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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

0.


운명에 의해 결정된 누군가와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길 들었던 건 니노미야가 고등학생 때였다. 니노미야는 그 얘기를 듣고도 그다지 와 닿질 않아 심드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같이 그 소식을 접한 미야자와는 낭만적이라고 했고 타카세는 자기의 운명은 예뻤으면 좋겠다고 실없는 소리나 해댔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게 좀 기분 나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니노미야가 고등학생일 때 세상에 처음 드러난 ‘네이머’는 해외 사례였다. 처음으로 가까이에 나타난 건 1년 정도 뒤의 일이었다. 교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시라이의 손목에 반쪽 날개 그림이 나타났다. 처음엔 흐리던 문양이 점점 짙어졌다고 하며 액세사리라도 보여주듯 굴었다. 그러면서 시라이는 별로 다른 반쪽 날개를 찾을 생각이 없다고 하며 네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손목 안쪽으로 새로운 ‘문신’이 하나 새겨졌을 뿐이라고 했다. 세간에서의 취급도 별반 다르지 않아 그저 예능에서 잠깐 언급이 되던 게 다였고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니노미야는 그때까진 ‘시시하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런 니노미야가 이 ‘네이밍’ 현상을 소름 끼친다고 여기게 된 것은 시라이가 어느 날 잠이 든 채로 깨지 않는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해외의 ‘네이머’들 중에도 그런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간은 이 현상을 더는 ‘로맨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시라이는 일주일 정도 있다가 깨어날 수 있었다. 그 반의 반장이었던 하시모토가 그녀의 반쪽 날개였다. 조용하고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이었다. 이 일로 학교가 다시 한 번 들썩거렸지만, 곧 동성의 ‘네이머’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곧 이런 인식들도 사라져 가기 시작했던 게 그쯤이었다.
 
‘네이밍’이 나타나는 사람의 특징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 현상이 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네이밍’은 거의 몇만 명 중 한 명에게나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럼으로써 니노미야는 스스로가 이 일과는 전혀 연이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갑자기 귀 아래 의 목덜미쪽으로 나비같은 문양이 세 개가 나타난 아이바만 아니었더라면 평생 별 생각이 없었을 게 분명했다.

"니노, 이거 봐."
"그게 뭐…. 어?"
"얼마 전부터 좀 따끔거리더니 이런 게 생겼네. 신기하지?"

별안간 제 목덜미를 들이밀며 보라고 하는 아이바에게서 슬쩍 몸을 떨어뜨리고 자세히 그 부분을 봤다. 옅게 초록빛이 돌고 살짝 광채도 보이는 것 같았다. 빛이 나진 않았지만, 그 부분만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니노미야는 저도 모르게 그 문양에 손을 가져다 대려다가 그만두었다.

"너 네임 생긴 거야?"
"그런가 봐. 찾아보니까 증상이 똑같더라고."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가 니노미야의 기분을 더욱 망쳤다. 운명의 장난이란 걸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게 분명했다.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보다가 말로 표현할 길 없이 속상해졌다. 이제 그는 같은 느낌의 어떤 문양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목덜미에 새겨진 문양을 원망스레 보고 있는 사이, 아이바는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니노한테도 생겼지?"
"…아니."
"…어?"
"안 생겼어. 이 멍청아."

난 울고 싶다고. 운명이 정해주는 그 인연인지 뭔지에 대한 거부감에 쐐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니노미야는 자신의 상황이 우습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아이바 마사키와 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연인이었다. 그것도 아이바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쭉 함께한 친구이자 연인으로 있던 존재였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아닌 다른 운명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그것도 네이머라는 존재가 나타나고 10년은 조용하다가, 하필 이제 와서 말이다.


-


언젠가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서로 사랑을 하던 중, 알고 보니 여자에겐 집에서 정해준 약혼자가 있었다. 둘은 울면서 헤어졌고, 다시 만나서 오해하면서 지지고 볶다가 결국엔 행복해지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엔 이렇다 할 감상이 따로 없었는데, 이제와서는 그 감상을 철회했다. 둘은 굉장히 처절했겠지. 왠지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네이밍이 된 이상 아이바의 귀 뒤에 나타난 나비 세 마리를 잡아 뜯을 수도 없었고, 자기 몸에 억지로 문신을 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거기다 이건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자 같은 거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다. 어쩌면 근시일 내에 아이바는 고등학생 때의 그 시라이처럼 의식을 잃고 쓰러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에게 자신과 일치하는 반쪽 네임이 없다는 걸 듣고서 바로 다음 날 병원부터 방문했다. '네이머'의 등장 이후 신경계통의 병원에서 이를 진료해준다고 했다. 아직까지 상태는 안정적이라고 했으며, 의사는 빠른 시일 내에 '반쪽 네이머'를 찾기를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모른다고 했다. 시라이처럼 갑자기 의식을 잃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말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주는 아이바의 얼굴은 조금 침잠되어 있었다. 애써 입가엔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완전히 헤어지는 분위기였다.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속 얼음이 반쯤 녹아갈 때까지 둘은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럼, 반쪽 네이머를 찾고서 어떻게 해야 증상이 완화되는 거래?"
"어…."
"옆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니노미야는 여러 사이트를 찾아다니면서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그렇게 흔하지 않은 증상이다 보니 간증도 적었다. 그냥 옆에만 있어도 된다는 사람도 있었고, 주기적으로 살을 맞대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네이머의 절대적인 수가 적다 보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말은 어떤지 궁금했다. 말이 없는 아이바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신체접촉?"
"…응."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웠는지 자기 앞에 남아있는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말이 신체접촉이지 네이머 자체가 연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간단한 신체접촉으로 과연 몸에 생기는 이상 증상을 완화할 수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니노미야는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아마 아이바 자신도 마음도 없는 상대에게 그러긴 어려울 거고, 연인이 있는 상황이라면 반쪽 네이머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연인이 없는 편이 그를 위해선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만할까?"
"…난 싫은데."
"어린애처럼 굴지 마."

짜증이 난 듯한 니노미야의 목소리에 아이바는 쓰게 웃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엉망진창이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어린애처럼 그를 놓아주기 싫은 건 자신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옆에 있고싶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깎여나가는 건 아마도 서로일 것이다. 다시 컵 안의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둘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니노미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어린애 같은 건 나네."
"응?"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너랑 있고싶어."
"…."

잔잔한 눈으로 니노미야를 보던 그는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테이블 위에 얹어진 손을 감싸 쥐었다. 자신의 손이 차갑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자신의 손을 감싼 그의 손은 뜨겁게 느껴졌다. 꽉 쥐어오는 손에 니노미야는 콧날이 시큰거려서 그 손을 차마 마주 잡지도 못했다. 햇볕이 좋은 주말의 오후가 그렇게 가고 있었다.


1.


아이바는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몇 시간 째 보고만 있었다. 연인들도 있었고, 그냥 친구인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괜히 울적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제 일에 집중했다.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 제 옆에 있겠다던 연인은, 그 날 이후로 연락이 뜸해졌다. 원래도 그렇게 시시콜콜 연락하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서로의 소식을 몰랐던 적은 없었다. 일에 집중도 안 되고 한숨이 점점 늘었다. 그러다 다시 창밖을 봤다. 행복한 얼굴로 지나가는 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둘은 서로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을까. 자신도 분명 그랬다. 네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니노미야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도 뭔가 나타났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약간 들떠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점점 얼굴이 구겨지던 그때가 자꾸만 떠올랐다. 여태껏 긴 시간 동안 사귀면서 그의 그런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드러내도 그런 얼굴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싸우긴 허구한 날 싸우면서도 그런 얼굴은 볼 일이 없었다. 대체로는 시시한 이유로 싸우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헤어지자고 할 땐 붙들고 울고 싶었지만, 내심 겁이 났다. 의사는 장기간 반쪽 네이머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생길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상관없다고 하고 싶었지만, 만약 그대로 죽어버린다면 아예 니노미야를 볼 수도 없게 돼버리는 현실에 겁이 났다. 그리고 그에 속상해할 니노미야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마냥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니노미야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 섣불리 전화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도 비슷하게 핸드폰만 죽어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 아이바는 익숙한 번호를 빠르게 눌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오늘 뭐 해? 저녁 먹을까?"
[맛있는 거 먹자. 비싼 거로.]
"웬 일이냐. 짠돌이가."
[그리고 여행 가자.]

여행. 조용히 그 말을 되뇌었다.

"어디로 갈까?"
[그런 건 만나서 정하고.]
"응. 그러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응."

전화가 끊어진 화면을 보다가 결국 상반신을 무너뜨리고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니노미야는 아주 조금씩 자신을 놓아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구나. 말하지 않아도 아는구나. 그들이 함께 보내온 시간은 결코 거짓을 보여주지 않았다. 얄궂은 일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의도만큼은 정확하게 보였다. 그의 의도대로 따라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그와의 추억을 더 만들고 싶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의 퇴근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바는 차분히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을 찾아보기로 했다.

"왔어?"
"응."

가게에 니노미야가 들어오는 걸 보고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연인의 얼굴은 그사이에 조금은 수척해진 느낌이 들었다.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주변 정리를 하고 가게 문을 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내부가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 나니 가게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니노미야의 시선이 목 부근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아니, 빛이."
"빛? 이게 빛이 있어?"

처음엔 그냥 점이라고 생각했다. 따끔따끔 한 것도 별거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 선명한 나비 모양의 점 같은 게 보였다. 색은 그냥 평범하게 갈색 정도로 보였는데, 그 얘길 하는 걸까 싶어 아이바는 니노미야를 바라봤다. 니노미야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손을 내밀었다. 아이바도 말없이 미소를 짓고 그 손을 잡아 당겼다. 힘없이 끌려온 니노미야는 볼에 입술을 맞대는 아이바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다가온 그의 목에 손을 조용히 올렸을 뿐이었다.

"아."
"응?"
"전기라도 올랐나 봐."

니노미야는 손을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아이바는 그의 얼굴을 보고 웃으면서 그 손을 잡았다.

"스테이크 먹을까?"
"고작 생각한 비싼 게 스테이크?"
"연예인들만 간다는 긴자 레스토랑이래."
"비싼 거라고 했더니 진짜 그런 델 찾아."

아까는 고작 스테이크라며. 금액대가 다르잖아. 0이 하나 더 붙어. 그렇게 티격태격 시끄러우면서도 둘이 잡은 손은 레스토랑 앞에 도착해서야 떨어졌다.

"처음으로 싸웠다가 다시 화해했을 때 햄버그 스테이크 먹었잖아."
"아. 네가 직접 만든 그거?"

그 때 생각이 문득 떠올랐는지 니노미야는 킬킬거리고 웃었다.

"진짜 맛 없었는데, 그거."
"하하, 맞아. 그랬지."
"근데."

눈앞에 놓인 물을 한 모금 조금 마신 니노미야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진짜 좋았어. 그거."

괜히 아이바는 그 말에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2.


친한 학교 선후배에서 연인이 되기까지의 길은 사실 그렇게 험난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됐고, 그러다가 마음이 통해 덜컥 입부터 맞댄 것이 그 시작이었다. 남들은 다 힘들다는 연애도 둘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이바가 대학에 가고 나서야 둘 사이에 조금씩 다른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모르는 게 없던 사이에서 갑자기 모르는 것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아이바의 다정한 성격은 니노미야에겐 불안이었다.

니노미야는 아직 고등학생이었고, 둘은 흔히 말하는 '커플'같은 일은 거의 하지도 않았다. 늘 입맞춤 이상의 건 하지 않는 건 아이바의 배려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애인을 만나는지 친구를 만나는지 헷갈릴 때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당장 그 날 만날 때도 아이바와 니노미야는 방 안에서 그냥 같이 있을 뿐이었다. 평소엔 그 고즈넉한 시간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한창 우울함에 푹 잠겨 있던 니노미야는 그 모든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툭툭 튀었다.

패션디자인과로 진학한 아이바의 주변엔 언제나 잘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뿐이었다. 과 모임을 했다는 사진을 봐도 그랬다. 본인이 무심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잘 휩쓸리고 다니다 보니 과 내 활동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둘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종종 동기와 찍은 사진 따위가 보였다. 자기가 모르는 시간에서 모르는 사람들과의 공유하는 것이 점점 늘어갔다. 그만큼 그의 인생에서 자신은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끼는 스스로가 싫었고, 그렇게 만든 그가 싫었다. 불안함이 자리 잡은 마음은 늘 기분을 어지럽혔다. 거기다 늘 만날 때마다 같은 이름을 듣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사야카라는 사람 예뻐?'
'응? 예쁜 편이지.'
'…넌 나랑 사귀는 게 괜찮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우리 아무것도 안 하고. 이게 친구랑 뭐가 다른가 싶어서. 아주 작게 웅얼거리듯 한 말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아이바의 귀에 훅훅 꽂혔다. 크게 뜬 둥근 두 눈은 잠시 뒤에 차갑게 굳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이바는 대략 '너랑 사귀는 거 이제 쪽 팔린다' 정도로 이해했다. 하지만 니노미야가 하고 싶었던 말은 '불안하다'는 말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세계가 넓어지고, 또 그럴수록 불안함이 커진다는 걸 그때의 아이바는 아직 몰랐다. 그냥 어쩐지 이제 와서야 자신의 존재가 부끄러운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은 이제 그냥 친구 하고 싶어?'
'어?'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사귀는 게 아닌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그 상황에선 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니노미야는 그저 불안을 좀 덜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있던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조금 차가워진 눈을 보고 게임기를 내려두었다.

'사야카라는 사람 얘기 나한테 얼마나 많이 한 줄 알아?'
'같은 수업 과제 때문에 자주 만나서 그런 거라고 했잖아.'
'너랑 나랑 일주일에 몇 번 만나는지는 알아?'
'….'
'많아야 두 번이야. 그때마다 같은 이름이 들려. 걔 예쁘대. 내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돼?'
'카즈.'
'그리고 우리가 하는 게 고작 같이 방에 앉아서 게임이나 하거나 만화 보거나 하는 거야.'

사실 아마도 같은 학교에서 같은 환경에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싸우진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서로가 모르는 것이 생긴다는 건 그렇게나 사이에 골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금 쌓여있던 섭섭함이 폭발하자 감정도 함께 격해졌다.

'이게 친구랑 어떻게 다른데? 솔직히 뽀뽀 같은 건 장난으로라도 할 수 있잖아.'
'진심이야?'

감정이 격해져서 툭 내뱉은 말에 아이바는 순식간에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벌떡 일어서서 늘어놓았던 것들을 가방에 쑤셔넣었다. 빵빵해진 가방을 등에 척 메고선 다시 얼굴을 마주했을 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야카는, 남자친구도 있고, 맛있는 가게도 많이 알아서, 나중에 카즈랑 가려고 했어.'

더듬더듬 말하는 사이사이에 울음기가 섞였다.

'말해두지만 나는, 친구랑, 뽀뽀 같은 거 절대 안 해.'

그 우는 얼굴에 니노미야의 얼굴엔 드물게 당황스러움이 엿보였다. 자기도 친구랑은 그런 거 안 한다고 말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아이바는 방에서 나갔고 한동안 연락도 없이 지냈다. 니노미야는 이제 끝인가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아이바는 그저 반성할 시간을 가진 것뿐이었다. 가장 예민할 시간에 너무 무심했다. 울적해진 기분으로 친구 몇이 모여있는 강의실에서 상담했다. 그들에겐 진작에 성향을 밝혔고 애인의 여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 중엔 사야카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과자를 오독오독 씹으며 말했다.

‘귀엽게 싸우네, 너네. 그냥 미안하다고 해.’
‘그치만, 헤어지자고 할까 봐 무섭단 말이야.’
‘그럼 헤어져야지.’
‘그건 싫어. 나한테 걔는, 그러니까 너한테 카사마츠씨 같은 거야!’
‘에, 그게 뭐야.’
‘이를테면 운명이라고. 네임 같은 게 없어도!’

그 동화적인 발상이 가득 섞인 얘기에 일순 분위기가 싸해지긴 했지만, 곧 그들은 진지하게 상담에 임해줬다. 일단은 사과가 가장 급선무였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동기들은 일관되게 ‘네가 불안하게 만든 게 문제’라고 했다. 확신이 만약에 그렇고 그런 일에서 오는 거라면 못할 일이야 없겠지만,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성인이 되기 전까진 그 이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키스도 안 되겠어?’
‘…말해도 돼?’
‘응.’

동기인 카가와가 강한 관심을 드러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동기들은 모두 시선을 한데 모아 아이바를 바라봤다.

‘하면 못 참고 더 해버릴까 봐.’
‘너 그거 걔한테 말해봤어?’
‘아니….’
‘그러니까 불안해하는 거잖아! 거기다 말하는 게 맨날 자기가 모르는 사람들 얘기? 최악이야!’

소리 나게 등을 얻어맞은 아이바는 그제서야 둘 사이에 대화가 많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어딘가 얻어맞은 기분으로 아이바는 바로 튀어 오르듯 일어나 강의실을 벗어났다. 편하다는 이유로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걸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자기 기분만 괜찮으니 고려하지 못했다. 괜히 스스로가 미워졌다.

'니노!'
'헉, 뭐야?'

방에 혼자 앉아 책을 펼치고 있던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얼굴을 벌게져 있었고, 어깨는 헉헉 숨을 몰아쉬느라 오르락내리락했으며, 땀으로 샤워를 한 건지 온통 땀범벅이었다. 어버버 하는 사이에 조만간 얼굴이 구겨지더니 급기야 눈물까지 줄줄 흘렸다. 그러고선 옷 소매로 눈물을 벅벅 닦아내면서 문앞에 서 있기만 했다. 덕분에 니노미야도 덩달아 아무 말도 못 하고 책상 앞에 앉아만 있어야 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은 뭐냐고 물어야 해?'
'미안…. 미안하다는 말하려고 왔어.'
'…나도. 말이 심했어.'
'네가 불안해한다는 걸 전혀 몰랐어.'
'….'

당장 끌어당겨 안고 싶은데 땀 범벅인 상태라 냄새가 나기라도 할까 봐 문앞에 서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어디선가 털어놓고 혼자 울며불며 왔구만. 보지 않아도 훤히 보이는 그의 상태에 니노미야는 축축한 손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옷도 땀에 흠뻑 젖은 채여서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니노미야를 마주 안은 아이바는 마찬가지로 축축한 입술로 니노미야의 이마에 입 맞췄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입술에 입을 맞추곤 혼자 웃었다.

'왜 웃어?'
'조금만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어서.'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는 모습에 덧붙여 말했다.

'네가 더 불안해지지 않게, 꼭 시간이 더 지나면 그때 난 다른 걸 하고 싶거든.'
'한 살 차이 가지고 어른행세 더럽게 하네.'
'한 살도 아니긴 하지만.'

키득키득 웃던 아이바는 품에서 그를 떼어놓았다. 순순히 떨어진 니노미야는 방에서 나가 컵에 가득 물을 따라 아이바에게 건넸다. 집에 누가 있는지도 안 보고 니노미야의 방으로 돌진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에 집에 부모님이라도 있었다면 정말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신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야카는 운명이 있어. 카사마츠씨라는. 우연히 만났는데 운이 좋게 둘이 같은 네임이었대. 보이지 않는 데 있다고 그래서 신기하고 부러웠어.'
'뭐가?'
'내가 너랑 운명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싶어서.'
'그런가. 이건 그런 게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은데.'
'하긴.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아침 먹고서 밤이 되도록 아무것도 못 먹은 데다 걸어서 20분 거리를 쉬지도 않고 뛰어왔더니 급격히 배가 고파졌다. 민망함에 납작한 배를 문지르고 있자니, 니노미야는 깔깔거리고 웃었다.

'집에 먹을 거 없는데.'
'나 전에 인터넷에서 햄버그 스테이크 레시피 본 적 있는데. 사다 해먹을까?'
'믿어도 되냐, 그거.'

믿어보라고 했지만, 아이바는 결국 불 조절에 실패해서 소스에 들어갈 양파도 다 태우고, 고기마저 속은 살짝 덜 익은, 최고로 맛없는 햄버그 스테이크를 만들어냈다. 먹지 못하고 거의 다 버리고서 레토르트 제품을 사다 먹었던 아주 예전의 추억이었다.


-


"여기 맛있다."
"괜히 다른 데보다 0이 더 붙는 게 아니었어."
"이제 이번 달은 긴축이네."
"나오자마자 슬픈 얘기 하지 마."

전채요리부터 후식까지 완벽한 코스를 갖춘 요리들은 하나같이 정갈하고 맛있었다. 계산서까지 신용카드로 해결하고 나와서 둘은 다시 손을 잡았다. 니노미야는 아까부터 손가락이 따끔따끔 계속 아파져 왔다. 일하다가 종이에 베이기라도 한 건가. 손톱 끄트머리의 거스러미처럼 묘하게 신경이 쓰여서 손가락으로 꼼지락 꼼지락 문지르고 있었다.

"이제 어디 갈까?"
"호텔 예약해놨어. 꽤 괜찮은 곳이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깍지 껴 잡은 손이 괜히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바의 손가락이 끈적하게 손가락을 어루만졌다. 명백한 성적인 의미가 담긴 행동임을 모르는 쪽이 바보였다.

"가까워?"
"응."
"여기서? 와, 돈 많이 썼네. 마군."
"하하, 그 호칭 오랜만이다."

웃는 아이바의 옆모습은 살짝 열기가 더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와의 이별까지 결심한 마당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아직 그의 반쪽 네이머는 나타나지도 않았다.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지금은 아직 완벽하게 헤어질 타이밍도 아니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조금씩 정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어차피 그게 지금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안이한 생각이었다. 이럴수록 헤어지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카즈?"
"가자."

예약해둔 호텔은 근처에서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가격이 다소 비싸긴 했지만, 가격대만큼 좋은 시설과 서비스를 갖추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들어가는 로비부터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다. 오래된 커플인 탓에 데이트 장소에 호텔이 있진 않아서 좀 어색함에 아까부터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오돌토돌한 게 손가락 사이사이에 만져졌다. 딱지가 앉은 걸까 싶어서 들여다보려는 찰나에 체크인을 끝낸 아이바가 다가왔다.

"고층이 아직까지 있었대. 대단하지."
"운이 좋네."

건물에 있는 것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고급스럽고 좋은 것들로만 만들어 놓은 것이 티가 났다.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이제 그와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세어봤다. 사실 셀 수 없었다. 당장 내일 그의 반쪽 네이머가 나타날 수도 있었고, 아니면 당장 오늘 새벽에 이상 증상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순식간에 울적한 기분이 되어 여전히 잡고있는 손을 꽉 잡았다. 불시에 손이 꽉 잡힌 아이바는 무슨 일이냐는 듯 니노미야를 내려다봤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니노미야는 씩 웃곤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마주 대었다.

"좋아서."

점점 천천히 아이바의 얼굴색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얼굴을 가리고선 웅얼웅얼 말했다.

"우와아, 우와. 잠깐만. 위험했어. 엘리베이터인 거 잊어먹을 뻔했어."
"새삼스럽긴."
"네 입에서 좋다는 말 듣는 건 침대 밖에선 불가능한 건 줄 알았지."
"오늘은 더 듣고 싶지 않은가 봐요, 아이바씨."
"아닙니다."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하고 빠른 걸음으로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도 전에 둘은 성급하게 입술부터 맞댔다. 처음으로 몸을 섞던 그때처럼 성급한 키스였다. 말랑한 혀를 빨아올리면서 손으로는 그의 겉옷부터 벗겨 내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목을 감싸쥐듯 매달렸다. 거칠면서도 다정하게 입안을 더듬어오는 혀와 맨살을 부드럽게 만져오는 게 괜히 서글펐다. 그리고 그럴 떄마다 이상하게 손가락의 따끔거림이 심해졌다. 이젠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볼에 몇 번 입을 맞추고 잠시 몸을 뗴어냈다. 몸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는데, 손가락이 아프기 시작하니 견딜 수가 없던 탓이었다.

"아, 잠깐만. 나 역시 아까 손가락 베였나 봐. 아파"
"어? 밥 먹다가?"

바로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손을 붙잡아오는 커다란 손에 정말 울컥, 눈물이 터질 뻔했다. 이 사람이랑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의 반 이상이 그와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운명이 이딴 거라면 정말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따뜻하고 큰 손이 이리저리 자신의 손을 뜯어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저녁쯤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부분을 계속해서 문지르고 있었다. 역시 무언가에 베인 게 분명한 모양이었다.

"니노. 카즈. 카즈."

그의 목소리엔 왠지 울먹거림이 섞여 있었다.

"내 네임에 색이 보여?"
"그게 갑자기 무슨…."
"난 니노 손가락에 이 부분에 색이 보이는데."

자신의 손을 들어 입을 맞췄다. 원래 보이면 안 되는 건가.

"초록색이랑 노란색이 섞여 있어. 좀 빛나는 것 같아. 니노 눈엔 내 네임이 그렇게 보여?"
"아니 그냥 투명하게 빛…, 어라?"

분명 처음 봤을 땐 그냥 은은하게 빛나는 느낌의 색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목덜미에 있는 네임은 초록색과 노란색이 은은하게 섞여 빛나고 있었다. 이런 색이 아니었는데. 아이바와 눈을 마주하니 그는 이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냐고 물어봤거든."
"어?"
"그 사람이라면 서로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어. 의사가."
"잠깐. 나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가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야."

아이바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맞춰왔다. 손을 들어 봤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빙 두르듯 풀과 꽃이 둘러싸고 있었다. 꼭 반지를 채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모양은 다를 수 있다고 했어."
"확실한 거 맞아?"
"나 여태까지 다른 사람 네임 색은 그냥 문신이나 점처럼 보였어."
"아…."

그 예전 시라이의 손목에 보였던 날개를 떠올렸다. 빛은커녕 그냥 문신 정도라고 생각했던 걸 기억해냈다. 니노미야는 다시 아이바의 목덜미를 봤다. 확실히 영롱한 빛이 은은하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봤다. 아주 은은하게 빛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아이바를 바라봤다. 그는 눈이 채 마주치기도 전에 아주 꽉 니노미야를 끌어안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울고 있는 아이바를 마주 끌어안았다. 눈물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


눈을 떴다. 옆엔 옷을 벗은 채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면서 곤히 잠든 아이바의 머리카락을 넘겨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네임을 봤다. 여전히 은은하게 빛이 보였다. 자신의 손도 다시 한 번 봤다. 같은 색을 갖고 있었다. 한참 그렇게 제 손을 들여다보던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끌어안고 벗은 어깨와 목에 슬쩍 입을 맞추고 다시 잠을 청했다.

잠이 완전히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체크아웃 시간에 간신히 일어나 대충 씻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병원으로 발을 옮겼다. 병원에 가서 확인을 받는 게 좋다고 잠들기 전에 찾아봤던 내용 탓이었다. 믿기지 않기도 했고, 조금 무서움도 있었다. 무언가의 착오면 어떡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간 진료실엔 유순한 인상의 의사가 앉아있었다.

"그건 본딩 현상 같은데."
"예?"
"원래 서로의 색이 보이는 경우가 있기는 한데, 섞이는 경우는 거의 못 봤거든요. 저도 논문에서만 본 사례예요."

거기다 이 친구 네임 생긴 위치도 재밌네. 그러면서 니노미야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본딩이라는 건…."
"말하자면 정말 둘도 없는 짝이라는 거지. 어떻게 억지로 뗄 수도 없는."
"네임을 지울 수도 있는 건가요?"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가능하긴 해요. 대신 조금 몸이 망가질 수 있고요. 그러자니 위험부담이 크다 보니 그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그래서 아이바씨에게도 말 안 했어요. 있다고 하면 바로 하자고 할 것 같아서."

정말 우울해 보였거든. 뭔가 후련하다는 듯 의사는 활짝 웃었다.

"가까운 곳에 있을 거라고 했죠?"
"…그렇네요."
"대부분은 그렇더라고요. 뜬금없는 곳에 있지 않아요. 어떻게 해서든 그와의 연이 있기 마련이더라고."

의사는 자기가 더 해줄 건 없다면서 둘이 잘 살아 보라고 동네 아줌마 같은 말을 하고 내보냈다. 흔한 현상이 아니다 보니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진료비가 비쌌지만, 괜찮았다. 그보다 더 값진 걸 얻어가는 기분이었다. 니노미야는 신기한 듯 계속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혼자 킥킥 웃었다.

"왜 웃어?"
"여행은 이별 여행이 아니고 그냥 여행가면 되겠네."
"신혼 여행 어때? 이렇게 된 거 반지도 맞추자."
"아주 광고를 하지그래."

그렇게 웃으면서 아이바를 밀어내면서도 싫은 눈치는 아니어서 조만간 반지를 맞춰야겠다고 다짐했다. 운명이 정하는 무언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조금 기분 나쁜 구석이 있지만, 그렇게 매정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거리의 전광판에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보였다. 앞으로의 인생에도 서로의 인생에는 서로가 있었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싸우기도 많이 싸울 거고, 많은 기억을 함께 만들어갈 것이다. 마주 잡은 손이 따뜻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은 이거 하나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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