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TE.
콩식빵
카메라에는 파도가 찍혔다.
셔터소리는 이미 익숙해진 참이었다. 카메라에 달린 손목 스트랩은 해풍에 흔들리고, 화면을 확인한 니노미야는 다시 렌즈에 눈을 붙인다. 유리 너머로 가공된 푸른 빛과 하얀 포말의 옆에는 동그란 뒤통수가 있었다. 화면으로는 어렴풋한 느낌으로만 볼 수 있는, 붉은 글자가 새겨진 뒷목이 카메라의 너머로 돌려진다. 이름을 길게 부르는 목소리는 바람소리보다도 익숙한 것이었다. 다시, 셔터소리.
절벽에는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도록 계단이 만들어져있다. 성수기를 살짝 비껴간 8월 막바지의 관광지는 그런대로 여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햇볕에 달궈진 자갈들이라던지, 반바지를 포기하지 못한 관광객들이라던지. 내려갔던 계단을 도로 올라오는 긴다리에 카메라를 내린 니노미야가 마저 화면을 확인한다. 어딘가의 산수화처럼 웃는 얼굴은 푸른빛의 조연이 되어있었지만,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치고는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만족하고 화면을 내리자마자 옆얼굴이 시야에 뛰어든다. 바다 찍었어? 신난 톤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온다. 응.
1박 2일의 여행은 명분상의 졸업여행이 되어있다. 졸업여행을 둘이서 가? 튀김을 한쪽 볼에 가득 넣고 씹던 친구의 말에는 가볍게 긍정을 돌려줬다. 사실 졸업여행이라는 것도 웃긴 이야기였다. 여름에 가는 대학 졸업여행이라니. MT도 아니고, 둘 중에 여름에 졸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구나 했다. 의문도 없었고. 그래서 졸업여행이 됐을 뿐이다.
도쿄보다 남쪽에 있는 해변마을은 한여름이면 튜브와 수영복을 가진 외부인이 가득 들어차고는 한다. 아이바는 어렸을 때 가족여행으로 이곳을 찾아온적이 있었고, 미아가 될 뻔 했다지만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다고 했다. 어쨌든 바다가 예뻐. 앞에서 턱을 괴고 했던 말에 니노미야는 별 이견 없이 숙소를 알아봤다. 1박짜리에 편의시설 이용은 빼고, 나머지 관광코스는 아이바에게 맡기는 일이 되어서 신칸센을 알아보고. 예산은 1인당 2만엔 정도로.
카메라를 아이바에게 건네주자 손목 스트랩에 가려져있던 글자가 드러난다. 신기하게 화면 옆의 버튼을 눌러보던 아이바는 자기도 찍어보겠다고 카메라를 든채 다시 내려가고, 니노미야는 그제서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비린내와 단순히 소금기만 있는건 아닌 바람이 피부를 적신다.
누군가 덜 뾰족한 것으로 살을 긁어놓은듯이 부풀어오른 니노미야의 이름은 짧은 뒷머리에 가려지지 않은채였다. 어린애처럼 셔터를 찰칵대다가 화면을 보고, 다시 찰칵대고. 같은 바다인데 몇 장이나 찍으려는건지, 소리만 들으면 전문가 같다. 배터리 닳는다고 괜히 핀잔을 주면서도 니노미야는 자갈을 줍고 있었다. 둥글게 깎이지 못하고 모난 돌은 바닷물을 칠한채라 차갑다. 해변에서는 아이바가 조개를 주웠는데. 자갈은 조개보다 무거울테니 갖고가는건 좀 힘들 것 같았다. 내려놓는 대신 파도의 뒤로 던지자 아이바가 돌아온다. 무의식적으로 손목 안쪽의 글자를 긁던 니노미야는 들키지 않게 손을 내리고, 잘찍은 것 같다며 뿌듯하게 내미는 화면에는 정말 그럴듯한 그림이 찍혀있다. 의외인데. 괜한 말을 하는 옆에서도 그치, 하고 웃어버리는 입꼬리가 있다.
“좀 더 걷다가 갈까? 배고프면 그냥 올라가도 상관 없는데.”
시간은 5시 정도였다. 그래도 점심을 꽤 일찍 먹었으니까, 아이바가 치열하게 고민하여 골랐다던 라멘집을 찾아 절벽을 올라가도 상관없을 시간이다. 먹고 싶었던 특산요리를 파는 음식점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절벽이 가까우니 결국 라멘집이 이겼다는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해안가 근처의 특산요리가 해산물일것은 당연하니 그것 때문일것을 안다. 변명이라도 붙이지 않으면 상관 없으니 가자고 할테니까.
그렇다고해도, 이 해안절벽은 꽤 볼만한 곳이었다. 바위벽에 부딪혔다가 부서지는 파도는 해변에서 봤던 것보다 높고, 생각보다 길도 잘닦여있다. 아이바가 어렸던 시절에는 여기부터 저기까지가 전부 방파제와 덩굴 식물이어서, 건너편 절벽 위에서 봐야했다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관광 때문인지 자갈과 방파제 사이로 시멘트 길이 나있어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물과 가까워서 그런지 위보다 더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거기다 말은 그렇게해도 걷고 싶은게 티나니까.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결정에 그럼 그러자고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고는, 몸을 돌려 시멘트 길로 올라갔다. 손이 스쳤지만 잡는 일은 없다. 니노미야는 따라서 길에 올랐다가, 돌려받은 카메라로 정면을 좀 더 찍었다. 카메라에 나오는 뒷모습은 가장자리에서 의미없이 균형을 잡고있고, 셔터소리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까보다 거리가 가까워서, 찍은 화면에는 좀 더 선명하게 이름이 있다. 제 손목 안쪽에 새겨진 아이바의 이름을 놔두고 니노미야가 휘청이다 겨우 균형을 잡는 몸을 다시 카메라에 담는다.
-알고 지낸지는 2년이 조금 넘는다. 방파제에 부딪힌 파도가 뿌린 물을 얻어맞을뻔하고 가장자리에서 벗어난 아이바는 앞서 걷는걸 그만두고 니노미야의 옆으로 돌아왔다. 부드러운 갈색에, 단정하게 잘려있는 머리는 숨김이 없어서, 오히려 처음 봤을때의 기억을 불러온다. 저기까지만 걷고 돌아가자. 간이등대까지 이어진 끝을 가리키는 손이 길어서 니노미야가 스트랩을 반대손목에 걸었다. 뛰면 안된다.
2학년 때 편입해서 들어간 대학은 집에서 통학할만한 거리에, 그럭저럭 교정이 관리되어있는 곳이었다. 아이바는 동기였고, 겹치는 전공수업을 들을때까지만 해도 니노미야의 손목에는 아대가 감겨있었다.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만 뒷머리를 길러놓은 아이바와 마찬가지로. 옆에서 걷는 아이바는 알바처의 매니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파도소리 사이로 니노미야의 대답이 섞였다.
니노미야는 교수님이 출석을 부른답시고 아이바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와, 제 이름이 불렸을 때 뒤를 돌아본 아이바의 눈을 잊지 못하겠지만. -되도록이면 다른 추억도 있으면 한다. 그게 이번 여행을 온 이유의 전부였다.
“사쿠라이네.”
등대를 앞둔 아이바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괜찮겠냐는듯 쳐다보는 시선이 웃겨서 손을 저어준 니노미야가 길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바위의 틈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에 샌달을 벗어 옆에 두고, 발끝만 닿도록 다리를 내린다. 아마 인내심의 한계였을 것이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손톱을 씹었을테니까.
네임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눈을 감고 듣는 파도소리는 이어폰에서 나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였다. 아이바가 옆에 있으면 왼쪽 손목이 가렵고, 아대로 가리면 더 심해지는것 같다. 그게 착각일 뿐일지라도, 니노미야는 같은 이유로 아이바가 머리를 잘랐다고 믿었다. 아이바는 숨기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잘랐다고 말했었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치 흉터같은 글자들은 운명의 상대의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 생길때는 그 부분이 누가 펜으로 긁는것처럼 따갑고 가렵다가, 다 완성되고 나면 얼마간 화끈거린다. -니노미야는 그걸 고등학생때 겪었다.
그림 속에 글자가 있으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읽으려한다. 시도때도 없이 눈에 띄는 손목의 글자를 좋아해본적은 없었다. 글자가 떠오를때는 자꾸 긁게 되어서 덧나기도 했고, 아무것도 없는 피부를 긁는 니노미야의 버릇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시선도 싫었다. 완성된 글자는 애매한 이름이었다. 들어본적도 없고 어디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한자로 된 네글자.
돌아온 아이바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걱정이 많은 것 같아. 전화내용을 요약한 말에 웃어버린 니노미야는 카메라를 들어 마저 바다를 찍었다. 날씨도 파도도 흠잡을 곳이 없는 날이었다. 일기예보를 본 기억은 없으니 분명 행운인거겠지.
일어나서는 다시 끝까지 걷고 돌아가서, 걸어서 갈 거리에 있는 라멘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나와서 산책이랄 것도 없는걸 한다. 돌아가는 차편이 올 때까지의 시간 죽이기였다. 벼랑쪽으로 울타리를 낸 까페가 있길래 그곳에 들어갔다가, 주문을 하고 온 사이에 빼앗긴 카메라에는 니노미야의 모습이 몇 번 찍혔다.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아이바가 화장실을 갔을 때 본 사진들에 찍힌 손목이 괜히 신경쓰였다. 진동이 울린 휴대폰에는 참견쟁이의 문자가 찍혀있다. 고백을 하긴 하는거야?
운명 같은 것에 환상은 없다. 휴대폰을 반대로 엎어놓은 니노미야가 창문쪽으로 나있는 테이블에 엎드려 눈만을 밖으로 내놓았다. 별에 새겨져 피할길이 없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어떤 길. 운명론을 이리 포장하고 저리 포장한 수많은 컨텐츠들을 소화하면서, 니노미야가 내놓은건 기껏해야 자기들 좋을대로라는 감상 정도였다. 숙명과 사명 같이 무겁고 운치있는 포장을 하던 시대가 있는가하면, 반드시 이겨내야만 하는 불합리하고 거대한 적처럼 묘사되는 시대가 있다. 그것도 그냥 유행이었다. 결국 운명이 마음에 들면 그냥 받아들이고, 아니면 거스르고, 하고싶은대로 하는게 전부다.
그러니 네임도 그냥 그런거라고. 그러니까 네임의 상대도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해야할 일이나, 하면 안되는 일들처럼 마주치고 나면 알게될거라고 생각했다. 거스를지 아니면 받아들일지. 정말 운명이라면, 눈을 마주치면 알거라고. 온갖 생각을 낯간지럽다고 밀어놓으면서도 단순히 그것만은 확신하고 있던 모순 투성이의 밤들이 있어서.
“얼음 녹는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아이바는 바닷바람 때문에 거칠어졌던 머리를 정리한채였다. 저도 머리를 정리하고 와야하나, 괜히 신경쓰여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던 니노미야가 곧 포기하고 유리컵을 집어들었다. 너무 달아서 청량감마저 반감된 에이드는 아이바의 말대로 얼음이 녹아 컵표면에 물기가 묻어있었다. 장식으로 넣은 페퍼민트의 잎을 괜히 빨대로 밀어보는 동안 아이바는 창문을 통해 바다를 봤다. 어제부터 질리도록 보고 있는데, 정말 질리지는 않는지 또 파란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했던건 니노미야의 말이었다. 30분도 걸리지 않은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의 빈 복도에서. 이름을 확인한 후 서로 힐끔대기만 하고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던 그 시간에.
“숙소 돌아가기 전에 해변 걸을거야?”
아이바의 잔은 이미 비워져 있는 상태였다. 니노미야는 바깥으로 이어져있는 계단에서 올라오는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버스에서 앉아가면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냈다. 멋대로인 답에도 야시장의 이야기를 꺼내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이야기는 들뜬 목소리의 주인공 때문에 반대로 빠져나가지 않고 귀 안으로 고인다. 그러고도 얼음을 휘젓는 빨대가 고루해보이면 금방 화제가 바뀌고.
잘 모르겠어서 그랬다.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치면 이 사람이 제 운명인지 아닌지, 곁에 둘만한 사람인지 한 번에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에 들어오는건 뒤가 살짝 긴 머리와 어색한 시선과, 자신과 마찬가지로 헤매고 있는듯한 표정 뿐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듯한. 그래서 그냥.
현실은 미디어가 아니라서, 소설이나 만화와는 다른 것 투성이다. 운명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랑에 빠지는듯한 낭만적인 일은 없고, 거스르겠다고 선언했다고 그게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아이바는 습관처럼 뒷목에 올린 손을 내렸다가, 알겠다고 했었다. 그러는게 좋겠네요. 동기라는 것조차도 모르는때였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뺨을 긁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는 듯이.
버스에는 자리가 딱 하나 비어있었다. 발견하자마자 니노미야의 등을 밀어 자리에 앉혀놓고 앞에 선 아이바는 지치지도 않고 다른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원래 말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사실 아이바는 말이 많은 편도 아니다. 그냥, 어제부터 들떠있는 텐션의 영향일 뿐이었다. 여름바다에 들뜬 것인지, 아니면.
다른 빈자리가 났는데도 니노미야와 얘기를 하느라 내내 서있던 아이바는 옆자리가 비어서야 다리를 굽혔다. 와, 버스에서도 계속 바다네. 드디어 창문쪽으로 돌려진 시선 뒤에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 니노미야가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소리가 들려서야 다시 고개를 돌린 아이바가 뭐냐고 웃어버리는 얼굴이 뒤로 햇볕을 받아서. 이 몇년간은 그걸 좀 피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니노미야도 눈을 마주친채로 웃는다. -그냥.
잘모르겠다. 부정하려고도 해봤다. 니노미야는 그렇게 금방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타입이 아니었다. 감정이라면 더더욱 느리고. 단순히 제 의지도 아닌 것으로 새겨진 이름 때문인건 웃기다고 생각한적도 있다. 끝이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던 빨간 실과, 제 이름을 만지는 버릇이 있는 상대와, 간지러운 제 손목. 겨우 그런것들에 기인한 감정이라면 너무 진부하다고.
절벽의 관광지에서 호텔이 있는 해변까지는 버스로 40분 정도가 걸린다. 아이바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떠들다가, 휴대폰을 좀 만지다가, 카메라를 빌려가 창문을 또 찍다가, 니노미야가 게임을 하는 동안 카메라에 찍힌 다른 사진들을 넘겨다봤다. 그리 고상하게 센스가 있는 사진들은 아니었지만, 곳곳마다 아이바가 찍혀있었다. 그러면 또 습관처럼 뒷목이 만져지고. 니노미야는 그런걸 못본척 한다. 지난 2년간 그랬던것처럼.
“다음 정거장이다.”
바다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시골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 몇 블럭을 통과하기만 해도 호텔이 나오고, 그 전에 천막을 치는 야시장이 보인다. 파는것들은 도쿄의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과 별차이 없는 것들이겠지만. 사실, 아직 해도 지지 않아서 준비중인걸로만 보였다. 어쩌지. 고민하는 아이바를 지나쳐 니노미야가 모래밭으로 향하면 자연스레 걸음이 따라간다. 영원히 지지 않을걸로만 보여도 30분만 있으면 금방 석양이 질 해변에 샌달을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수영복 가져올걸 그랬나.”
들어갈 생각이라고는 한치도 없었지만, 그냥 꺼내본 말에 아이바가 깔깔댔다. 요즘은 추워.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 바다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니노미야는 원래 밖에서 돌아다니는걸 안좋아하니까, 수영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바다여행을 온것만으로도 놀랄 노자인걸. 하자고 했으면 무리할 필요 없다고 말렸을거라는 말에 니노미야가 눈썹을 내린다. 너무 잘안다니까. 겨우 2년인데.
일부러 알고 있는거니까. 발자국이 금방 덮이는 모래밭을 걸으며 아이바가 그렇게 말한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지만, 니노미야도 딱히 그럴듯한 답을 내지는 못했다. 그렇지. 평소라면 그런 말은 안했을텐데, 졸업여행이었다. 니노미야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제안했던 바다였고. 그러니 이쯤은 괜찮다.
곧 해가 지는데도 활기차게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공을 던져주고 나서는 적당히 앉을 곳을 찾았다. 관광지의 해변에는 벤치가 많아서 좋았다. 계단 위의 편의점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물고는, 바닥에서 들린 발 밑으로 모래가 쏟아졌다. 숙소 들어가기전에 씻고 가야겠네. 시덥잖은 말에 제 발도 들어본 아이바가 웃어버린다. 그러게.
“졸업하면 뭐할거야?”
아이스크림의 종류는 팝시클이었다. 샤베트처럼 부서지는 딸기맛이 입에 들러붙어서 니노미야의 답이 좀 늦어진다. 취업준비. 대단한 예정이 있는건 아니었다. 자격증 따고 자소서 쓰고, 학원 다니고. 니노미야는 그렇게 안보여도 성실해서, 이것저것 해놓은게 있으니 사정이 좀 나을터였다. 빈 입의 안으로 다시 아이스크림이 들어찬다. 너는? 호주 가면 뭐할건데?
침음이 나온다. 영어랑 일 배우는거지 뭐. 유학 경험 같은건 쌓을 수 있을 때 쌓아야한다. 외삼촌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정도에서나 한 번 봤을 뿐이지만, 기억에 없는 어린시절에는 아이바를 예뻐했다는 모양이었다. 일도 소개시켜주고 집도 거기서 지내도 괜찮다고 했다. 한 번쯤은 갔다오는거지. 친척 잘둔덕은 봐야하는거 아니냐고 하길래, 아이바도 거절하지 않았다. 뭐든지 이력서에 한줄 쓸 수 있으면 그걸로 괜찮은거니까.
그래. 딱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나온건 두글자가 다였다. 부럽다던가 잘됐다던가,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잔뜩 들었을테니 니노미야가 할 필요는 없다. 니노미야는 그 소식을 사쿠라이에게 먼저 들었는데, 단순히 사쿠라이가 기다리지 못한게 이유의 다였다. 말하려고 했었다는 아이바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니노미야는 그냥, 침묵하다가. 진짜로 가는거냐고 한 번 물었을 뿐이다.
석양은 짧았지만, 수평선에 걸려있으니 도시보다는 그림이 되었다. 니노미야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그걸 몇 개 찍었다가 카메라를 아이바에게 주었다. 받아든 아이바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걸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한장만. 장난치듯이 손가락 하나를 세우고, 셀프 모드로 전환된 카메라 어플을 들이밀어 니노미야의 눈썹이 내려갔다. 잘 안찍는걸 아니까 한 번만 같은 이야기를 하는거라 자세도 표정도 좀 어색했지만. 그러고보면 투샷 같은건 한장도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갈아서 카메라를 쥐었으니.
못해도 2년 후에는 돌아온다. 천막들도 웬만큼 펴졌고, 옆에 달린 전등들도 불을 밝히는듯 해서 아이바와 니노미야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바다와 하등 관련 없는 것들이라도 볼만은 해서, 괜히 타코야끼 같은걸 손에 쥔 아이바가 별거 아닌거에도 감탄을 냈다. 아예 호주에서 사는것도 아니니까. 니노미야도 취업준비를 하다보면 2년은 금방 지나가버릴거고, 그러니 그렇게 길게 떨어져있는것도 아닐지 모른다. 낯간지럽게 들이밀어지는 타코야끼도 별 불만없이 받아먹은 니노미야가 반죽을 삼켰다. 알고 있지만. 둘은 바다에 있다.
“둘 중에 어떤거?”
든 가면은 우스꽝스러운 요괴의 모양이라 니노미야가 깔깔댔다. 하얀 오니는 아이바가 쓰고, 붉은 야차는 니노미야가 써서, 많이 팔라는 덕담도 잊지 않는다. 가면 같은걸 매단건 초등학생들 정도였다. 저녁 안먹어도 돼? 그래봤자 숙소에서 배달음식을 시킬 생각이었지만, 또 야끼소바 집을 기웃대는 통에 절로 엄한 소리가 나갔다. 아쉬운 얼굴을 한 아이바는 옆 점포의 끈팔찌에 또 눈독을 들여서는 니노미야의 손목을 잡았다. 한 번만 보자. 무의식이었는지는 몰라도, 체온에 감싸여진 이름이 간지러워져 니노미야가 그냥 입을 닫고 발을 옮겼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네임이 있고,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붙어다닌다. 같은 동기인 사쿠라이는 그게 뭐냐는 표정을 했다. 특별한 사이인지 아닌건지, 이만큼 끌었으면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것 뿐인데. 돌아온 답이 그런식이면 더 기함할만도 했다. 네임? 확인시켜줄 수도 없지만 사쿠라이와도 알게된지 1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니노미야가 그런 낭만적인 소문을 위조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었으니까.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는 말을 할 때의 니노미야는 이미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붙어다닐 생각은 아니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아이바의 탓이 컸다. 어색해하며 손목을 가리는 니노미야에게 항상 먼저 말을 걸어서, 그냥 천성이 그런거라고 생각하고 넘기고 넘기다가 어느새.
인터넷에는 꼭 연인인채로 지내는 사람들만 있는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밥을 한가득 입에 밀어넣은채로 했던 아이바의 말이다. 찾아봤는데 그랬다고. 그러니까 지금 상태로도 문제 없다는 요지의 말이었는데. 그것까지 전해들은 사쿠라이의 얼굴은 기묘했다. 그런걸 왜 굳이 찾아봐? 괜찮으면 그냥 지내면 되지. 뭐하러 그런걸.
“갖고 싶으면 사.”
가죽끈을 중심으로 여러겹의 실이 겹쳐진 팔찌는 아이바의 취향범위로 보였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아이바는 고민하다가 색이 다른 옆쪽의 팔찌를 함께 들었다. 어울릴 것 같은데. 대보는게 제 손목이어서 니노미야는 눈을 깜박이고.
잘 모르겠다. 친구로 지내는게 낫겠다는 말을 했을 때의 아이바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로 별달리 네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적은 없었다. 만난지 얼마 안되어서, 한 세 달 후에 머리를 깔끔하게 자르고는 가끔 버릇처럼 만지는게 다였다. 손목에 있는 글씨와 달리 니노미야의 이름은 거울이 두개라도 있지 않으면 보기 힘든 위치에 있다. 언젠가는 부럽다고 말했었는데. 아마 단체로 나온 술자리에서 조금 취한채로 말했던것 같다. 아이바가 너무 오래 쳐다봐서 눈을 깜박였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도 얼마안가 웃으면서, 그런가, 하고 말하고는 화제를 다른것으로 돌렸을 뿐이다. 니노미야도 그 이후로 네임에 대해 말한적은 없다.
“두개 사자고 하면 싫어할거야?”
미련있게 만지작대다가 나온 말에 니노미야가 아이바가 처음에 집었던 팔찌를 봤다. 두개. 닫히는 작은 입을 힐끔대는 눈이 약간 긴장한 빛을 띄었다. 당연히 두개를 사서 전부 니노미야에게 주거나, 아이바가 가진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우정팔찌로 할거냐는 눈치없는 노점인의 말은 무시한 니노미야가 옆의 것도 집었다. 계산할게요.
특출난 사이는 아니다. 시간이 맞아서 붙어있는게 전부다. 네임은 있지만 감정은 없다. 사쿠라이는 반복되는 일련의 변명 같은 말들을 가늘어진 눈으로 봤다. 너는 그렇다치고. 아이바는 안그런거 확신해? 니노미야는 그 말에 바로 답을 할 수도 없었다. 1년도 더 전부터.
끈팔찌는 끝을 묶는 방식이라, 선채로 혼자 차는건 조금 힘들었다. 아이바의 손목에 가죽을 묶어준 니노미야가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망설이는 아이바에게 오른쪽 손목을 내밀었다. 야시장의 불빛에 선명히 올라오는 글자에 아이바의 눈이 고정된다. 끈을 감는 손끝이 살짝 떨리는것처럼 보였다. 니노미야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금방 추워지네.”
전부 먹어버린 타코야끼의 포장지는 비닐로 들어가고, 바다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전부 나오고 있었다. 해는 수평선 너머로 겨우 고개만 내밀고 있고, 파도소리가 온도를 더 낮추는것만 같다. 여행이라고 해도 티셔츠에 반바지였다. 멋을 부리는건 정말이지 낯간지러웠던 탓이다. 크레이프를 든 아이바는 금새 눈썹을 내리고는 이만 숙소로 들어가는게 좋을지 물었는데. 3시간은 더 돌아다닐 수 있을텐데도 그런말을 하는게 웃겨서, 니노미야가 주변을 둘러봤다. 저것만 사서. 해변에 30분만 앉아있다가 가자.
아까 생략되었던 야끼소바였는데. 사가면 저녁은 안먹게 될거라는걸 알면서도 아이바가 발걸음을 옮겼다. 군것질로 떼우는 것도 여행이니까 상관 없었다. 니노미야가 허락한다면야 더더욱.
분위기를 잡고 차가워진 모래사장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설치된 무대에는 조명이 들어와 무명의 가수들이 마이크를 잡고있는데, 파도소리는 줄어들지도 않는것 같다. 돗자리를 가져온것도 없어서 그냥 물이 닿지 않을 곳에 앉자 아이바가 젓가락을 건넸다. 플라스틱 포장용기에 담긴 야끼소바는 도쿄의 것보다 이유없이 맛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입에 넣으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내일 몇시에 일어나야하더라?”
”8시쯤.”
기차 시간은 11시로 예약해놓은 참이었다. 여기에서 기차역까지 가는시간은 얼마 안걸리니까, 혹시 피곤하면 9시라도 상관 없을거라는 말에 아이바가 침음을 낸다. 좀 일찍 일어나서 어딘가 갔다올까 했는데, 그건 안되겠네.
생각해놓은 곳이라도 있어? 여행이라고 해도 겨우 1박이어서, 하루를 자고 나서의 일정은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다. 딱히 그런건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바는 야끼소바의 포장도 뜯지 않은채였다. 아까 감은 끈팔찌를 괜히 만져보다가, 샌달을 벗어둔 아이바가 맨발을 모래에 넣는다. 겉은 차가웠는데, 밑은 아직 낮의 열기를 가지고 있는듯했다. 해가 지고나서는 아까만큼 말이 많지 않은 아이바를 힐끔대던 니노미야가 면을 목 뒤로 삼킨다.
“그냥. 뭔가 더 하고 가고싶어서.”
오기 전에는 이정도면 많이 돌아다닐거라고 생각했던 계획도, 끝나고나면 아쉬워진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몰라서 그런걸수도. 장식용처럼 몇 개가 버무려진 새우를 집어 입에 넣은 니노미야가 마지막일건 뭐냐는 말을 낸다. 아이바는 웃는 대신 제 야끼소바를 닫고 있는 고무줄을 빼고.
되게 평범한 맛이네. 아까 제가 생각했던 감상을 그대로 들은 니노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못먹을 맛은 아니지만. 젓가락을 문 아이바가 애매한 거리로 앉아있는 옆을 보다가, 시선을 내린다.
“있지, 뭐 물어봐도 돼?”
축제가 아니니 불꽃 같은건 없다. 앞은 바다이니 가로등은 뒤쪽에만 있어서, 별다른 조명도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서핑 같은건 하지도 못할 얕은 파도와 사람들의 소리가 섞일 뿐. 니노미야는 젓가락질 몇 번으로 없어진 야끼소바의 내용물을 긁었다. 뭔데.
밝게 돌아다니며 바다 타령을 하는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을 때면 충분했다. 아이바는 여행 이야기에 상당히 들떠 있었지만, 기차에서만 해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내내 생각하던 것들이 있다. 어쩌면 기차나 여행 계획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니노미야도 알고 있는것들이어서, 그래서 갑자기 나온 둘뿐인 졸업여행이었다. 계기를 만든다고 하면 좀 웃기지만.
“왜 여행 같은거 오자고 한거야?”
이런식으로, 시작하기 적절하게끔 온 것이다. 니노미야는 다먹은 야끼소바의 포장을 덮고는 모래밭에 두었다. 아이바가 비행기를 타는건 내년의 봄이었는데. 이 시기에 갑자기 취향에도 맞지 않을 바다여행을 제안한 이유를 물어봐야만 한다. 아이바가 생각하는게 맞을지, 어쩌면 똑같을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해서.
나올 질문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답을 생각해놓은건 아니다. 정확히는 어떻게 전해야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고르고 고르는 문장들은 낯간지럽고, 불쑥 꺼낼 수도 없을만한 이야기들이라. 쉽게 답을 내지 못하는 니노미야를 보던 아이바가 제 야끼소바도 내려놓고는 모래사장에서 좀 더 편하게 앉았다. 팔을 뒤로 뻗어 등을 지탱하고, 다리는 펴서.
“간지러워?”
주어는 없었으나 니노미야의 눈은 제 손목을 향했다. 원래도 맥박이 울리는 자리에 써진 한자의 위를 팔찌가 가로지른다. 이제는 적응 되어서, 굳이 간지럽다고 말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다친 것 같은 겉모습이다. 이 상처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니노미야와 아이바 뿐.
나는 좀, 간지럽던데. 뒷목을 덮는 손이 조금 어색하기도 그렇다. 네임에 대한 이야기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다. 서로 알지만. 그 얘기를 하러 온거라고 해도 과장은 아니니까. 언제나 먼저 용기를 내는 쪽이 심호흡을 한다.
“처음에는 잘 읽지도 못했어.”
뒷목에서 손을 치운 아이바가 니노미야의 손목을 가져온다. 언제나 한 번쯤은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살이 부풀어 오른 곳은 언제나 체온이 1도씩 높은 기분이다. 아이바 마사키. 니노미야는 낯선 엄지가 살의 겉을 문지르는 것을 방관한다.
니노미야 카즈나리. 고등학교 2학년의때였는데, 뒷목이 계속 간지럽고 따가웠다. 화끈거리는 것은 손을 올리고 긁던 것이 덧난거라고만 생각했다. 밖에서 놀다보면 다치는건 으레 있는일이어서, 무릎이 까진 상처마냥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쉽게 가라앉지 않으니 만져보는게 습관이 되었다가 어느날 세면대에서 손거울을 하나 더 들었다. 글자가 선명한걸 봤을때는 한차례 소름이 있었다. 뭐야. 이거.
손목처럼 보이는 곳에 있지 않으니 글자가 완성 되어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거울을 내리고 손으로 더듬어본 글자는 처음보는 조합이었다. 엄청 특이하지도 않았지만 본적 없는. 그리고 아이바는 그 이름을 카즈나리라고 읽었다.
“카즈야가 아니라?”
“응.”
카즈야라고 읽는건가. 누가봐도 이름 같은 조합이었으니 생각하다가,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로 히라가나가 써있는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감으로. 사실 강의실에서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반신반의 하고 있었다. 카즈야라는 이름은 그럭저럭 흔했지만, 카즈나리라고 읽는건 조금 특이하니까. 니노미야 카즈야라는 사람이 먼저 나타났다면 그사람이 네임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방학때문에 실컷 퍼졌던 몸을 끌고 나온 오리엔테이션에서 이름을 들었을 때는 확신했다. 돌아봤을 때 저를 보고있는 니노미야와 눈이 마주쳤을때는 더더욱.
어떤 사람일지 내내 생각했다. 2학년때 제 뒷목에 있는 것이 네임이라는걸 알았을때부터 계속이었다. 아이바는 책을 읽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로맨스라면 별로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운명의 사람이래. 농담이라도 하는듯이 깔깔대며 친구들에게 말하는 일도 흔했다. 전까지는 연애 같은것도 평범하게 했었는데. 이후로 들어오는 고백들은 거절했다. 네임이 있거든. 미안하다는듯이 말하며 뒷목을 문지르면, 8할 정도는 그게 핑계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보이지 않는것도 있고. 만약 정말 있다고 해도,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무슨 상관이냐던가.
그런 말들에 설득 당한건 뒷목을 더듬는 버릇이 생긴지 1년 정도의 일이다. 근거없이 곧 만날거라고 상상하던 운명의 상대는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보는 것이 지칠 수준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어쩌면 50살 때거나 죽기 직전에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만나기만 한다면. 운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어떤-글쎄. 전기라던지, 꽃잎이라던지. 그런게 있을거라고.
“그런거 있었어?”
알면서 묻는 질문이 여상하다. 아이바는 웃어버리고는, 반대로 니노미야에게 그런게 있었는지 물었다. 강의실에서 눈이 마주쳤을때나, 빈 복도에 나왔을 때 그런게 있었냐고. 니노미야는 웃지 않았고.
그런건 없었다. 미디어는 과장을 좋아하고, 현실은 평면적이고 언제나 실망스럽다. 아이바의 니노미야에 대한 첫인상은 하얗다는것 정도였다. 하얗고 까맣고 눈이 큰.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른일지 아이일지 노인일지 이것저것 생각해봤었지만. 이렇게 뭔가- 기대하지도 않은 평범함이 있는 사람일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나이도 비슷해보이고 정부의 비밀 특수요원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고. 운명 같은 과장된 단어를 쓰는거니까, 뭔가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혹은 첫인상부터 지나치게 완벽할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친구로 지내는게 좋겠다는 말을 하는 니노미야의 표정은 조금 떨떠름했다. 그 얼굴을 보니 알 수 밖에 없었다. 저도 그다지. 상대의 환상 같은걸 채워주지는 못했다고.
“환상 같은거 가진적 없어.”
옆에 널브러져 있던 나뭇가지를 든 니노미야가 괜히 모래를 해집었다. 없었어? 이런걸 얘기해본적이 없으니 아이바로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운명의 상대가 어떤 사람이라던지, 생각하는것만으로도 낯간지러워 그런건 피했다. 그런건 좀 더 아이바가 아는 니노미야 다웠다. 다만 조금. 니노미야도 그렇게 애매하게 평범할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그래도,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것이 어느정도 상처였다. 울퉁불퉁한 모래를 평평하게 만들던 니노미야가 고개를 돌려 아이바를 본다. 곤란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알아가자는 말도 아니고. 그렇게 처음부터 잘라내는건 너무하다고 생각해서.
네임이 나타난 1년 뒤쯤에는 아이바도 다시 연애를 하거나 했었지만, 네임의 상대가 나타나면 헤어질 수 밖에 없겠지, 같은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애가 별로 순탄하지도 못했고. 말하자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서로 기대랑은 달랐어도, 그렇다고 정말 마음에 안든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하기사. 그건 아이바의 쪽만 해당되는 일일지 몰라도.
“왜 자신이 없었는데?”
“몰랐으니까.”
니노미야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태여서였다. 이름 외에는 아는 것도 없다. 제 이름은 아대 안쪽에 있었다. 네임 같은건 싫어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단순히 제가 너무 마음에 안들었을수도 있고. 친구로 지내자는 말에는 그러자고 했지만, 차였다는 생각이 드는걸 막기도 힘들었다. 운명의 상대에게, 만난 첫날부터.
억울했다. 그래서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정말 자기가 싫어서, 생리적으로 무리라거나 하는 이유로 친구를 하자고 했던건지. 아니면 아이바와 마찬가지로 니노미야도 혼란스러워했던것 뿐인지. 가까이 있으면 가려워지는 글자 때문에 니노미야는 어색해했지만, 아이바는 어쨌든 주변을 맴돌았다.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니 그쯤은 괜찮을것 같았다. 그랬는데, 뭔가. 나중에는 그냥 붙어다니고 싶어져서.
알면 알수록 비슷한건 하나도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도, 분위기도, 관심사도. 게임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도쿄에서 5만명쯤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말을 걸거나, 대화를 나누는게 끊기지도 않았다. 니노미야가 들어주는게 끝나면 아이바가 들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지낼수록 신기함만 늘다가, 아이바는 어느새 이거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게 아니어도. 과장된 전기신호나 분위기를 잡아주는 벚꽃이나 불꽃 같은것들이 없어도. 서서히.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갖추고 있어서다. 눈에 그대로 보이는 특징들이 아니라도, 같이 지내게 되어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시덥잖은 것에 어울려주고, 투덜거려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걸 노력 없이도 알 수 있게 되는 것들. 미디어처럼 과장되지 않은, 잔잔하고 평범한.
-친구로 지내고 싶어한다면 그걸로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 조금 실망스러운 검색결과이기는 했지만, 꼭 연인이 아니어도 된다니까. 조바심 낼거 없이 천천히 해도 괜찮을거라고.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렇게.
“아까 질문한걸로 돌아오는데.”
어느새 완전히 해가 져버린 바다는 달을 띄우고 있다. 왜 오자고 한거야? 여행은.
시기는 애매하지만. 호주에 가기전에 이별 여행 같은걸 하려는걸수도 있다. 당분간 못볼테니까, 친하니까, 잘 갔다오라거나,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그냥 와본거거나. 친구로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한것 치고 아이바와 니노미야는 지나치게 붙어다니던 편이다. 단순히 서로가 편해서 그랬다. 겨우 2년 알았을 뿐인데도.
그런거면 그렇다고 말해줬으면 한다. 그런게 아니라면.
“시체에도 남아있대.”
니노미야가 나뭇가지를 버리고 아직 아이바가 가져간 상태인 제 손목을 보았다. 네임의 이야기였다. 산악사고로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던 시체를. 네임의 상대가 알아봤다는 말을 들은적 있다. 그래서 지문을 따로 채취해 확인했더니 정말이었다더라는 이야기. 그부분의 피부가 괴사하기 전까지는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글자.
그러니까. 아이바가 2년 정도 곁에 없다고해서 니노미야가 아이바를 잊을 일은 없다. 호주에 가던 우주에 가던, 2년이 아니라 5년 10년이 흘러도 아마 마찬가지일터였다. 손목에 있는 글자는 항상 눈에 띈다. 만나지 않았을때라면 모를까, 이미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말하는지도 전부 아는데. 그런건 불가능하겠지.
제 이름은 뒷목에 있지만 아이바도 똑같을걸 안다. 부풀어 올라있는 살에 손이 가는 것은 쉽게 고쳐질 버릇도 아니고. 손끝으로 더듬는 글자의 윤곽은 어쩌면 보는 것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니노미야는 단순히 바다를 건넌 아이바가 저를 잊어버려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봐 여행 같은걸 온건 아니었다. 마지막 추억으로 만들 생각도 없다. 이별 여행 같은건 더 아니고. 그냥.
“보고싶어질 것 같아서.”
어느정도는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파도소리가 조금만 더 컸으면 묻혔을 수도 있었다. 2년 동안 붙어다녔지만, 이렇다할 추억이랄게 없었으니까. 지나치게 붙어다녔어도 남들과 하던걸 한게 다였다. 대충 밥먹고, 떠들고. 아이바와의 특별한 순간 같은건 니노미야가 피해왔으니까.
손목이 풀려나서, 이번엔 니노미야가 제 끈팔찌를 만지작댄다. 시작은 했는데, 말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다. 소금기 있는 해풍은 들따위에서 불어오는 것보다 끈적거렸다. 이런건 역시 잘안맞았지만.
“확신을 못해서 그랬어.”
누군가가 조종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때가 있었다. 이렇게 되도록 어떤 레일을 깔아놓고, 자신은 그 위를 지나가고 있었던것도 모른채로 끝에 당도한 기분. 제 인생 통째로가 마치 아이바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은 느낌. 퍼즐처럼 맞는 성향도, 편한 분위기도, 그 웃음을 쳐다보게 되는 것도. 운명론의 쟁점은 개체의 의지를 무시하는 것에 있다. 거대한 흐름에 의한 만남에는 니노미야의 호불호가 들어가있지 않다.
자기들 멋대로라고 생각했던 주인공들이 질리도록 고뇌하는 문제였다. 이게 정말 자신의 의지로 이뤄지고 있는 일인지. 결국 자신은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하나도 특별할것 없는 부품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그런 고민. 모순적인 생각은 배게 밑으로 흘러 니노미야를 잠기게 만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좀 허무해진다. 별 쓸데도 없는 고민이었다. 무슨 세상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조금씩 드는 고민은 감정이 형태를 갖추는걸 방해한다. 어떤 점이 좋아서 감정이 생기는건지 얘기하자면 목끝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냥 네임이 있어서만 좋아하는거라면 어떡하는지. 아이바가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도 마찬가지라면 어떡해야하는지. 제 감정부터 의심해서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바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그냥 지지부진하게. 친구인채로 남들이 하는 것들만 했다. 운명을 거슬러주겠다는 기합 같은게 들어가있어서가 아니었다. 소소하게 드는 의심과 반항심이 앞을 방해하고는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아이바가 졸업을 하면 유학을 갈거라는 말을 해서.
“웃기지.”
아이바는 그런 말을 하는 니노미야를 보다가, 몸을 좀 더 당겨 니노미야에게 붙어 앉았다. 웃어버린 니노미야는 만지작대고 있던 손목을 내리고. 모래사장에 있는 손이 닿을듯한 거리에 있다.
운명을 거스르겠다고 선언하며 온갖 고난을 겪는 주인공들을 볼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있다. 세상을 구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나서는 더더욱 그랬다. 본인은 운명을 거스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조차 어차피 운명이었던거 아닌가하고. 모든걸 개인의 의지로 끌고나갈 수는 없으니 이야기에는 반드시 우연이라는 것들이 있다. 그런것들이 개체의 의지와 무관계하게 지어지는 거대한 흐름일지 아닐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인간은 어차피 개미만한데.
그럼 별로. 반항해봤자 소용 없는거 아닌가. 그리고 인간은 작아서, 그런 거시적인 시각을 갖다보면 반드시 놓치는 것들이 생긴다. 2년동안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바와, 그냥 흘려보낸 지난 2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들 같은것. 겨우 살에 새겨져 있는 글자 몇개 때문에 낭비한 것들.
“네가 날 좋아하는건 알았는데.”
끝이 닿은 손을 힐끔대던 아이바가 시선을 올려서, 니노미야는 일부러 모래에 시선을 둔다. 니노미야는 눈치가 좋았고, 아이바는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그런걸 숨기지도 않았던 탓이다. 서로를 보면 웃고, 좋은 것이 있으면 주고 싶고, 이유없이 곁을 맴돌고 싶다. 그게 어떤것인지 알면서도 조금 무서웠다. 겁을 먹은 니노미야의 옆에서 아이바는 조바심조차 내지 않았으니까. 정말 괜찮은건지 반복해서 생각하느라.
났는데. 그냥 숨긴거지. 웃어버리는 아이바에게 눈을 돌렸던 니노미야도 그대로 웃어버리고 만다. 이제와서 솔직해지는것도 꽤 괜찮은 기분이었다. 손을 잡는 대신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아이바가 흘러내린 머리를 넘겨준다.
운명이라도 상관 없다. 바다를 가자고 말하기 하루 전에, 니노미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무슨 거대한 흐름이 점지해준 짝이든 어떻든. 상대는 서로가 운명이라는 이유로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데다가, 반년이 지나면 갑자기 옆에서 없어질테니까. 사실은 손목이든 뒷목이든에 있는 글자가 마음에 들지 않고, 거꾸로 감정 따위를 의심하게 한대도. 어쨌든 아이바가 떠나고나면 후회할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평생 안헤어지고 붙어있게 될까?”
운명이라는 이유로 정말로 그럴지. 서로에게 맞춘 퍼즐같아도 니노미야와 아이바는 다른것 투성이다. 이제와서 그런 낭설을,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믿는건 기만 같아보이기도 했다. 실컷 부정하느라 2년을 새웠으면서. 아이바가 눈썹을 내린다.
“노력해봐야지.”
그런 불안하고 니노미야도 싫어하는 단어에 기대지말고. 니노미야가 오늘 해야만 하는 말을 하려고 노력했던것처럼. 생각해본적도 없는데. 그게 꼭 제가 듣고 싶은말을 그대로 옮긴 것 같아 니노미야가 눈을 감고 웃어버린다. 정말 신기하네. 믿고싶지 않아도 믿게 만들려는 것처럼.
그런거면 지는 것도 상관 없다. 적어도 오늘의 노력으로 나머지 반년은 낭비하지 않고 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추상적인 개념에 매달리기 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게 좋을거라고. 조명 없는 바다 앞에서 손을 뻗자 계속 궁금했던 글자에 손이 닿는다. 미련이 넘치도록 사진에 담았던 것보다 훨씬 생생한 감각을 더듬다보면 더 간지러운 감각이 찾아왔다. 작은 소리를 내며 멀어진 얼굴이 지척에서 웃는다. 그러면, 톱니바퀴든 레일이든 운명이든. 그런건 전부.
“좋아해.”
네임이라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의 애매했던 첫인상에서 한걸음을 빠져나온 뒤의 아이바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니노미야의 의지든 아이바의 의지든, 거대한 세계의 어떠한 수작이든. 옆에 없으면 보고 싶어질거고, 옆에 있으면 닿고 싶어지게 되었으니까. 부정할 수 없이.
답을 돌려받으면 글자의 간지러움이 꼭 가라앉는것만 같다. 모래사장에서 일어나면 좀 더 파도를 보면서 걷자. 달과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조금 더 찍고. 남은 반년동안 하고 싶은걸 말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동안 못했던걸 한웅큼씩 말할 수 있을테니까.
서로의 이름에 닿은 체온이 미지근했다. 망설임을 거둔 톱니가 천천히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