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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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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차고 기운다. 그건 달의 운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운명이라는 건 모든 걸 참 간단하게 설명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만난 것도 운명이고, 헤어지는 것도 운명이고 심지어는 길에서 넘어지는 것조차 운명이었다.

 

21세기에 무슨 운명. 낭만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황이 간절해지면 과학 문명을 향유하는 자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잡는 것이 그 알량한 운명이었다. 모순적이지만 그게 인간적인 거겠지. 니노미야는 생각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운명이라는 건 믿어본 적도 없는 자신조차 지금은 그 단어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고 있었으니까.

 

고등학교 합격 발표 5분 전의 1월. 운명이라든가 운이라든가 하는 허황된 소리에 기대게 되는 건 비단 니노미야 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교복 위로 겹쳐 입은 더플코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몄다. 아무리 여며보아도 아래서 들어오는 바람은 막을 수 없는 탓이었다. 그냥 집에 있을걸.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란히 선 아이바의 얼굴이나 기어코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면 결국 이렇게 됐을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교복을 차려입고 나온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가 소란스럽게 주변을 채웠다. 말이 많다는 건 다들 긴장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점은 니노미야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또 다르기도 해서 밀가루 같은 얼굴은 추위에 더욱 하얗게 샌 채 담담하게 현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소매 아래서 꼼지락거리는 손만이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게임기를 들고 있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게임은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는 데에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도무지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니노미야는 목에 칭칭 둘러맨 빨간 머플러를 코끝까지 끌어올리며 옆에 선 아이바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던 입이 꾹 다물린 채 굳어있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간단한 동작에도 긴장이 가득 서려 있어서 니노미야도 함께 입을 다물었다.

 

어느 날부터 패션 잡지를 한참 뒤적거리더니 멋이 어떻고 하며 불량하게 꾸며 입기 시작한 교복도 오늘은 단정한 차림새였다. 옷을 다르게 입는다고 합격 여부가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부적 같은 의미겠지. 수학여행 전날에는 테루테루 보즈를 창문에 달고, 학년이 올라갈 때는 아닌 척 인연 부적을 손에 꼭 쥐고 있던 아이바였다. 같은 범주에서 나온 행동일 거라고 니노미야는 가볍게 넘겨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진 건 디지털 기기뿐이었는데 귓가에서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넘어가는 소리가 딱딱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고전적인 클리셰였다. 니노미야는 괜히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고 아이바의 손에 들린 수험표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이바는 몇 번이더라. 겸사겸사 제 주머니에 있던 수험표도 한번 꺼내 확인해본다.

 

그러고 보면 꽤 새삼스러운 풍경이었다. 아이바와 같은 학교에 원서를 넣고 나란히 합격 발표를 기다린다는 건. 솔직히 말하자면 재작년 여름까지는 조금만 하향 지원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딱 한 가지 뿐이었던 데다가 사실은 전혀 말도 되지 않았는데 니노미야는 그게 꽤 합리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무슨 영화나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면서. 어쨌든 영화는 영화, 소설은 소설이었고 그건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스스로 선택지를 좁히고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을 포기한다니 애초에 건강하질 못했다. 그래서 니노미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그만두기로 하고 지망학교란에 진학교로 유명한 사립학교의 이름을 적었다.

 

불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마치 모든 게 지금이 마지막이 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 학교 속의 생활이 다가 아님을 알면서도 아이바와 점심을 먹거나 복도를 걷거나 등교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지난겨울까지의 일이었지만. 아이바가 니노미야에게 빨간 머플러를 선물했던 지난 겨울까지의.

 

크리스마스이브인 아이바의 생일은 항상 휴일이거나 해서 니노미야는 선물이나 축하 멘트가 쏟아지는 생일 전날의 학교가 아닌 당일 오후의 아이바의 방이라거나 집 앞 같은 곳에서 선물을 전해주곤 했다. 아이바도 그걸 알고 있어서 수없이 쏟아지는 약속 권유에도 크리스마스이브는 항상 오프였다.

 

덕분에 늘 그렇듯 ‘지금 집이야?’와 ‘지금 시간 있어?’ 중에 하날 골라잡아서 보낸 문자에는 항상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오후라고 해도 꽤 늦은 시간이어서 니노미야는 올라가는 대신 아이바에게 옷을 단단히 입고 나오라는 문자를 덧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급히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아이바가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니노미야는 들고 있던 게임기를 가방에 넣었고 아이바는 그새 따뜻하게 데워온 핫팩을 니노미야의 패딩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안경 썼네. 대화는 그렇게 시작했다. 아침마다 콘택트렌즈를 꼬박꼬박 끼고 있다는 걸 알아서 나온 말이었다. 아이바는 어정쩡하게 안경다리가 걸린 귓가에 손을 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렌즈 낄 시간은 없어서.

 

끼고 나와도 됐는데. 덤덤히 답하는 니노미야의 목소리에 할 말이 없어진 아이바가 입을 벙긋거리다 답을 이어가길 포기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왜 부른 거야?

 

가방으로 흘깃흘깃 향하는 시선을 감추지도 않고 꺼낸 말이었다. 니노미야는 그런 아이바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가방을 돌려 메었다. 지퍼를 열고 손을 집어넣으면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선물이라고 붉은 리본이 묶인 농구공이 들려 나왔다. 아이바의 이니셜과 요즘 좋아하기 시작한 선수의 등 번호가 적힌 것이었다.

 

금세 아이바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이바의 좋은 점 중 하나였다. 좋은 감정은 바로 드러난다는 것. 그것도 상황이 적절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라서 장점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아이바는 농구공을 받아들고 두어 번 공중에 던져본 후에 공을 옆구리에 꼈다. 어때. 멋있어?

 

거뭇거뭇하게 그을려 새겨진 이름이 노란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게 꼭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니노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동아리 시간에는 개인 소유의 공을 쓸 수 없을 테니까 아마 장식용으로 끝나게 될 물건이었는데 그럼에도 아이바는 꽤 들뜬 얼굴이었다.

 

시합에 이거 쓰게 해달라고 졸라볼까.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니노미야는 그만두라고 했던가. 대충 그런 말로 받아쳤다. 그러고 나서 몇 마디가 더 이어지고. 침묵이었다. 보통은 이쯤에서 그럼 내일 보자며 헤어지거나 자고 가면 안 되냐고 붙잡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그날은 어느 것도 하지 않은 채 공을 내려다보고 서 있을 뿐이어서. 기다리던 니노미야가 그럼. 하고 말을 꺼냄과 동시에 입이 열렸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린다. 곳곳에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에 찬 비명이 쏟아졌다. 대부분이 기대나 설렘, 긴장 같은 것들이다. 환호에 가까운 비명을 따라 하얀 입김들이 굴뚝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길 위를 드륵드륵 굴러가는 바퀴 소리가 고동을 높이고 신문지로 가려진 결과용지가 펭귄들처럼 뭉쳐 선 수험생들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키보다도 훨씬 높다란 판넬이 몇 개나 굴러와 앞에 놓였다.

 

곧이었다. 정말로 곧. 아이바는 급기야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문지르며 판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덮고 있는 신문지에는 큼지막한 타이틀이 몇 개나 적혀있었는데도 그런 문장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니노미야는 그런 아이바를 보며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던 핫팩을 꺼내 아이바의 손에 끼워 넣어주었다. 아이바는 갑작스레 닿는 따끈한 온기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가 이미 무심하게 돌아가 버린 하얀 뺨에 콕콕 찍힌 점을 보며 비장하게 핫팩을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핫팩과 겹쳐 쥔 수험표는 이미 구깃구깃 구겨진 지 오래였다. 132. 다행히 굵게 적힌 숫자가 새겨진 주름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니노미야는 마지막으로 아이바와 자신의 수험번호를 확인하고 남은 핫팩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샤카샤카. 발열제가 흔들리는 소리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줄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는데 사실은 정반대였다.

 

니노미야가 준비해왔을 리 없는 핫팩은 당연히 아이바의 작품이었다. 아이바가 준 걸 다시 아이바에게 주고, 준 사람은 또 그걸 받아들어서 열심히 주무른다니. 그것대로 우스워서 푸흐 작게 웃음이 터진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 열기가 손바닥을 따뜻하게 덥혔다. 59. 59. 59. 00. 정각이 되기 무섭게 시계를 보고 있던 선생님들이 붙어있던 신문지의 가장자리를 쥐었다. 단번에 후드둑 떨어져나가는 신문지 뒤로 두 자리, 혹은 세 자리의 숫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까맣게 늘어선 숫자의 나열을 조금이라도 먼저 보려 학생들은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쭉 내밀었다.

 

신문지가 뜯겨나간 순간부터 니노미야의 머릿속에서는 두 개의 숫자가 빙글빙글 이어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132. 79. 132. 79. 첫 번째 줄에서부터 차근차근 흘러가기 시작한 시선이 길을 따라 돌았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를 가득 메우고 초조함이 차올랐다. 한 줄 한 줄 남아있는 숫자가 줄어갈수록 더욱 그랬다.

 

잘못 봤나. 수험번호가 이게 아니었나. 비슷한 숫자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탓에 번호를 읽어내려가는 속도가 평상시보다 두 배는 느렸다. 긴장할수록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서 니노미야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이미 뜨끈해진 핫팩을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있다. 겨우 두줄의 숫자를 남겨놓고 첫 번째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79. 눈이 멈춘 곳에는 비교해볼 필요도 없이 틀림없이 그렇게 적힌 숫자가 있었다. 니노미야는 기뻐할 틈도 없이 곧바로 가로줄을 따라 눈을 옮겼다. 시험을 잘 보기도 했고 이 경우에는 사실 처음부터 상정되어 있던 대전제 같은 거였으니까. 거만도 오만도 아닌 생각이 지나갔다.

 

급하게 찾으려 할수록 시야가 흐리게 돌았다. 알고 있는 데도 집중이 되지 않아서 눈을 깜빡이고 다시 줄을 따라 옮긴다. 미로찾기라도 하듯 학생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니노미야의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마지막 줄을 읽으려 니노미야는 발뒤꿈치를 들고 몸을 이리저리 기울였다.

 

“찾았다.”

 

그때였다. 목소리가 멍하게 떨어졌다. 울음과 환희로 뒤섞인 현관 앞은 이전보다 더 소란스러워서 그런 작은 목소리가 들릴 리 없을 텐데도 깔끔하게. 꼭 주변의 소리를 모두 지워버린 것처럼 귀에 박혀 들었다. 니노미야는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낯빛으로 굳어버린 아이바가 멍하게 숫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조차 결과가 믿기지 않는 듯이. 종이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가장자리에 떡하니 적힌 132 하는 숫자를.

 

실감하자마자 또르륵 눈물이 아이바의 뺨을 굴러떨어진다. 한번 넘쳐흐르자 주체할 수 없어진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울 때 울면 감기 걸릴 텐데. 안 그래도 찬바람에 빨갛게 얼어있던 코끝이 더욱 발갛게 물들었다.

 

“못생겼어 아이바씨.”

 

점토에 얼굴을 그려 넣고 손으로 꾹 눌러버린 것처럼 찌그러진 얼굴에서 이제는 거의 물줄기가 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뚝 뚝 그런 효과음을 넣는 것조차 귀찮아질 정도로.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녹은 손으로 가볍게 꾹꾹 눌러 닦아주던 니노미야를 아이바는 와락 끌어안았다. 꼭 이미 다 컸는데도 아직 자신이 조그만 강아지인 줄 아는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품에 고개를 묻고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니노 하는 이름을 늘어뜨렸다.

 

커트라인의 반도 안 되는 점수에서 여기까지. 열심히 했으니까. 그게 상이라도 되는 듯이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등을 끌어안고 도담였다. 토닥토닥. 규칙적으로 니노미야의 손이 아이바의 등을 두드린다. 눈물이 쉴 새 없이 아이바의 눈가를 적셨다. 부모님께 전화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다정해진 목소리가 중얼거리는 걸 아이바는 칭얼거리듯 더욱 꽉 끌어안는 것으로 받는다.

 

뭐 조금은 늦어도 되겠지. 분명 조마조마해 하며 연락을 기다리고 계실 두 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니노미야는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어 양손으로 쥐었다.

 

저기 있잖아. 아이바는 목에 감고 있던 빨간 머플러를 풀어 니노미야의 목에 둘러주었다.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이기도 하고 뇌물이기도 한데. 뇌물? 니노미야가 되물었다. 아이바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니노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어. 굳은 목소리였다. 여러 번 고민하고 생각한 게 티가 나는. 대부분은 니노미야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라든가. 사실 같이 가고 싶은 게 아니면 어쩌지 라든가. 방해가 되면 어쩌지 라든가. 대충 그런. 현관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열심히 고른 머플러도 상자가 아니라 목에 감고 나간 거였는데 마음을 다잡게 해준 건 오히려 니노미야가 건넨 그 농구공이었다.

 

아마도 집에 놓여있게 될 그 농구공은 볼 때마다 니노미야를 생각나게 할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면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도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사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사이로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서. 적어도 기회는 얻고 싶었다.

 

물론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이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공부를 해서 갈 수 있을 학교들 중에 좀 더 높은 곳을 고르고 그게 니노미야가 제 1 지망 학교에 적어낸 학교라는 사실은 투명하게 무언가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짝사랑. 아마도 그런 이름을 할 무언가를.

 

아까도 공부를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혼자서는 어려워서. 그 다음 말은 조금 더 쭈뼛거리며 이어졌다. 요건은 도와줄 수 있느냐는 거였지. 같이 가고 싶은데 혹시 같은 생각이고 그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조금 더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르는 뇌물과 함께.

그래.

 

니노미야는 그렇게 답했다. 아이바의 예상보다는 조금 더 깔끔하게. 듣고 싶었지만 강요할 수는 없었던 말을 들은 사람의 답이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누가 무엇을 포기하고 그래야만 하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그런 증거였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눈이 녹아 봄이 될 즘에야 니노미야는 깨닫는다. 눈과 함께 사라져버린 불안감과 모든 문항에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시험지를 들고. 결국 니노미야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던 거라고. 그게 정답이었다는 사실을.

 

“있지 니노.”

 

겨우 훌쩍임을 멈추고도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아이바가 여전히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니노미야를 불렀다. 소란이 채 가시지 않은 현관 앞이었다. 아이바는 조금 전에 핸드폰을 꾹꾹 눌러 부모님께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했고 니노미야는 누나에게 짧은 메시지로 합격 사실을 알렸다. 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그것도 예상한 대로였지만. 이것도 예상한 것의 하나에 들어가서 니노미야는 하던 게임을 잠시 일시정지해두고 입을 열었다.

 

“지금 고백하면 못들은 척 할거야.”

 

딸꾹. 만화처럼 터져나온 딸꾹질 소리를 들으며 니노미야는 다시 게임을 진행시켰다. 아니. 저기. 에? 당황스러움의 끝에 터져나온 것은 하나의 물음표였다.

 

“못생겼잖아. 안받아줄거니까.”

 

내일 다시 해. 꽃도 한다발 챙겨오고. 보던 만화에서 고백씬 같은 게 등장하면 심드렁하게 넘겨버리는 타입이었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가 나왔다.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듣는 것은 아이바의 몫이어서 니노미야는 물음표가 가득한 아이바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두고 게임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디까지 운명이었을까. 니노미야는 생각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운명이었고 어느 부분이 아니었을까 하고. 자유 의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개념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낭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고 모든 게 선택이었으며 노력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니노미야가 누른 마지막 공격 버튼으로 보스가 바닥에 쓰러진다. 열린 보물 상자는 팀원들끼리 나눠갖고 니노미야는 던전에서 빠져나왔다. 이건 운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는 팀원들을 만나는 건 운명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평소 같았더라면 고르지 않았을 사고의 루트를 연다. 띠링. 그런 명랑한 효과음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기도 했다. 나중에 정정하게 될 생각이더라도 지금은 이게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더라도 보이지 않는 우주의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 작용한 게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정반대일지도 모르는 노력이라는 게 사실은 가장 운명적인 게 아닐까 해서.

 

더없이 운명적이라는 생각이었다. 니노미야도 아이바도. 만남만큼은 운명적이었다 해도 결국 노력의 산물이 된 모든 것들이.

 

기대어있던 아이바가 허리를 들었다.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니노미야는 이미 꺼져있던 게임기를 가방에 집어넣는다. 찬 공기때문인지 제법 붉은 기는 가셨지만 시무룩함은 열배정도 더해진 얼굴로 아이바가 니노미야를 내려다보았다.

 

“있지.”

 

“그래도 말하면 안될까?”

 

“좋아해.”

 

정말 받아주지 않을 참이었는데 속절없이 웃음이 흘렀다. 생각했던 게 어긋나 그런지 푹 작아진 목소리와 분명히 울음때문이 아닌 훌쩍임 때문에. 데리고 가서 따뜻한 것부터 먹여야겠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니노미야는 고민하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가 그대로 걸음을 돌렸다. 니노미야의 손이 그세 차가워진 아이바의 손을 감싸쥐었다. 나도.

 

짧게 떨어진 대답 다음으로 바로 말이 이어진다. 근데 이 근처에 오뎅 파는 곳 있었나. 덕분에 아이바는 눈 앞에서 벌어진 운명적인 상황을 잠시 받아들이지 못했다가 멀어지는 니노미야의 옆을 바로 따라붙으며 급하게 기억을 뒤적였다.

 

“어, 어. 여기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데.”

 

“그럼 거기로 가자.”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말인지도 몰랐다. 아이바가 니노미야를 좋아하고 니노미야도 아이바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아서. 움찔거리기만 하던 아이바의 손이 니노미야의 손을 마주잡는다. 아프지는 않을 정도로 조금은 강하게. 힘을 주어서. 적어도 니노미야가 아이바네 집에 도착해 아이바네 부모님께서 준비해주신 3인분의 메인 요리들을 마주하기 전까지 아마 적어도 한시간 동안은 풀리지 않을 얽힘이었다. 운명으로 묶인 붉은 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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