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을 잇는 토끼
진미채
옛날 옛날, 육지에서 털이 희고 복슬복슬한 토끼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엄청난 폭풍으로 토끼는 파도에 휩쓸려 외딴섬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섬은 육지로 가는 다리도, 배도 없는 데다가, 주위에 악어들이 득실득실했죠. 토끼는 이런 무서운 섬에서 벗어나 어서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토끼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토끼는 섬 주위에서 헤엄치던 악어를 한 마리 불렀습니다.
"악어야, 악어야. 너는 네 가족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흥! 무슨 꾀를 부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관심 없어!"
악어는 매정히 돌아섰지만, 토끼는 물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러자 악어들은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지요.
"그러게, 우리 가족은 몇 마리나 있지?"
"내가 너희 식구들을 세는 걸 도와줄게! 여기에 한 줄로 서 보지 않을래?"
토끼의 말대로 악어들이 한 줄로 주르륵 서자, 토끼는 악어들의 등을 한 번씩 밟으며 세기 시작했어요. 악어 가족이 어찌나 많은지 악어 줄은 육지까지 이르러서 토끼는 안전하게 육지까지 갈 수 있었어요. 육지에 이르자 토끼는 악어에게 말했어요.
"악어들아, 사실 나는 너희 식구가 몇이나 있는지 관심 없었어. 나는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라고."
"뭐라고? 너 우릴 속였구나!"
토끼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악어들은 토끼의 털을 몽땅 뽑아버리고 말았죠. 한순간에 벌거숭이가 된 토끼는 슬퍼서 엉엉 울고 말았어요.
그 순간, 토끼 곁으로 신이 하나 지나갔어요. 그는 세 명의 신들 중 첫째로, 용왕의 딸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길이었죠. 토끼는 첫째 신을 붙잡고 울면서 빌었어요.
"첫째 신님, 첫째 신님. 저를 도와주세요. 악어들이 제 털을 몽땅 뽑아서 벌거숭이가 되어버렸어요."
"그럼 바닷물에 몸을 씻고 햇볕에 몸을 말리렴. 새 털이 보송보송하게 날 거란다."
토끼는 첫째 신의 말대로 했지만, 새 털은커녕 몸이 더 따가워지고 발갛게 되었어요. 첫째 신이 토끼를 골탕 먹인 거였죠.
몸은 따갑고 아프고 털이 여전히 나지 않아 벌거숭이가 된 토끼는 더 큰 소리로 엉엉 울었어요. 바로 그때 둘째 신이 토끼 곁을 지나고 있었어요.
"둘째 신님, 절 도와주세요."
하지만 둘째신은 토끼를 무시하고 지나가 버렸죠.
울다 지쳤을 때쯤, 토끼 곁으로 막내 신이 지나가고 있었어요. 토끼는 마지막으로 막내 신에게 외쳤어요.
"막내 신님, 막내 신님. 도와주세요. 악어가 제 털을 몽땅 뽑아버려서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어요."
토끼의 이야기를 들은 막내 신은 토끼가 가여워졌어요. 그래서 막내 신은 토끼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토끼야, 맑은 물에 몸을 씻고 풀밭에 구르면 흰 털이 보송보송하게 날 거야."
토끼가 막내 신의 말대로 하자, 정말로 새 털이 보송보송 나는 게 아니겠어요? 토끼는 뛸 듯이 기뻐 막내 신에게 말했어요.
"감사합니다 신님! 용왕님 딸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길이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막내 신은 토끼의 도움을 받아 용왕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이 일로 토끼는 인연을 이어주는 동물이 되어 인연의 신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동물이 되었답니다.
"시시하다."
"옛날이야기잖아."
니노미야는 팔을 뻗어 앞에 있는 토끼 동상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토끼 동상은 실물에 가까운 모습의 토끼가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이어서 그렇게 귀여운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바는 옆에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걸 다 듣는 너도 신기하다. 여기서 그 얘기 기억하는 애는 전교생에서 3명뿐일걸."
"니노가 자고 있으니까 심심해서 어쩔 수 없었어."
"흐응."
대충 콧소리로 대답을 한 니노미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바도 니노미야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신사 안에는 온통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흔한 수학여행 풍경이었다.
니노미야와 아이바가 서 있는 곳은 교토의 관광명소인 기요미즈데라 안에 있는 인연의 신사였다. 아이바가 얘기해준 인연의 신사와 관련된 옛날이야기는 버스에서 교관이 들려준 것이었다. 니노미야 말대로 아마 아이바 빼고 전부 듣지 않았을 테지만. 설화 같은 것쯤 듣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신나 있었다. 모두들 신산 안에 놓인 사랑 점의 돌을 둘러싸고 너도 나도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지 시험해보고 있었다. 유명한 미신이었다.
사랑 점의 돌은 두 개다. 두 돌은 연을 뜻하는 매듭을 각각 머리에 얹어놓고 한 5미터 떨어져서 각자의 자리에 박혀있는데, 눈을 감고 한 돌에서 맞은편의 돌까지 간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간단하게 보이지만 쉽지는 않은지 다들 자신만만하게 시도해 보고서는 엉뚱한 곳에서 눈을 떠서 웃거나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아이바는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해보고 싶어?"
돌아보니 니노미야가 말간 눈으로 아이바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보고 싶긴 하지만 그걸 직접 말하기엔 조금 쑥스러웠던 아이바는 괜히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니노미야는 날아가는 나비를 지긋이 보는 고양이처럼 그 움직임을 보다 입을 열었다.
"가자."
뭐?
어느새 팔목이 잡힌 아이바는 니노미야에게 끌려 사랑 점의 돌 앞에 서게 되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이바의 모습을 본 니노미야는 픽 웃었다.
"눈 감아야지."
어떻게 하는 건 진 알지?
니노미야의 물음에 아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같은 반 여자애들한테서 수학여행지에 있을 사랑 점 돌에 대해서 듣고 나서 더 알아보려고 따로 웹서핑까지 한 아이바가 모를 리가. 그 사실은 물론, 제 짝사랑 대상인 니노미야에게는 절대 비밀이었지만.
하고 싶었던 거니까, 이왕 기회가 왔으니 잘 해내고 싶었다. 설령 그게 그냥 미신이더라도. 아이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주위에 있던 아이바의 친구들이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뭐야, 아이바 누구 좋아해? 누군데!"
"아이바 마사키 돌에 걸려 넘어지게 해주세요!"
"야 그런 말 하지 마. 쟤는 진짜 그럴 수도 있어."
"아 시끄러워!"
부끄러움에 괜히 소리를 빽 질렀지만 친구 놈들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시끄러운 친구들의 목소리 사이사이로 니노미야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바는 이미 감은 눈을 더 질끈 감고, 결의에 찬 주먹을 쥐고 첫 발을 뗐다.
확실히 눈을 감으니 일직선으로 걸으면 되는 거였는데도 어려웠다. 애초에 거리도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바 마사키는 꼭 제대로 맞은편 돌까지 완주를 하고 싶었다. 아이바의 머릿속에는 완주와 인연을 이어주는 토끼와 니노미야 카즈나리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정말 토끼가 운명을 이어줘서 니노미야와 운명이 된다면.
너무 집중한 나머지 더 이상 시끌시끌한 주변은 아이바에게 들리지도 않았다.
한 걸음만 더 갈까? 여기서 멈출까? 유급을 당할 뻔한 중간고사 시험에서 마지막 남은 수학 문제를 찍는 것보다 더 긴장되었다. 마지막 순간, 아이바는 결국 한 걸음을 더 가는 것을 선택했다.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이바."
좀 황당해하는 니노미야의 목소리가 왜인지 가까이서 들렸다. 뭔가 이상한데. 아이바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아이바의 바로 코앞에 니노미야가 서 있었다.
잠깐의 정적 뒤 신사 안은 시끌벅적해졌다. 박장대소를 하며 놀리는 같은 반 친구들의 무리 한가운데에는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뻑거리는 니노미야와 비슷하게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 아이바가 있었다. 아이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목적지였던 돌은 이미 지나쳐 있었다. 허둥대는 아이바를 보던 니노미야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젖히며 한바탕 깔깔 웃어댔다. 아이바는 머리끝까지 얼굴이 빨개져 거대한 토마토가 되었다.
그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3년 전의 일이었다. 이 일이 약 13년 뒤 겨울, 서른의 아이바 마사키의 머릿속에서 플래시백처럼 떠오른 이유는,
"오랜만이네."
그때처럼 눈을 뜨니 제 앞에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마법처럼 서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니노미야와 10년 만의 조우였다.
세상에.
아이바의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보, 본가에 들른 거야? 되게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못 봤었는데..."
"응. 작년까지는 바빠서 못 왔는데 이제 당분간은 여기에 있으려고. 도시 지치더라."
"그렇구나..."
아직도 자기가 정말로 니노미야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믿기지 않아 아이바는 대답을 하는 중에도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무지 아팠다. 그럼 꿈이 아니란 말인데. 아이바의 머리가 정신없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10년 넘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랜만인지 니노미야 앞에서 긴장이 되었다. 일단 니노미야를 시선 밖에 두려 돌아선 아이바는 커피포트를 들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몇 분 만에 일어난 일이다. 니노미야가 나타나기 직전, 아이바는 컵 몇 개를 씻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등 뒤에서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것이 들렸고, 아이바는 손님을 맞기 위해 뒤를 돌려고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 물이 튀어 아이바의 눈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뜰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은 이미 돌아가 있는 상태라 얼른 물을 닦으려고 했을 때,
"아이바?"
굉장히 익숙하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설마 하는 마음과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교차하며 13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이바는 눈을 떴다. 그리고 정말, 기요미즈데라의 신사에서처럼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서른이 된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처음에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아 아이바는 멍하니 니노미야를 쳐다보았다. 니노미야는 나이를 남들보다 배는 천천히 먹는지 얼굴이 13년 전이랑 똑같았다. 니노미야가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시간 여행이라도 한 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13년 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니노미야의 목소리가 소년 때와는 달리 좀 더 깊어져서였다. 아이바는 느리게 눈을 깜빡여 겨우 말을 꺼냈다.
니노...
"어른, 맞아?"
"에?"
어리둥절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니노미야는 이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었다. 또 무슨 실수를 저지른 지를 알게 된 아이바는 13년 전처럼 거대 토마토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겨우 진정한 니노미야는 아직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블랙커피를 주문했고,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보자마자 또 다른 흑역사를 생성한 아이바는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싶은 심정으로 커피콩을 그라인더에 채웠다. 니노미야는 그 앞에 바(bar) 자리에 앉아 아이바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없이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을 보는 게 부담스럽고 괜히 긴장이 되어 주의라도 돌여보자 싶어 아이바가 먼저 말을 꺼냈다. 본가에 들른 거냐는 질문으로 시작된 잡담은 계속 이어졌다.
"니노 도시에서 지냈구나... 거기서 뭐 했는데?"
"회사 다녔지 뭐. 이제는 때려치웠지만."
"진짜? 그래서 쉬는 겸 해서 내려온 거구나."
"그것도 있고, 요즘 글을 쓰기 시작해서."
"글이면, 작가가 된 거야?"
"응."
니노미야의 말에 아이바의 눈빛이 반짝반짝해졌다.
"정말? 멋있다!"
"그럴 것 까지는 아닌데."
아이바의 호들갑에도 니노미야는 점잖게 웃었다. 아이바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 소설 쓰는 거야? 책 냈어? 왜 난 몰랐지? 내가 책 다 살게!
"책은 내긴 냈는데, 새로 등단한 다른 작가들이랑 공동으로 낸 단편집에 몇 번 낀 거야."
"그래도 대단하네. 읽어보고 싶다."
"읽을 거면 사주고."
"당연하지!"
아이바는 어느새 다 내린 블랙커피를 니노미야 앞에 내려놓았다.
카푸치노 거품을 입가에 묻히며 마실 것 같은 비주얼이면서, 니노 진짜 어른 됐네. 잡생각을 조금 하던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조금 긴장해서 바로 섰다.
말없이 커피 잔을 들고 있다 몇 번 더 홀짝인 니노미야는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아이바. 장난 아니다."
커피 진짜 맛있어.
진지한 표정으로 몇 번 더 홀짝인 니노미야는 역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이바는 다행이라는 듯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맛없다는 줄 알았네."
"전혀. 진짜, 진심 맛있어."
입 짧은 니노미야가 그 정도라면. 아이바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는데. 오길 잘했다. 친구도 만나고, 커피도 맛있고."
그제야 니노미야는 찬찬히 카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정겹고 아늑한 게 딱 아이바다웠다. 뭔가 숲속 작은 카페 같은 느낌도 나고. 그때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를 둘러보던 니노미야의 시야에 익숙한 것이 들어왔다. 니노미야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이바도 같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계산대 옆에 작은 토끼 나무 조각상이 보였다.
"저거..."
"아! 저거 기억해?"
"응. 네가 수학여행 때 샀던 거잖아."
"카페 마스코트야."
"그래서 래빗 풋인거야?
어쩐지 뭔가 정감이 가더라. 니노미야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카페 래빗 풋.
몇 날 며칠 동안 고뇌를 하다 결정한, 아이바가 사 년 전에 연 카페의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까지 고심할 일인가 싶을 수도 있었지만 아이바에게는 아니었다. 행운이 가득하고,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만들고 싶었던 아이바는 결국 토끼와 관련된 말로 카페 이름을 결정한 것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바에게 토끼라는 동물은 좋은 뜻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였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토끼 발. 인연을 이어주는 흰토끼. 그리고 사실은 시바견을 닮았고 채소를 싫어했지만 어쩔 때는 토끼 같기도 했던 아이바의 첫사랑. 그와 함께 고등학교 수항 여행 때 샀던 토끼 모양의 작은 나무 조각상은 지금은 카페 계산대 옆을 지키고 있다. 나무 토끼의 입은 3자를 옆으로 눕힌 모양으로 니노미야와 똑같은 입매이다. 그때 아이바는 순전히 닮았다는 토끼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지나가던 가게 안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었다.
"그거 800엔이나 하는데."
니노미야는 차가운 시선으로 가격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시 나무 토끼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이바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 나무 토끼를 꼭 살 거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기요미즈데라의 바로 옆에 있는 거리는 기념품 가게로 넘쳐났다. 가게들은 각자 귀여운 상품들로 관광객들을 유혹했고, 아이바는 장사꾼들이 놓은 미끼를 덥석 문 물고기들 중 하나였다. 니노미야는 한숨을 쉬었다.
"네 마음이긴 하지만, 너무 비싸지 않아? 게다가 실용적이지도 않고."
"그치만! 입모양이 완전 니노인걸!"
이걸 어떻게 안 사! 이렇게 귀여운데!
빼액 빼액 울며 마트에서 장난감을 끌어안고 있는 어린이 마냥 토끼를 붙잡고 있는 아이바를 니노미야는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뭐, 사든가..."
"니노는?"
"나?"
니노미야의 얼굴에 굳이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여실히 드러났지만 아이바는 완강했다. 오늘은 수학여행 마지막 날이고, 이제까지 니노는 아무것도 안 샀고, 그래도 추억할 수 있는 기념품을 하나라도 사야 되지 않겠냐고, 자기도 이렇게 니노 닮은 귀여운 토끼를 사려 하지 않냐고 아이바가 열을 올리자 니노미야는 마지못해 선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의 고민 끝에 니노미야가 고른 것은 비교적 싼 토끼 키 링이었다.
"너랑 닮았어."
"내가 이렇게 바보같이 생겼어?"
"왜, 귀엽구만."
니노미야는 실실 웃으며 마름모꼴 모양의 입을 가진 토끼를 계산대 위에 올렸다.
"눈이 점인데... 나 눈 작아?"
"아니, 귀여워."
"아니이..."
니노미야의 대답에 귀를 붉힌 아이바도 꼼지락대며 나무 조각상을 계산대에 올렸다. 니노미야는 아이바 쪽으로 돌아보았다.
"이제 됐지?"
"뭐가?"
"기념품 샀잖아. 뭔가 서로를 닮은 걸 사긴 했지만."
"그러네. 되게... 연인 같네."
값을 치른 키 링을 보고 있던 니노미야가 고개를 홱 쳐들어 동그래진 눈으로 아이바를 쳐들어봤다. 아이바는 니노미야 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아까 인연의 신사에서 니노미야 앞에서 눈을 떴을 때와 같은 낯색이었다. 니노미야도 아이바를 따라 같은 색으로 귀를 붉혔다.
".. 그, 런가. 뭐, 그러네."
"니노미야! 아이바! 집합 시간 다 됐어, 빨리 가자!"
어색한 정적에 휩싸인 두 사람 사이에 반장의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어어, 하고 대충 대답한 니노미야는 먼저 반장을 따라가고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아이바는 얼떨떨해 니노미야의 뒤를 따라갔다. 심장과 함께 다리도 함께 떨려 후들거리다, 몇 발짝을 더 가니 이제는 한 걸음에도 날아갈 수 있을 만큼 기분이 하늘로 치솟았다. 방금의 분위기는 설마. 아이바는 어쩌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그 간지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수학여행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별 진전이 없었다. 니노미야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너무 평소같이 행동해서 오히려 선을 긋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그런 태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고 해도 망설이다 끝내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둘은 고등학교 내내 친한 치구였다. 가장 친한 친구. 그 이상은 아니었다.
졸업식 날이었다. 졸업 행사의 막바지여서 다들 돌아가는 분위기인 중에 니노미야는 별안간 아이바를 붙잡았었다. 그가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바의 손을 끌어와 펴서 쥐여준 것은 교복 단추였다.
"나한테 따로 받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아이바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니노미야의 가슴팍을 보았다. 두 번째 단추가 없었다. 아이바의 입이 벌어졌다.
"졸업 축하해."
니노미야는 특유의 그 유한 웃음을 짓고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서서 아이바가 붙잡기 전에 신기루처럼 수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바는 손에 단추를 쥔 채로 멍하니 섰다. 뒤늦게서야 니노미야를 따라가 봤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자기는 줘 놓고서는 남은 줄 틈도 안 주고, 홀랑 가버리고. 어쩌라는 거야.
너무한, 치사한 니노미야 카즈나리.
아이바는 졸업장을 꼭 쥐었다. 아이바의 주머니에는 미리 뜯어놓은, 니노미야에게 주려던 단추가 들어있었다.
아이바와 니노미야는 각각 다른 대학교로 진학했다. 아이바는 본가 주변의 대학으로, 니노미야는 좀 더 상위권 대학에 붙어 도시로. 연락은 간간이 하고 지내다 어느 순간 끊겼다. 니노미야가 동창회에도 잘 나오지 않아 소식을 알기가 어려웠다. 우연히 21살에 고향 여름 축제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아이바는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모습으로 다코야키 가게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니노미야는 애인을 데리고 놀러 왔었다. 애인은 무뚝뚝해 보였다. 아이바는 니노는 좀 더 다정한 사람이 잘 맞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니노미야와 오랜만에 대화를 나눴다. 그마저도 니노미야의 애인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티를 내며 니노미야를 끌고 가버렸기 때문에 짧게 끝나고 말았다. 그날 아이바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선반에 잘 모셔놓았던 토끼 조각상을 구석으로 몰아내버렸다.
사랑을 이뤄주기는 개뿔. 연을 이어주기는 개뿔.
아이바는 축제에서 만났던 니노미야를 떠올렸다. 여전히 니노미야는 참 예뻤다. 왠지 억울했다. 그 모습을 한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볼 니노미야의 애인이 너무 부러웠다.
역시 미신은 미신인가. 미신이 아니었어도, 토끼는 아이바가 원하는 대로의 운명을 만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나 보다. 아이바는 선반 옆벽에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완전히 니노미야를 잊기로, 단념하기로 다시 다짐했다. 첫사랑은 원래 안 이루어진 대잖아. 그렇게 생각한 아이바의 눈꼬리에 조그맣게 눈물이 맺혔다. 말은 그래도 잊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시간이 약이라고, 아이바는 영원히 니노미야라는 첫사랑에 갇히지는 않았다. 아이바는 여전히 운명을 믿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다. 믿기지는 않았지만 니노미야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어딘가에 내 운명은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여러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그 길고 짧은, 여러 번의 만남을 거치면서도, 진심으로 사랑을 했음에도 자신의 운명을 찾았다는 확신이 생기질 않았다.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는 기분인데다가 그럴수록 마음이 자꾸 니노미야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아이바는 운명 찾기도, 연애도 그만뒀다. 사랑을 할 마음이 다시는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니노미야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니노미야는 우연히 만난 그날 이후로 꾸준히 래빗풋에 놀러 왔다. 가끔은 책을 들고 오기도 하고, 노트북을 들고 와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카페에서 보내는 상당 부분의 시간은 잡담이긴 했지만.
"애인 많았었구나, 아이바."
"음, 뭐, 응. 그렇긴 하지만..."
"뭘 얼버무리고 그래."
니노미야는 팔락이는 책장을 넘기며 낮게 웃었다. 잡담을 하다가 애인 때문에 멜로를 자주 읽어봤다는 아이바의 말에 잠깐 연애 얘기가 나왔던 탓에 아이바의 연애 역사까지 대화가 흘러가게 되었다. 괜히 바람둥이처럼 보일까 봐 얘기 안 하고 싶었던 건데. 아이바는 입을 꾹 다물어 일자로 만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니노미야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바는 선반에서 커피콩을 내리면서 니노미야 쪽을 훔쳐봤다.
니노미야의 콧대에 얹힌 까만 테의 둥근 안경이 조명에 빛났다.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메두사라도 되는 양 흘긋 데다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눈이 마주치면 분명 또 바보같이 굳어서 별 기고만장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랐다.
살다 살다 안경 쓴 니노미야를 다 보다니.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위해 또 커피콩을 갈며 동그란 안경을 유행시킨 누군가에게 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아이바가 속으로 감격하는 와중 니노미야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부럽네."
"뭐가?"
"미련 없이 떠나보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게."
"그렇게 말하니까 바람둥이 같잖아..."
"그래도 헤어지는 게 무서워서 쓸데없이 이미 끝난 관계를 붙들고 있다가 다 같이 망하는 것보다는 나아."
갑자기 조금 거칠어진 니노미야의 말투에 아이바는 고개를 들었다. 니노미야는 자신이 주로 마시는 커피만큼이나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첫 번째는 거짓말쟁이에 집착이 심한 똥차였고, 두 번째는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갑자기 사랑이 확 식은 경우였고. 그래도 같이 몇 년씩 지냈던 걸 생각하니 화딱지가 난다, 진짜."
"몇 년?"
아이바는 경악에 차 미간을 구겼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반응이 웃긴 듯 낄낄댔다.
"바보 같지. 심지어 걔네 둘이 내 연애 경험의 전부야."
"..."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냥, 사랑을 시작하는 게 너무 무서웠던 마당에 얼떨결에 연애를 하게 되니까 이제 끝내는 게 무서웠나 봐."
"그럼 그, 두 번째 사람 이후로는..."
"사실 바쁜 게 더 컸어. 사랑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이 정신없었거든."
어쨌든 그래서 자기는 연애에 관해서는 누굴 놀릴 수가 없다며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 얼굴이 씁쓸하다. 니노미야는 똑똑하고 신중해서 반대로 답답하고 바보 같은 면도 있었다. 그 서툰 면이 바로 인간관계에 대한 부분이었고. 아이바는 조용히 니노미야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시커먼 블랙커피의 수면에 니노미야의 얼굴이 일렁였다.
"아니면 그 둘이 내 인연이 아니었던 걸 수도 있고."
"그럴 거야. 분명 니노 운명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좀 어린애 같다."
"낭만적이라고 하자."
아이바는 자기 몫의 카페 라떼를 들고 카운터에서 나와 니노미야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바 형태라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있는 모양이 되었다. 높은 의자에 앉아 잠깐 발 장난을 치던 니노미야가 불쑥 말을 꺼냈다.
"토끼가 연을 이어준다고 했었지?"
"연?"
니노미야의 말에 아이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응, 인연 말이야."
"뭐, 그렇지."
"나도 우리 수학여행 때 네가 했던 거 할 걸 그랬나. 그랬으면,"
조잘대던 니노미야가 입을 갑자기 싹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바."
"응?"
"13년 전에 말이야. 나 그때 좋아했어?"
달칵. 아이바의 커피잔이 컵 받침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이바의 눈이 컵 받침만큼 커다래졌다.
"... 알고 있었어?"
"그냥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럼 니노는 왜 모른 척했었어?
몇 년 동안 가슴속에 담아왔던 질문이 아이바의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다시 쏙 들어갔다. 누굴 놀리나 싶다가도, 그게 벌써 13년 전 일이라니 세월도 빠르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하긴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바의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니노미야가 알고는 있었다는 듯이 말해줘서, 얄궂게도 뭔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그때 니노미야가 왜 더는 다가서지 않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린 니노미야는 아마 무서웠던 것 같다. 영원히 고등학생인 것도 아니고, 대학교도 아마 다른 곳을 진학해서 헤어질지도 모를 텐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이.
"그럼 그때도, 내 생각 했었어? 인연의 신사에서."
니노미야는 턱을 괸 채 여태 손을 대지 않은 커피를 아직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바는 그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적의 유리같이 예민하고 불안정한 모습이 아직도 조금은 드러났다.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온전히 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졌다.
"그때, 내가 니노 앞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엔 망했다 싶었다가 나중엔 좋았다? 왠지 운명 같아서. 너에게로 향하려고 네 앞에서 눈을 뜬 것만 같아서."
"..."
"엄청 좋아했어, 그때. 운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니노미야는 말없이 계산대 옆 토끼 나무 조각상을 가져와 만지작댔다. 한참의 침묵 끝에 많은 생각을 거친 뒤 입안에 줄곧 굴리고 있었을 질문이 니노미야의 입 밖으로 겨우 나왔다.
"그럼 지금은?"
운명 아니야? 뒤의 생략된 말까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바는 눈치가 없는 편이었지만 니노미야의 표정은 아주 잘 읽었다. 무심한 척하려는 니노미야의 온 신경은 아이바를 향해 있었다. 아이바는 작게 웃었다.
"13년 만에, 래빗풋에서 만났잖아."
"..."
"그것도 난 운명이라고 생각해. 그때 토끼가 제대로 인연을 이어준 거였구나 하고, 이제야 알게 되었네."
내내 아닌 줄 알고 단념하고 있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른다는 게, 서른에 다시 만날 줄은 몰랐지.
아이바는 빙그레 웃었다. 보는 사람이 수줍어질 정도로 다정하고 간지러운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니노미야는 어쩌지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이바를 눈에 담았다.
"너 정말 여전하구나."
영문모를 니노미야의 말에 아이바는 고개를 기울었다. 니노미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커피잔에 떨어뜨렸다.
"좀 원망스럽지 않아?"
"뭐가?"
"그때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이제 와서 좋아했었냐느니 물어보는 거 말이야."
"... 밉지, 미운데."
팔짱을 낀 채로 말을 고르던 아이바는 잠깐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또 표정을 풀며 웃었다. 한순간에 모든 부정적인 것을 유연하고 풀어지게 만드는 웃음을 니노미야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난 척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너 앞에서는 항상 그렇게 되더라."
"..."
"그냥 다시 만난 걸로도 기쁘고, 적어도 내가 헛고생은 안 했다고 생각하기로 하니까 괜찮아. 그런데,"
아이바가 뜸을 들이자 니노미야는 불안해하는 빛을 보였다. 뭐 하냐는 니노미야의 눈짓에 아이바는 능청스레 다른 화제를 꺼냈다.
"니노는 다음 주 화요일에 뭐 할 거야?"
"화요일? 왜?"
"그때 카페 쉴 예정인데. 그날 나랑 같이 시간 보내지 않을래?"
그리고 나 요리 잘해.
뜬금없는 자랑을 동반한 데이트 신청을 받은 상대방은 당황해하며 눈만 도륵도륵 굴리다가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꼬시는 거야?"
"응."
"여전히 순진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니노미야는 손에 들고 있던 토끼 나무 조각상을 아이바 앞에 떡하니 내려놓았다.
"좋아."
기다릴게. 화요일에, 래빗풋에서.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놓은 토끼를 가져갔다. 연을 잇는 토끼는 용왕의 딸과 신 말고도 이을 연이 더 생긴 모양이었다.
화요일에 첫눈이 왔다.
눈이 와서 걷기 싫다는 니노미야를 첫눈이니까 걸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설득하는 데 성공한 아이바는 함께 동네를 걸었다. 니노미야는 말로는 투덜대지 막상 나오니 기분 전환은 되는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툴툴대는 것도 멈추고 겨울 분위기에 잠겨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아이바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걷다 보니 마을의 외곽에 있는 작은 신사까지 다다랐다. 아이바는 다 낡아서 떨어지기 직전인 낡은 신사의 표지판 앞에서 숨을 뱉었다.
"가볼래?"
"그래."
아이바 곁에 멈춰 섰던 니노미야가 먼저 발길을 옮겼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뒤로 작은 발자국들이 흔적으로 남는 것을 지켜보다가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앞서 걷는 니노미야는 그 길이 익숙해 보였다. 사실 자주 가던 길인 모양이었다.
"니노 여기 와 봤어?"
"응. 그냥 돌아다니다 보니 어쩌다."
대숲을 좁은 샛길을 통해 들어가니 그 끝에 작은 마당이 나왔다. 눈이 쌓여 보통 빨간 인상이 강한 신사가 새하얗다. 아이바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왜 이런 곳을 몰랐지.
"몰랐는데 여기도 인연의 신사더라."
"진짜?"
"응. 저것도, 사랑 점의 돌이고."
니노미야가 가리킨 낡고 작은 신사의 마당에는 굵은 매듭을 얹고 있는 바위가 두 개 떨어져서 박혀있었다. 기요미즈데라와 달리 아무런 표지판도 없어서 몰랐었다. 눈이 내리는 신사의 풍경은 고즈넉했다. 아이바와 니노미야는 말없이 나란히 서서 뿌연 입김을 뱉었다. 두 사람 모두 13년 전 수학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감정을 마음에 품은 채로.
신사의 마당에는 꼬마들이 먼저 다녀갔는지 눈토끼들이 다양한 크기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니노미야가 문득 말을 꺼냈다.
"아이바."
"응?"
"토끼 이야기 들려줘. 옛날이야기 있잖아."
아이바는 의아하다는 듯 니노미야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곧 입을 열었다. 인연의 신사와 토끼 전설.
"옛날 옛날에 육지에 토끼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아이바가 운을 떼자마자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팔을 잡았다. 아이바는 흠칫 몸을 떨었다. 니노미야 쪽을 돌아보니 그저 계속하라는 듯 눈짓을 주었다. 아이바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천천히 앞으로 돌려 이야기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아이바의 심장이 요동쳤다.
"... 그런데 어느 날 토끼는 태풍 때문에 외딴섬에 휩쓸려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토끼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팔목을 주저하듯이 닿았다가 조심스레 잡았다. 뿌리치려면 뿌리치라는 듯이.
"그래서 토끼는 섬 주위에 살던 악어들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분했던 악어들에 의해 온몸의 털이 몽땅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이바는 손목을 움직여 니노미야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아이바의 행동에 고개를 푹 숙인 니노미야도 손을 천천히 거두어갔다.
"지나가는 첫째 신과 둘째 신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두 사람은 모두 토끼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셋째 신은,"
그 순간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멀어져 가는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힘 있게 꼭 쥐었다. 니노미야의 눈이 화들짝 놀라 번쩍 뜨였다. 아이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토끼를 도와주었고 토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토끼는 용왕의 딸과 셋째 신의 인연을 맺어주었습니다."
아이바는 손을 벌려 니노미야의 손과 깍지를 끼었다. 누구도 서로를 바라보지 못해 두 쌍의 눈은 계속 앞 쪽만을 향하고 있었다. 손이 맞닿은 부분만 따뜻했다. 추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그렇게 토끼는 인연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어, 인연의 신사에 자주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 잘 기억하고 있네."
"그냥 안 잊히더라."
시시한 이야기인데도. 그치?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말에 픽 웃었다. 이번에는 니노미야가 아이바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어떤 결심이 묻어나는 듯한 힘이었다.
"있지, 아이바. 나 그거 해 보고 싶어."
"뭐를?"
"사랑 점의 돌... 그 미신 말이야."
13년 전 아이바가 기요미즈데라에서 했던 사랑 점 돌의 미신. 맞은편 돌이 아니라 니노미야 앞에서 눈을 떴던, 그때 그것. 아이바가 니노미야의 의중을 파악하기도 전에 니노미야는 이미 바닥에 박혀 있는 두 돌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뒤따라가 그 주위에 섰다. 니노미야는 한 쪽 돌의 곁에 서서 눈을 감았다.
13년 전 아이바와는 달리 니노미야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신중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넘어질라 그 걸음을 잠자코 주시했다. 가볍게 걷는 조그만 몸이 꼭 눈토끼 같았다.
니노미야는 어느새 절반을 넘어서 걸은 상태였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완주가 절실했다. 사실 운명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이미 이어진 운명일 터이다. 다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니노미야의 확신만이 남아서. 그게 가장 절실했던 것이다.
그 순간 니노미야가 정확히 맞은편 돌에 닿았다. 아이바는 그 모습에 활짝 웃었다가, 이어지는 니노미야의 행동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잘 가놓고서는,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아이바 쪽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바는 엉겁결에 니노미야의 이름을 불렀다.
"니노!"
그 소리에 한 발짝을 더 가려던 니노미야의 발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어 넘어지려 해서 아이바는 한달음에 달려가 휘청이는 니노미야를 두 팔로 잡았다. 그제야 니노미야는 눈을 떴다. 제 앞에 있는 아이바를 보자마자 니노미야는 천진하게 웃었다. 아이바의 팔에는 어느새 고등학생의 니노미야가 있었다.
"그때랑 비슷하다, 그치."
영문을 몰라 아이바가 여전히 눈만 끔뻑여서 니노미야는 스스로 반쯤 쓰러져서 안긴 몸을 일으켰다.
"내 앞에서 눈을 뜬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면서."
"... 응."
"그래서 나도 네가 내 운명이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어."
이미 운명이긴 하지만.
니노미야는 이번에는 자의로 아이바의 품에 안겼다. 추위 때문이 아닐지도 모르는 새빨간 귀가 아이바의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아이바도 웃을 수 있었다. 사랑스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니노미야를 안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니노미야는 맑은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해 자신과 아이바의 얼굴을 가까이했다. 추위에 빨개진 두 코 끝이 가까워져 닿았다. 더 가까워질 수 있었지만, 그건 아이바가 재채기를 해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나중으로 미루어졌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목을 안고 킥킥댔다. 아이바는 멋쩍게 웃으며 니노미야의 허리를 안았다.
"집에 가자 이제. 맛있는 거 해줄게."
"응."
아이바의 제안에 니노미야는 아이바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아이바가 내미는 추위에 발개진 손을 잡았다. 차가운 기운이 두 사람분의 체온에 의해 녹았다. 둘은 신사를 뒤로 한 채 래빗풋으로 향했다.
옛날이야기 속 보송보송한 새 토끼 털만큼 흰 눈이 여전히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