苺一会
리츠

얼굴 괜찮아 보여서 어울려줬더니 뒷통수 제대로 갈긴 전 애인 때문에 바로 휴학계를 내버렸다. 계획 없이 생겨버린 긴 공백에 뭐 하지 고민하다가 대뜸 비행기표를 끊어버렸다. 그것도 멀리 유럽에 처음 들어보는 도시로. 마츠모토는 수업 시간 내내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연락했다가 의외의 소식에 눈이 더 커졌다.
"ㅁ..뭐라고? 잠깐 나 지금 정리가 안되는데"
"말 그대로야. 어제 휴학 신청했고 좀 전에 비행기표 끊었어."
"그것도 갑자기 스페인으로? 왜? 가서 뭐하게, 너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하잖아."
"그냥, 멘탈 회복이 필요해서- 정 심심하면 돌아다니려나..."
"헤어지니 허망하지? 그러게 걔는 아니라니까….”
“조용히 해. 안 그래도 후폭풍 때문에 짜증나니까. 여기저기서 말 나오는 것도 싫고.”
“하긴 그 새끼 벌써 밑밥 깔고 다니더라. 개새끼.”
“참아, 좀. 걔 꼴 보기 싫어서 떠나는 것도 있어.”
“쳇. 아, 근데 스페인은 소매치기도 심하대. 아 세비야는 조금 괜찮으려나"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상대방에 걱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멈추고 니노미야를 바라봤다.
"ㅁ,뭐야. 왜 그래."
"친구가 스페인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잠시만-"
"아니, 넌 진짜..."
제이가 원래 발이 넓은 편인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넓다고? 황당함에 말도 못 끝내고 제이만 보고 있자, '자, 됐다-'하며 그가 폰을 내려 놓았다.
띠링-
"...뭐야?"
"대강 네가 간다고만 말해놨으니까 항공편 일정만 알려주면 돼! 픽업 온다고 했으니까"
"아니 무슨-"
"보나마나 투어 같은 것도 예약 안했지? 거기까지 가서 틀어박혀 있지마."
"아까 소매치기 같은 거 걱정하는 거면 안에만 있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너 가리는 것도 많은데 밥은 어쩌려고? 따라다니는 건 잘하니 이 형 따라가. 현지 가이드도 해서 믿을만 하니까."
"고마워, 제이."
"조심히 다녀오고 올 때 선물 사와!!"
니노미야를 향한 마츠모토의 걱정은 그가 뒤돌아서 손 흔들던 시간만큼 많아보였다. 마츠모토를 보내고 니노미야가 메일 알림으로 반짝거리는 폰 액정으로 눈을 돌렸다.
[준한테 얘기 들었어요~ 아이바 마사키라고 합니다. 언제 들어오시나요?]
폰 뒤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잠시 니노미야는 생각에 잠겼다. 말로는 고맙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랑 다니라고? 그냥 거절할까? 신경 써 준 제이한테 좀 미안한데... 잠깐이지만 니노미야에게 긴 시간이 흐르고 결심한 듯 차분해진 표정으로 니노미야가 액정을 두드렸다.
[니노미야 카즈나리입니다. 아마 저녁쯤 도착할 것 같아요!]
이왕 가는 거 조금 즐기다 오지 뭐. 가이드 있으면 편한 것도 사실이고... 홧김에 끊어버렸지만 이왕 즐기기로 했다. 처음 멀리 해외로 떠나는 여행이라 내심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 * *
"아, 여기! 여기에요! 니노미야 상!"
하...어떻게 돌아가냐... 비행시간이 10시간 넘어가니 지겹고 피로했다. 일본은 가을로 넘어가고 있는데 스페인은 아직 여름에 머무는 듯했다. 공항으로 나오자 여름 특유의 더운 공기가 느껴졌다. 더위에 약한 니노미야가 불쾌함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생각보다 많이 더운 것 같은데… 낯빛이 어두워진 채 출구를 나오자 니노미야의 이름을 들고 있는 아이바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비행기 안에서 건조했을 텐데 이거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닌데 유럽에 워낙 동양인이 귀해서 그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바는 자연스럽게 니노미야에게 냉수를 건네 주며 그의 캐리어를 끌었다. 어느새 아이바의 손에 들려 있는 캐리어를 보고 놀란 니노미야는 사레가 들려버렸다. 갑자기 들린 기침소리에 놀란 아이바가 등을 살살 두드려 주었다.
"괜찮으세요? 급하게 마셔서 그런가..."
"콜록- 아 언제, 켁- 가져가셨-"
"아, 말도 없이 가져가서 죄송해요. 주차장까지 들어드리려고..."
한동안 기침을 하다 진정 되었는 지 니노미야가 어서 가자고 손짓했다. 그제서야 니노미야를 향해 숙였던 상체를 든 아이바가 니노미야에게 시선에서 떼지 못 하며 걸었다.
"저 괜찮으니까 앞에 보세요. 순간 손이 비어서 소매치기인가 싶었네요."
"소매치기요?"
"스페인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니노미야가 체인이 주렁주렁 달린 메신저백과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아까 걱정하느라 자세히 볼 새도 없었는지 아이바가 신기하듯 쳐다보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 니노미야가 당황함에 살짝 아이바에게서 멀어졌다.
"아하- 저는 무슨 패션인 줄 알았어요. 아 그래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던 거구나-"
"답답한데 졔가 꼭 하고 가라고 하더라구요. 사실 저도 폰만큼은 잃어버리기 싫고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구나...괜찮아요, 여기선. 바르셀로나가 특히 심하고 세비야는 그렇게 경계 안하셔도 되요. 몸에서만 안 떨어뜨려 놓으면 되거든요."
"아..."
"준이 좀 철저하긴 하죠. 그래도 친구 말 잘 듣네요- 겁을 엄청 줬나보다-"
몰려오는 부끄러움과 더위에 얼굴이 빨개진 니노미야가 황급히 체인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사실 답답해서 벗으려고 했다고 덧붙이자 아이바는 그 모습을 보며 또 작게 웃었다. 니노미야는 무안함에 애꿎은 빈 물병만 괴롭혔다.
* * *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바쁘셨을 텐데..."
"괜찮아요. 마침 한가할 때 준한테 연락받았는 걸- 저녁에 일정 있어요?"
"음..딱히 없어요... 피곤하기도 해서 그냥 쉬다 자려고요."
어색할 줄 알았는데 대화하다 보니 괜찮았다. 아이바와 대화하면서 니노미야의 동공은 아이바를 살펴보느라 바빴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꾸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운전 중이라 그가 시선을 앞에 고정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니노미야였다.
'잘생겼다... 역시 마츠모토 준 친구네. 모델인가?'
힐끗 쳐다보다 아이바의 공항에서의 모습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마침 신호가 걸려 고개를 돌린 아이바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저녁 같이 먹을래요? 여기 야경 투어 돌기도 좋은데!"
"아, ㄴ,네! 좋아요!"
“제가 중간에 가이드 일정이 있어서 한낮에 동행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 이후로는 같이 다닐 수 있네요.”
“괜찮아요. 가능한 시간에 연락 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주 일정을 좀 비워둘 걸 그랬나봐요”
“에이, 제가 갑자기 온 걸요-”
계속 쳐다본 거 들켰나? 순간 놀라버린 니노미야가 권유에 응해버렸다. 사실 숙소에서 게임하고 있으려 했는데 니노미야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정면을 바라본 채 아이바가 하던 대화 주제를 이어가자, 니노미야는 작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못 봤나 보네- 괜히 어색해질 뻔했네…
예약한 숙소 앞에 도착하자, 아이바가 짐을 내려주며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가 체크인까지 도와주려는 걸 정중히 거절하자 그럼 좋은 밤 되세요-라는 말과 함께 니노미야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이며 웃어보였다. 웃는 낯도 잘생긴 아이바의 얼굴에 정신 못 차리던 니노미야는 짐을 받고 짧게 인사했다. 체크인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는 니노미야의 상기된 얼굴이 비쳤다. 오늘 따라 정신을 못 차리겠네. 그새 홀리기라도 한 건가, 내가.
* * *
[아이바 상 만났어?]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나 보다, 습관처럼 쳐다보던 휴대폰에 알림이 밀린 걸 보면. 니노미야가 머리에 남은 물기를 마저 털어내면 답장을 적었다.
[응 덕분에 편하게 왔다.]
[그렇게 불편하진 않지? 서로 얼굴은 본 적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나 아이바 상 여기서 처음 보는데?]
[본인한테 들어봐. 좀 길거든. 아무튼 내일 그거 꼭 다녀와!]
아, 진짜. 궁금하게 왜 말을 하다 마는 거야.... 아이바 상이 날 안다고? 친근한 인상이긴 했지… 폰에서 시선을 뗀 니노미야가 눈을 꼭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바로 생각나는 것이 없어 그의 미간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침대에 앉은 상태에서 아예 뒤로 풀썩 누워버렸다. 아- 모르겠다- 남은 미련에 고개만 돌려 휴대폰을 바라봤다. 당장 아이바 상한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같은 싸구려 작업 멘트 같아 포기했다. 더 고민해 보고 싶었지만 니노미야는 게임하기도 힘들 정도로 너무 피곤한 상태였다.
* * *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꿈을 꾼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잘 안 꾸던 꿈을 꾸다니 오는 길이 꽤 힘들었나 보다. 짧지 않게 잠을 잤음에도 피곤했다. 니노미야가 시차 때문에 더 찌뿌둥한 듯한 몸을 힘들게 일으켰다. 오늘은 마츠준이 예약해준 알카사르 성에 다녀오기로 했다. 평소에 성당이나 궁전 같은 건축물에 관심을 가진 편은 아니지만 호스텔에서 저녁까지 계속 게임하고 있기도 뭐해서 가보기로 했다. 공짜표니까 마음도 가벼웠다.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고 입장 시간에 맞춰 나섰다.
햇빛이 내리쬐는 세비야는 어제 저녁과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에 솜사탕 맛이 날 것 같은 몽글몽글한 구름이 떠 있었다. 그 아래의 콘스티투시온 거리에는 트램이 사이를 가로지르고 관광객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색 있는 스페인 건물들까지 한번에 보니 정말 유럽에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더운 날씨에도 돌아다닐 의욕이 생겼다.
어제 지나가면서 볼 땐 폐장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는데, 알카사르의 붉은 문 앞에 사람들이 끝도 없이 땡볕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저게.. 나도 줄 서야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까이 가보니 현장 예약하려는 줄이었고 예약 줄은 한산했다. 새삼 예약해준 마츠준에게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주변의 붉은 벽도 인상적이었는데 안으로 더 들어가보니 마치 이 성에 있었던 사람처럼 기분이 묘했다. 알카사르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가 싶어 검색해보니 유명한 미국 드라마의 촬영지여서 더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아, 그래서 입구가 익숙해보이는 건가. 재밌게 보긴 했지.
니노미야가 한참 사자의 문 쪽에서 검색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자신이 길을 막은 것 같아 니노미야가 미안하다고 하며 고개를 들자, 눈 앞에 보인 건-
"우연이네요!"
비켜주면 알아서 지나갈 줄 알았는데 왜 안 지나가나 싶더라니... 너무 놀라서 소리도 안나왔다. 아이바를 보고 크게 어깨를 튄 니노미야가 눈만 꿈뻑이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너무 놀라게 한 것 같아 아이바가 머쓱해하며 사과했다.
"ㄱ, 괜찮아요. 근데 여기는 왜...?"
"가이드 일정이 있었거든요- 입장 시간이 꽤 늦으시네요?"
"아 이거 졔가 끊어준 건데 덜 더울 때 가라고 이 시간에 해줬네요"
"확실히 피크는 지난 시간이긴 하죠. 가이드 해드릴까요?"
"뒤에 가이드 일정 있지 않아요? 짧게 돌아보고 나가려고 하는데-"
"오늘 건 끝났어요! 끝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면 좋겠네요!"
"아,…그럼 부탁드릴게요-"
일 끝나자마자 또 가이드라니, 미안해서 돌려 말해도 개의치 않는 아이바에 니노미야는 가이드를 수락했다. 하긴 원래 가이드로 동행하기로 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얼마 안가 은근히 미로같은 구조의 알카사르에 니노미야는 아이바와 다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여기가 알카사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에요."
"이름만큼 아담하네요-"
둘은 중앙의 사냥의 정원에서 바로 돈 페드로 궁전으로 이동했다. 더 안 쪽으로 들어가니 이슬람 양식 특유의 이색적인 타일과 스페인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화려한 벽 타일에 눈이 아플 정도였다. 타일이 그려진 복도를 따라가니 소녀의 정원이 보였다. 이슬람식 정원의 특징인 물을 중심으로 꾸민 정원이었다. 작은 인공 연못의 양 옆에 심어진 오렌지 나무들이 동글동글하니 귀여웠다. 그 주변에는 신전처럼 긴 기둥들이 아치형으로 이루며 햇살을 맞고 있었다. 말로는 별로 볼 것 없다는 듯 작다고 말한 니노미야였지만 아이바의 설명이 끝나도 한참 감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아이바가 가만히 바라보며 그를 기다렸다.
"-네요."
"네?"
"계속 보니 예쁘네요. 저 때문에 많이 기다렸어요?"
"아, 아니에요. 더 예쁜 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가면 볼 수 있을 거예요. 소녀의 정원은 그곳의 나자르 궁의 정원을 본 딴 곳이거든요."
"아, 알함브라도 많이 들어봤네요-"
세비야에서 알함브라 이야기도 들으며 투어를 계속 했다. 아이바는 다니는 내내 스페인 역대 왕조나 관련 신화를 니노미야가 지루해하지 않도록 잘 정리해서 설명했다. 특히 대사의 방의 은하수를 담은 천장은 그냥 보는 것도 힘든데 설명까지 들으며 보려니 목이 너무 아팠다. 금빛과 쨍한 색료로 화려해서 눈도 아팠었다. 이 때부터 아이바에게는 미안하지만 목소리만 듣고 대강 끄덕이며 넘겼던 것 같다. 정원이 유명하다는 알카사르 임에도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상태를 보고는 그늘 아래를 위주로 다녔다. 니노미야는 저 땡볕 아래 있을 필요 없구나, 다행이다- 하며 동선이 우연히 실내를 많이 다닌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미로 정원에 가까워지자, 아이바는 걸음을 돌려 그루테스코 갤러리로 가는 계단으로 갔다. 근처의 메르쿠리오 연못에서 나오는 분수의 수증기를 맞으며 더위를 식히던 니노미야가 황급히 그를 따라갔다.
표지판에는 갤러리라고 하면서 긴 복도 양쪽에 아치형 창문이나 기둥이 늘어진 복도였다. 창문 쪽에서는 춤의 정원을, 아치 기둥 쪽에는 메르쿠리오 연못과 전체적인 전경을 조금 높은 시선에서 볼 수 있었다. 밑에는 마지막 코스인 미로의 정원과 출구가 가까워서 그런지 사람이 많았는데 위층으로 올라오니 사람이 덜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창틀에 앉혔다. 말이 창문이지 벽에 말발굽 모양 구멍을 뚫어둔 형태라 창틀이 넓었다. 니노미야가 계속 서있는 아이바를 올려다보았다.
"앉으시는 줄 알았는데… 일어날까요?"
"아, 아니요- 저는 저기 밑에 카페테리아에서 마실 거 사올게요! 저 안에 자리가 없어 보였거든요."
"아, 그럼 제가 사올-"
"괜찮아요. 아까 올라오기 힘들어 보이던데 다시 올라오기 싫을 걸요?"
"...."
"그럼, 다녀올 테니 쉬고 계세요!"
올라올 때 너무 헉헉 댔나? 더운데 계속 서서 돌아다녀서 힘들긴 했지... 어제부터 아이바한테 계속 챙김 받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번에 자신이 다녀오려고 했는데 민망함에 대답을 못했다. 니노미야는 피로가 몰려오는 다리를 콩콩 두드리며 정원 쪽을 바라봤다. 강한 햇빛에 푸른 녹빛이 더 빛났다. 퍼즐처럼 딱 떨어지는 사각형으로 정리된 나무들이 신기했다. 그 사이에 우뚝 선 야자수는 오늘 날씨만큼 더운 열대 지방을 연상시켰다. 반대쪽에는 수영장만큼 넓은 연못이 보였다. 자신이 있는 2층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부터 폭포처럼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이 미스트를 뿌린 것처럼 시원했다. 약간의 물기와 함께 살랑이는 바람이 시원해 니노미야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까 보았던 소녀의 안뜰이나 대사의 방 천장을 설명하던 아이바의 모습이 니노미야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을 뜨고 시선을 내렸을 때는 카페테리아에서 나온 아이바가 밑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와 눈을 마주치자 크게 손을 붕붕 흔들었다. 금방 올라올 거면서 뭘 새삼.. 싶은 니노미야였지만 피식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니노미야가 손을 팔랑이자, 아이바가 그제야 손을 내리고 활짝 웃었다. 왕궁 정원에 내린 햇살만큼 환한 그의 미소에 니노미야는 손 내리는 것도 잊고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원래 저렇게 자주 웃는 상인가? 니노미야가 놀란 심장을 진정하고 있는 동안 아이바가 갤러리의 복도를 걸어왔다. 그가 건넨 물을 받아들 때까지 니노미야는 당황한 표정은 숨겼지만 발갛게 달아오른 귀 끝은 숨기지 못했다.
* * *
"덕분에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준한테 부탁까지 받았는데 이정도는 해야죠-"
"아, 그럼 가이드 비용은-"
"아뇨, 괜찮아요! 안 주셔도 되요!"
알카사르를 나왔을 때는 더위가 한풀 꺾인 시각이었다. 출구 근처에서 걸음을 멈춘 니노미야는 신경 써준 아이바가 고마워 지갑을 꺼내 들었다. 아이바는 놀라서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공항 픽업부터 수고한 아이바였기에 니노미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아이바는 정말 괜찮다며 계속 거절했다. 이쯤 되면 둘 중 한 명이 지칠 만도 한데, 둘의 실랑이는 꽤 오래 이어졌다. 둘이 다투는 걸로 오해한 현지인이 직접 말렸을 때는 서로 머쓱해하며 멀어졌다.
"...그러게 바로 받으면 좀 좋아요, 아이바 상."
"저희 이러다 또 30분 동안 서있겠어요. 전 진짜 괜찮아요."
"아무 것도 안 받으시면 제 양심이 좀 불편한데요-"
"음- 그럼,"
아이바가 거리 건너편의 가게를 가리켰다.
"아이스크림이요?"
"네! 오랜만에 맛있을 것 같아서요. 다른 거 먹기엔 이따가 저희 저녁 먹잖아요."
아이바가 가리킨 곳은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젤라또 가게였다. 겨우 아이스크림으로 괜찮을까 싶은 니노미야였지만 일반 하드 아이스크림보다 높은 가격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젤라또 가게는 특이하게 아이스크림을 장미모양으로 담아주었다. 맛을 먼저 고른 아이바가 자리를 잡고 니노미야가 아이바 것까지 받고 테이블로 향했다.
"저한테는 신 계열로 추천해 주시더니 본인은 달달한 거 드시네요."
"딸기 맛을 좋아해서요. 아, 고마워요. 이러니까 나한테 장미꽃 주는 것 같다-"
"흐흥- 누가 봐도 아이스크림인데요."
"그건 그래요-"
아이바가 던진 말에 니노미야가 웃으며 받아쳤다. 틱틱 대며 말은 했어도 정말 아이바에게 장미를 주는 것 같았다. 그만큼 딸기맛 아이스크림이 붉었고 종업원의 손기술이 좋았을 뿐이다. 자리 앉아 아이바가 추천해준 레몬과 자몽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 상큼함이 기분 좋게 퍼졌다. 어떻냐는 아이바의 질문에 나쁘지 않다고 니노미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입이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아이바가 쿡쿡 웃으며 니노미야를 놀렸다. 니노미야는 그를 살짝 째려보며 아이바 상이야말로 더 바삐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며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손에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발견한 아이바가 당황하며 건네받은 휴지로 훔쳐냈다. 허둥대는 아이바의 모습을 보며 니노미야는 킥킥 웃으며 마저 젤라또에 입을 가져갔다.
* * *
젤라또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거리가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타파스 바로 가기 위해 아이바와 니노미야는 거리로 나왔다. 올려다본 어스름한 하늘에는 군데군데 분홍빛 구름이 풀어져 있었다. 니노미야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아이바가 그를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들었음에도 반응이 느리길래, 아이바가 먼저 손을 끌었다. 아이바의 힘에 끌려 니노미야가 아이바에게 안긴 꼴이 되었다. 뭐하는 거냐고 말하려는 찰나에 니노미야가 있던 자리에 트램이 지나갔다.
"아무리 하늘이 예뻐도 조심해요-"
"아, 감사합니다."
"그러다 이렇게 당하는 거예요."
"네?"
민망함에 가까이 있는 아이바의 얼굴을 안 보려고 했는데, 아이바의 마지막 말에 니노미야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바의 다른 한 손에는 니노미야의 휴대폰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어어?? 아니, 어떻게- 니노미야가 당황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키 차이 때문에 아이바에게 무게만 더 실리고 니노미야의 손은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바가 니노미야를 잡은 손을 그대로 그의 허리를 감싸 넘어지지 않게 받쳐줬다. 아, 알았어요. 돌려줄 테니까 잠깐만 ㄸ,떨어져- 휴, 고마워요. 아이바 덕분에 중심을 잡은 니노미야가 아이바에게서 살짝 몸을 뗐다. 그의 손에 휴대폰이 돌아오자, 그제야 반대손의 무게도 느껴졌다.
"저, 아이바 상-"
"응?"
"저희 이러고 걸어 다닐 건가요?"
아이바의 손에 감싸인 자신의 손을 들어보였다. 아이바도 그제야 자각했는지, 손에 힘을 풀었다. 어색함을 피하려고 장난을 친 건데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아이바는 어쩔 줄 몰랐다. 분위기를 전환하려 고민하는 둘의 얼굴이 석양빛을 띄었다. 서로 아무렇지 않은 척 어느 쪽이냐, 여기서 꺾어야 한다며 대화를 이어갔지만, 시선은 상대방을 향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니노미야는 알카사르에서 느꼈던 열감을 또다시 느꼈다.
* * *
도착한 타파스 바는 아이바의 단골 가게인 듯했다, 한 직원이 대뜸 아이바와 볼을 맞대는 거 보니. 아이바는 능숙하게 스페인어로 그와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관광객에게도 유명한 곳인지 주변에 여러 언어들이 섞여 있었다. 모던한 인테리어로 깔끔한 가게라 그런지 애인과 함께 온 손님이 많이 보였다. 니노미야가 메뉴판을 읽어보았지만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건 가격뿐이었다.
"타파스라서 가격이 저렴할 거예요. 그만큼 양도 적으니 두, 세 개 시키면 맞을 거예요!"
"근데 봐도 뭔지 몰라서.."
"제가 알려드릴게요. 아, 우선 마실 거 먼저 주문하죠. 술 드세요?"
"네! 제이가 스페인 오면 ㅌ,틴또?나 샹그리아 마셔보라고 하던데 뭐가 좋아요?"
"띤또는 탄산이고 샹그리아는 탄산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럼 띤또로 할게요."
대기하고 있던 아이바와 친한 직원이 주문을 받고 돌아갔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음식 취향을 물어보고 몇 가지 타파스를 추천했다. 니노미야는 그 중에서 하몽이나 타르타르는 제외하고 감바스 알 아히요와 소꼬리찜, 버섯 리조또를 골랐다. 메뉴를 고르는 사이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니노미야에게는 붉은 띤또가, 아이바에게는 투명한 레부히또가 내어졌다. 목마름에 니노미야가 먼저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오. 이거 맛있네요!"
"가볍게 잘 넘어갈 거예요."
"그것도 와인 들어갔어요?"
"네- 이것도 비슷한데 화이트 와인이 들어가네요. 마셔볼래요?"
"네!"
아이바의 것도 한 모금 머금은 니노미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술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보다 바에 오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아이바였다. 아이바에게 잔을 넘기니 음식들이 내어졌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들을 보던 니노미야가 입을 열었다.
"근데요-"
"네?"
"저 알고 계셨어요? 제이가 저희 얼굴 본 적 있다고 하던데-"
"니노미야 군은 모르실 수도 있죠. 저만 기억하고 있어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
준이랑은 동네 친구라고 했죠? 저는 그 대학을 다니지 않지만 원래 그 주변에 살았어요. 준은 입학하면서 이 동네로 온 거구요. 니노미야 군을 만났을 때는 제가 한참 아르바이트로 바빴네요. 스페인으로 유학 가고 싶어서 돈이 엄청 많이 필요했거든요. 일주일 내내 일했어요. 그 때 진짜 힘들었는데... 저 거기서 일했었어요. 학교 앞 보타닉 카페. 맞아요, 준의 단골 카페죠. 니노미야 군도 자주 왔었죠? 아메리카노 2샷 추가. 하하, 놀라시네요. 오래 일한 만큼 단골 손님도 기억하죠. 저희가 처음 만난 건요-
전날 밤에 잔업 때문에 늦게 돌아와서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어요. 하루 빠질까 싶었지만 이번주가 마지막인데 하루라도 더 벌기로 했어요. 카페에서 쪽잠 자려고 근무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어요. 30분 정도 자고 잠 깨려고 카페 밖 흡연구역으로 갔어요. 벤치에 앉았는데 누군가 제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거예요.
"저기요-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그새 담배를 문 채 졸고 있었던 거죠. 너무 창피했어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고 제 앞의 사람에게 인사했어요.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에 익은 저희 카페 손님이었어요.
"사과하실 건 없구요. 불 좀 주실래요?"
'어? 블랙커피 진하게 마시는 손님이다. 준이랑 같이 온 걸 몇 번 본 것 같은데....친군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되는데 그 사람 말랑말랑한 인상에 담배를 피우니 신기했어요. 아,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진 않았어요. 그냥 의외다-하고 말았죠. 라이터를 넘겨받았는데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어요.
"공부 열심히 하시는 건 좋은데, 조절하면서 하세요-"
훈계하는 듯한 말투와 달리, 목소리와 눈빛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어요. 그리고, 무언갈 건네 주더군요.
"에라, 인심 썼다. 낮에 졸리면 이거 먹어요, 알겠죠?"
"ㅇ,아. 감사합니다..."
딸기 하이츄였어요. 아마 시험기간이라 같은 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얼떨결에 받은 하이츄를 손에 꼭 붙들고 감사인사를 전했어요.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웃으며 돌아갔어요.
"보답은 안 하셔도 되요- 시험 잘 보세요!"
그 길로 전 바로 시프트 들어갔죠. 감사인사를 제대로 전했어야 했는데 아쉬웠어요. 다음에 오시면 제대로 감사하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흘이 지나도 안 오시는 거 있죠? 다시 만날 운명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서 마지막 출근날에 허탈하게 앉아 있는데 입구의 종이 울렸어요.
"어서오세요-"
"아,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샷 추가 2번, 맞죠?"
의아함에 손님은 고개를 들었어요. 하지만 저를 알아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 그냥 아- 저 직원 기억력이 좋구나-하는 표정이었죠.
"하이츄 잘 먹었어요."
"....! 아~ 그 벤치에서 졸던 분! 여기서 일하시나봐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내일 출국하거든요."
"출국이요?"
"세비야로 유학을 가거든요. 자, 여기 커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거기서는 길에서 주무시지 마시고-"
손님은 제가 한 말에 당황하시더니 금방 기억하셨어요. 붙임성 좋은 그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보였어요. 잠깐 들른 건지 그가 시계를 보더니 커피를 받고 급하게 카페를 떠났어요. 짧은 재회였지만 한 번이라도 봤으니 괜찮았어요. 출국길에 제 배낭에 딸기맛 하이츄 몇 개를 들고 갔죠. 가장 지쳐갈 때 만난 상냥한 사람이라 기억에 남네요.
여기로 여행 오신다고 연락 받았을 때도 몰랐어요. 저는 손님의 얼굴이랑 준이 친구라는 것만 알았으니까요. 아시다시피 준이 친구가 한 두 명 있는 게 아니잖아요? 공항에서 봤을 때 정말 반가웠어요! 혹시 절 기억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런데 마지막 출근날처럼 공항에서도 저를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았어요. 안경을 벗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잠깐 본 사람을 1년 반 동안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그냥 넘어갔죠.
* * *
나온 요리보다도 아이바의 말에 더 집중한 것 같다. 아이바가 이야기하는 동안 니노미야의 잔은 시원한 온도를 유지했고, 아이바의 잔은 미지근해져 갔다. 니노미야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카페 직원의 얼굴을 흐릿했다. 확실히 하이츄를 누군가에게 준 것 같은데 왜 자신이 안 하던 행동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니노미야가 직원을 불렀다. 한잔 더-라는 그의 말에 아이바가 직원에게 취소해달라고 말했다.
"타파스도 다 먹었는데, 지금 몇 잔 째인지 알아요?"
"...네?"
"아무리 칵테일이라도 네 잔 넘어가면 취해요. 그만 일어나죠."
“아…”
나 언제 세 잔이나 마시고 있었지? 계산을 하고 니노미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기울어지는 니노미야를 본 아이바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거 봐요- 술 좀 깨게 걷다가 돌아가요."
처음 식당으로 향하던 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아이바와 니노미야가 나란히 걸었다. 아이바는 세비야 대성당이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더 있다가는 어색해지지 않을까 싶어 니노미야가 입을 열려는 데 아이바가 더 빨랐다.
"여기 산타크루즈 지구 골목길이요, 키스 골목으로 유명해요. 왜 그런 지 알아요?"
"...연인들이 많아서?"
"사랑이 많기도 하지만 여기서 키스가 우리가 아는 키스가 아니에요."
"뭔데요?"
"아까 제가 식당에서도 했던 볼인사 있죠? 그걸 번역하는 과정에서 키스라고 의역되었거든요.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만큼 길이 좁기도 하지만 특히 발코니가 닿을 듯이 가까워요. 그래서 이웃이랑 볼인사를 할 정도로 좁은 골목이다-해서 키스골목이라고 해요."
"재밌네요-"
"진짜 재미있어 하는 거 맞아요? 영혼이 없는데-"
"사실 술이 좀 깨서 그런지 피곤이 밀려오네요."
"그럴 것 같아서-"
"?"
"지름길로 왔죠. 설명도 겸사겸사 해드리고."
낮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 술이 금방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아이바의 깨알 정보에 말문이 잠시 트였다. 말꼬리 잡는 아이바에 괜히 돌려서 대답했다. 작게 입꼬리를 올린 아이바는 골목의 끝으로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아이바를 따라가니 정말 니노미야의 숙소가 보였다. 아이바가 니노미야 앞에 섰다.
"아까 술김에 한 이야기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부담스러워 할까봐 말하는 거예요. 그냥-"
"..."
"준의 부탁으로 가이드 해드리는 거니까요."
"...ㅔ요."
"네?"
"부담스러운 건 아니에요. 진짜 신기해서 놀랐을 뿐이니까... 오늘 고마웠어요."
"저 덕분에 알찬 하루가 되었다면 뿌듯하네요. 그리고-"
"?...!!!"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요-”
아이바가 약간 주저하며 식당에서의 화제를 꺼냈다. 아이스크림 먹을 때처럼 허둥대는 모습이 보이자 니노미야가 차분히 대답했다. 인사하고 돌아가려는 데 아이바가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아까 지난 골목의 유래대로 아이바가 니노미야의 양 볼에 자신의 볼을 톡톡 갖다 댔다. ㄷ, 들어가세요! 놀란 니노미야가 황급히 숙소 입구로 돌아갔다. 니노미야가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이바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로비 앞 거울에 선 니노미야는 술 마셨을 때처럼 빨개진 자신의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분명 식당에서 본 볼인사와는 다르게 아이바는 자신의 왼쪽 볼에 도장 찍듯 조금 오래 대고 있었다, 마치 키스하듯. 볼의 감각을 더듬어보던 니노미야가 부끄러움에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잠을 많이 설칠 것 같다.
* * *
예상대로 니노미야는 제대로 푹 자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은 별 일정이 없어서 늦잠을 자도 아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다리 쪽에 근육통이 느껴졌다. 니노미야가 기지개를 켜고 퀭한 눈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열 시. 그래도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했다.
원래 피곤할수록 꿈을 더 잘 꾼다더니. 진짜였다. 깨고나서 피곤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자신도 아이바가 얘기한 때의 일이 조금 기억이 나는 듯했다. 맞아, 그 더벅머리 안경. 사실 흡연구역에서 담배물고 그렇게 늘어져 있는 사람한테 말 걸었던 건, 그 사람이 훈훈하게 생겨서도 한몫 했다. 쭉 뻗은 기럭지에 반 이상 내려간 안경에는 잘생긴 얼굴이라니. 3차 시험까지 있다는 공대 사람인가.. 주변에 저렇게 피곤할 사람은 대부분 이과 사람들인데.. 옷도 그렇고 저런 사람을 보고 너드라고 하는 거겠지? 생각하는 중에 이미 자신은 말을 걸고 있었고 하이츄까지 쥐어 주었다. 단골 카페 직원인 걸 알았으면 당연히 그냥 지나갔지... 카페를 가도 음료만 금방 사고 나올 뿐이라 누가 일하는 지도 원래 잘 모르고. 근데 지금은 깔끔한 머리에 안경도 안 썼는데 절친도 못 알아보겠다. 잘생긴 사람이 많은 나라에 있으면 그렇게 멋있어지는 건가.
기억을 더듬다 보니 잠이 깬 니노미야가 욕실로 향했다.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니노미야의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오늘 저녁에도 볼 수 있을까요?]
* * *
콘스티투시온 거리의 마지막 가로등에 가까워지니 약속 장소인 히스팔리스 분수가 보였다. 잔잔한 물줄기처럼 은은한 조명은 흰 분수대를 더 밝게 만들고 있었다. 여성 조각상을 중심으로 그 밑에 소년 조각상들이 둥글게 조각되어 있었다. 그 한 켠에 기타를 든 할아버지가 거리와 어울리는 음악을 연주하며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니노미야도 분수대에 앉아 할아버지의 기타 버스킹을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 듣는 음악이지만 빠져드는 선율이었다. 한참을 고개를 버스킹 쪽으로 향하고 있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오셨네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드니 순간 주황빛 햇살이 눈을 찔러 손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그제야 아이바의 모습이 보였다. 마저 인사하고 아이바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가이드 다녀오신 거예요?"
"네..이번 달이 좀 성수기라 예약이 많았네요..니노미야 군은 좀 쉬었어요?"
"네, 그래도 다리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요-"
"아..그럼 오늘 안 나오셔도 되는데-"
"내일 뜨는 데 하나라도 보고 가야죠-"
지금 가는 스페인 광장은 언제든 사람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라고 한다. 어제 보았던 분홍빛과 보랏빛 하늘이 스페인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중앙의 분수대를 중심으로 넓게 반원으로 둘러싼 광장은 작은 호수를 품고 있었다. 일몰이 가까워지자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있어서 광장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광장 건물 벽에는 스페인의 모든 도시의 벽화가 벤치와 함께 있었고 아이바가 몇 개를 집어서 설명해주었다.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온 니노미야는 작은 호수 앞의 벤치에 앉아 편하게 설명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더 지나 전체적인 광장의 모습보다 조명이 더 잘 보이게 되었다. 잠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아이바가 화두를 꺼냈다.
"니노미야 군. 내일 돌아가죠?"
"....네."
"아쉽네요- 아직 세비야의 반도 못 보셨는데-."
"덕분에 편하고 알차게 다니다 가네요.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워요. 설명도 지겹고, 덥고, 다리 아픈데도 잘 따라와 주셔서. 다음에는-"
"....!!!!"
"그라나다에서 뵙고 싶네요."
갑자기 무겁게 분위기를 잡아서 뭔가 했더니 작별 인사인가. 직접 아쉽다는 말을 들으니 니노미야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의 감사의 말에 대답하던 아이바의 목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볼 쪽에 무게감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니노미야의 볼에 짧게 입술을 댄 아이바가 바로 멀어졌다. 놀란 니노미야가 고개를 돌려 입술이 앉았던 볼을 감싼 채 아이바를 바라봤다. 서로의 시선이 맞춰지자 아이바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나 보러 스페인 왔으면 좋겠어, 니노미야 군."
이번에는 입술에 아이바의 체온이 살짝 앉았다 사라졌다. 저질러 놓고 민망했는지 아이바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상황 파악하느라 바쁜 니노미야는 대답 대신 아이바를 따라 걸었다. 눈 앞의 아이바의 귀 끝이 어젯밤의 자신의 것과 닮은 색을 띄고 있었다.
* * *
어제의 광장 사건(?) 때문에 공항으로 가는 차 안은 음악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비행기 시간을 물어본 이후로 끊긴 대화는 한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분명 체크아웃하고 짐 실을 때 까지만 해도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얘기했다. 하지만 차 안에 단 둘이 남자 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둘 다 어제의 일을 신경 쓰고 있었다.
"풉-"
"..??"
"어떻게 처음 만난 날보다 어색할 수 있나 싶어서요."
"ㅇ,아니요! 안 어색한데요!"
"충분히 들리니까 앞에 보세요. 아이바 상은 그럼 원래 땀이 많은 걸로 해요-"
"..."
"에어컨이 빵빵한데도 식은 땀 흘리는 거 보면."
"아까 캐리어가 무거워서 그래요!"
"크큭- 네,네-. 알겠어요~"
차에 탄 게 언젠데. 니노미야가 킥킥 웃었다. 변명하던 아이바도 이내 큭큭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금방 세비야 공항까지 도착했다. 아이바가 주차장에 다녀온 사이 니노미야는 체크인을 끝내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역시 아이바 상이 타 준 커피가 낫네요."
"그래요?"
"여기는 샷 추가해도 시고 밍밍해요-"
"애초에 그렇게 진하게 마시는게 안 좋아요."
"요즘은 그래도 샷 하나만 추가해요."
"잘했어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게이트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출국장 앞에서 니노미야가 기내용 캐리어를 손에 끼고 아이바를 바라봤다.
"재밌었어요, 아이바 상!"
"저도요."
"만나서 반가웠구요."
"저도 다시 만나서 좋았어요."
"다음에 볼 때는 말 편하게 해주세요. 혹시나 신경 쓰실까봐-"
"응, 알았어. 너도 편하게 불러줘, 니노미야."
"와, 기다렸다는 듯 놓네요. 어, 저 진짜 가요! 안녕히 계세요!!"
바로 튀어나온 아이바의 반말에 킥킥대던 니노미야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이바도 마주 흔들었다. 돌돌돌 캐리어를 끌고 가던 니노미야가 갑자기 중간에 멈춰 섰다. 아이바는 흔들던 손을 멈추고 그를 살펴봤다. 뭐 두고 갔나? 니노미야를 부르려던 순간, 그가 캐리어와 함께 아이바 쪽으로 돌았다.
"뭐 두고 갔어? 아까 카페에는 아무 것도 없던데?"
"깜빡한 거 있죠."
캐리어를 아이바 손에 쥐어준 니노미야가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아이바의 얼굴에 가까이 댔다. 볼인사인가 싶어 고개를 숙여준 아이바의 동공이 더 커졌다. 볼에 닿은 면적이 예상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은 온기는 그새 아이바의 입술에 안착했다. 입술을 뗀 니노미야가 당황한 아이바의 얼굴을 양 손을 붙잡고 말했다.
"방금 챙겼으니 가요.
“…??”
“이번엔 그라나다로 갈까요?"
자신이 뭘 들은 건지 곱씹어보던 아이바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이바를 보고 니노미야도 따라 웃었다. 그것도 잠시, 아이바는 한 팔로 니노미야의 허리를 감싸며 니노미야와 거리를 더 좁혔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깊게 입을 맞췄다. 니노미야도 팔을 그의 목에 두르며 더 가까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