. 허무맹랑하다 할 수 있겠으나 아이바는 그 상상이 불러오는 다른 이미지에 입을 다물고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이불도 바스락거림없이 숨을 죽여서 아이바는 조심스럽게 바닥을 디디고 섰다. 바닥은 러그조차 깔려있지 않고 그저 나무를 짜맞춰 만든 모양으로 밟을 때마다 삐걱이거나 최소한 발걸음이 그 빈 공간을 울리곤 했는데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 발로 아이바는 그 바닥을 소리없이 누르며 벽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숙련된 티가 나는 익숙하고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아이바는 벽에 도착하자마자 가슴과 배를 빈틈없이 바짝 붙이고 서서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부러 옮긴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걸려 옮겨진 것인지 가구들이 밀려나며 그 다리가 바닥을 긁고 스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처음에는 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잘 들어보니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쿵 쿵 하는 소리 사이에 스윽 하고 무언가 바닥을 끄는 것 같은 소리도 섞여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두꺼운 밧줄을 질질 끌며 움직이거나.

 

혹은 아주 긴 꼬리를 바닥에 늘어뜨린 채 걸어가는 것처럼.

 

아이바는 숨을 삼키고 구석에 세워두었던 야구배트를 집어들었다. 마치 꼭 이렇게 쓰기 위해 놓여있는 것만 같은 야구배트는 사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으로 잡기에는 필요이상으로 미끄러웠으나 지금 고를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이제 이곳엔 어떠한 무기도 없을 것이고 없어야만 했으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그저 자신이 과민반응하는 것일 뿐 잠이 오지 않았던 이웃이 이웃간의 예의를 잠시 잊고 이른 새벽에 망치질을 하거나 밖에서 무언가를 떨어뜨리며 난 소리가 공기를 울려 다소 크게 들렸던 때문으로 그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어야하고 아이바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젖어들어가는 손을 문지르며 아이바는 배트를 고쳐잡았다. 상황을 정당화시킬 때마다 되려 치미는 불길함이 머리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다. 바이러스처럼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 말단을 저릿하게 만드는 공포감을 아이바는 머리를 흔들고 문을 노려보는 것으로 애써 떨쳐내며 조금씩 발 뒷축을 밀어 문으로 다가갔다. 그 인기척을 눈치챈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있었던건지 소리는 점점 아이바의 방을 향해 가까워져 오고있었다. 아이바는 들키지 않도록 문고리에 팔꿈치를 대고 가만히 서서 소리가 코 앞까지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소리는 그 때 멈추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한 적막이 아이바와 문 사이를 감돌았다. 심장소리가 불쾌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아이바는 문 밖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잘못 들었나. 안이함을 바라는 뇌가 급기야 상황을 정당화시키기에 이르렀으나 절대 바라는 것처럼 일이 풀리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아이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망설여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괜히 망설이며 끈 시간이 어떤 식의 후회를 가져오는지 아이바는 수도 없이 봐왔고 그 중에 9할은 언제나 배드엔딩이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아니, 아니어야 하지만. 배트의 가장 오목한 부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 단단하지는 못한 알루미늄제의 표면이 달빛에 번쩍하고 빛을 냈다. 만약, 만약 맞다면. 사실 이런 가느다란 배트로는.

 

아이바는 발 하나를 문 바로 옆에 두고 단숨에 팔꿈치를 내리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도록 가로막고 있던 작은 쇳덩이가 그 모양에 꼭 맞게 만들어진 네모난 구멍을 빠져나가며 아이바와 거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을 벌리자마자, 아이바는 문고리 사이에 팔꿈치를 걸어 잡아당기며 벌어진 문틈 사이에 발을 끼워 문을 활짝 열고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배트가 동그란 궤적을 그리며 가른 것은 무언가의 거대한 팔이나 꼬리도,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뭉쳐 만들어진 더미도, 하다못해 몰래 집 안을 침입한 괴한도 아니었다. 그저 허공. 허공이다. 눈 앞에 놓인 거실은 어떤 괴이한 생물도 그곳에서 숨을 쉬고 살을 문질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그 자신의 몸을 반은 어둠에 반은 푸른빛에 담근 채 태연하게 아이바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트가 허무하게 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문을 열기 직전까지 아이바가 몇번이나 머릿속에 그려보던 모습과 닮아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면 다르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언제 움직인 적 있었냐는 듯 반듯하게 놓인 소파와 카펫, 완벽하게 주름진 커튼과 잘 잠긴 현관-심지어 현관에 놓인 신발마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려하면 가장자리부터 안개처럼 풀어져가는 모습이 그래야함을 알면서도 기시적이어서 등에 송골송골 맺힌 불안과 일종의 미련이 아이바로 하여금 배트를 놓을 수 없게 했다. 무언가 있는데. 무언가 분명히.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갗에 미끄러져내린 수분을 증발시키며 체온을 빼앗아갔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 바람?

 

아이바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바람은 아이바의 뺨을 스치고 머리카락을 몇가닥 흔들다 거실로 빠져나갔다. 아이바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까지만해도 굳게 닫혀있었던 창 밖은 이제 새벽의 푸름이 아니라 기분 나쁜 까만색의 일색이 장악하고 있었다. 열린 창틀을 가득 채운 건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생물이다. 모든 것을 녹이거나 태우고 남은 찌꺼기처럼 까맣고 끈적거리는. 마치 음식물 쓰레기 더미나 보도블럭 사이에 낀 젖은 찌꺼기처럼 존재 자체를 보는 것 만으로도 불쾌감이 치밀어 오르는 몸체를 꿀렁이며 아이바의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단단하고 두툼한 발이 푹신한 매트리스를 짓이기고 덕분에 니노미야는 눈을 뜬다.

 

이 때 아이바는 움직일 수 없어진 채다. 한 발자국도 심지어는 새끼 손가락 하나도 까딱 움직일 수 없어진 채로 그것을 보고 그것은 큼지막한 아가리를 쩌억 벌려 니노미야를.

 

아이바는 덮고 있던 겨울용의 두터운 이불을 걷어내며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온몸을 가득 적신 식은땀때문에 옷이며 머리카락 따위가 축축하게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곧장 돌아본 곁에 니노미야는 없고 아이바는 물감을 마구 뒤섞어놓은 것처럼 흐리고 엉킨 정신에도 그 편이 합당함을 깨닫는다.

 

이번에야말로 현실이었다. 꿈 속에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사실은 몸을 뉘인지 채 사십분이 지나지 않아 시계는 길고 짧은 팔을 1과 12에 맞추고 있었다. 물론 짧은 쪽이 1이고 긴 쪽이 12이다. 아이바는 하반신을 덮은 이불을 완전히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딛었다.

 

문을 열면 보이는 건 까맣게 저문 거실이다. 조금 비틀어져 놓인 현관의 신발도 반쯤 운 거실의 커튼도 모두 시야를 그득그득 채우고 남는 삼백만화소의 선명함으로 놓여있었다. 아이바는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굳게 닫혀 잠금장치까지 걸린 창문을 보고 걸음을 돌렸다. 터벅터벅 내딛는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진짜 나무를 짜맞춰 만든 것이 아니라 매끈한 일반 가정용의 바닥재가 깔린 바닥은 걸음 소리도 그렇게 크게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이 마치 꿈에서 들었던 그 묵직한 소리를 닮아있는 것만 같아 아이바는 고개를 숙이고 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3개월 전에는 한 번 포기하려고 하기도 했던 모습이 시야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기대조차 한 적 없는 아주 멀끔한 형태로. 아이바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고 부서지고 깨져있던 11개월 전의 기억을 되짚어 찬장에서 컵을 꺼냈다. 11개월 전.

 

그 날 아이바는 방학이었고 방학을 맞은 학생답게 조금 느즈막하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있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도 놓친 운동 경기 중계도 없어서 채널을 돌리다 돌리다 누른 것이 뉴스 채널이었는데 복잡한 정치 현안과 아이바는 잘 모르는 유명한 누군가의 탈세 의혹이 시시콜콜하게 흘러나오는 중에 아이바는 밥에 간장을 더 뿌리는게 맞았는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자막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자료화면과 함께 흘러나오던 앵커의 목소리에 알 수 없이 다급한 지시가 섞여 들려오더니 카메라가 앵커들을 잡기 시작했다. 그 때 이미 아이바는 흘러간 단어의 대부분을 읽고 반복해 흘러가는 글자들을 다시 처음부터 읽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던 나머지 아이바는 요즘 유행하는 깜짝 놀래키기 방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국민적인 규모로 진행을 하는.

 

하지만 당연히 그럴 리는 없었고 앵커들은 방금 들어온 속보라며 채 정리가 되지도 않은 서류 뭉치들을 들고 가능한 한 침착한 투로 대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 상공 50m 부근에서 / 돌연변이를 일으켜 / 사망자 수는 / 사상자 수는 / 정부는 / 시민들은

 

"지금 당장 인근 대피소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바는 얼빠진 얼굴로 TV화면을 바라보다 앵커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와 화면에 나열되는 지역별 대피소의 이름을 보고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신히 휴대폰을 낚아채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펼쳐진 풍경은, 그 이름을 담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말로.

 

푸르러야 할 하늘이 있을리가 없는 색들의 폭발흔으로 뒤덮이고 구름인지 불꽃인지 모를 것들이 하늘을 떠다녔다. 떨어지는 잔해를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었고 바스라진 잿더미가 봄철 꽃가루처럼 바람을 타고 부유하고 있었다. 거리에 멈춰 선 사람들은 대부분 아연실색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그 중 몇몇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했고 또 몇몇은 아예 폭발이 일어난 지점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아이바는 더듬거리며 걸음을 옮기더니 도로를 따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바가 향한 곳은 니노미야네 집이었다. 부모님께서 두 분 다 일이 바쁘신 바람에 집을 비우실 때가 많은 그 곳에서 니노미야는 늦게까지 잠을 자느라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았고 그러니까. 아직 모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게 마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처러 느껴졌다.

 

아이바는 저와는 반대방향으로 몰려드는 시민의 무리를 어떻게든 해치고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에 멈춰선 자동차들 때문에 촌각을 다투는 경찰차와 앰뷸런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이렌이 울리고 교통 경찰들과 교통 경찰이 아님에도 어떻게든 시민들을 부상 없이 질서있게 이동시키려 나선 경찰들이 쉴 새 없이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불만 혹은 분노를 머금은 시민들의 고함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혼란이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니노미야가 항상 열쇠를 놓아두던 현관 앞 화분을 들추고 그 아래에서 열쇠를 집어들었다. 어떻게든 문에 열쇠를 끼워넣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이바가 느꼈던 것은 기이한 고요함이었다. 바깥의 소리를 딱 잘라놓은 것 같은, 폭풍 전야와 같은 고요함. 그게 꼭 비극의 전조처럼 느껴져서, 한달음에 올라간 계단 위에서 아이바는 '그것'을 처음 보았다.

 

그때 아이바가 집어다 던진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책가방이었는지 아니면 그것도 야구 배트였는지 아니면 가위나 자 따위가 든 필통이었는지. 그게 무엇이었든 효과는 있었고 아이바는 그것이 머리를 흔드는 사이 니노미야에게 달려들어 손을 움켜쥐고 그대로 바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종말이라 생각했던 11개월은 그렇게 시작했다.

 

오늘 꾼 꿈은 그 11개월 간의 기억을 조잡하게 자르고 끼워 맞춰 붙인 꼴라주에 가까웠다. 손에 든 무기는 여기서 가져오고 '그것'의 형태는 여기서 가져오고, 시간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니 아무 기억에서나 대충 하나를 골라다 끄집어 오고 장소도, 상황도, 언젠가 보았던 어느 장면의 한 컷을 잘라다가 이어붙인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악몽은 허무맹랑이라는게 무엇이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잃어버리고 만 아이바에게만큼은 언제나 가장 현실적인 악몽이 되어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노랑 주황 불빛이 쏟아지는 선반 위에서 물병 하나를 꺼냈다. 시리게 찬 감각이 어색해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차가운 표면을 쥐었다가 아이바는 뚜껑을 열고 남은 물을 전부 컵 속으로 따라냈다. 물이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투명한 컵 벽을 타고 휘돌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래서 어느 기억이었을까. 아이바는 생각했다. 이번 악몽은 몇번째 기억에서 가져온 것일까 하고. 아이바는 그런 풍경을 제법 많이 보았다. 니노미야를 덮치는 '그것'의 모습을. 익숙해졌다 하면 허풍이겠으나 한 눈에 어느 날의 기억인지 떠올릴 정도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쩌면 단순하게도 첫날의 기억인지 몰랐다. 아니면 삼개월 차의 그 기억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사개월 차의 중반을 넘겼을 때의 기억일지도 모르며, 육개월 차이거나 혹은 팔개월 차의, 아이바는 두통이 이는 것 같아 생각하기를 멈추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노랑 주황 불빛이 쏟아지는 선반에 싸한 냉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 차게 식은 감각이 익숙치 않아 아이바는 손바닥이 아릴 때까지 차게 식은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있다가 맺힌 이슬이 바닥으로 뚝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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