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四つ葉のクローバー座
네 잎 클로버 별자리
쌔그
♬ 〈 들어가기 전에 〉
글쓴이는 음악, 의학 전공이 아니므로, 본 글에 서술된 내용과 실제가 다른 부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를 최대한 막기 위해 자료조사를 거친 뒤에 썼으나, 미처 잡아내지 못한 오류가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
♬
아이바 마사키는 클라리넷 케이스를 꼭 끌어안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룸 셰어를 하는 직장 동료에게서 주민센터에서 이런저런 동호회 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알림판이 패치워크처럼 꼼꼼하게 메워진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바는 고등학생 시절, 4월 초 신입 부원 유치에 열을 올리느라 요란한 알림판을 떠올렸다. 아이바는 주민센터에 발을 들여놓은 지 5분 만에 생각했다. 역시 돌아갈까.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금요일 밤, 아이바는 룸메이트인 사쿠라이와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A부터 Z까지 털어놓았다. 아이바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얼굴이 토마토가 될 정도로 취해서는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다가 페이드 아웃이었다. 커튼 걷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니, 같이 술을 마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멀쩡한 사쿠라이가, 아침 인사를 주고받자마자 아이바를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엣, 뭐야? 뭐야? 아이바는 허둥대면서도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딱 눈이 마주친 사쿠라이의 양손에는 오색찬란하고 빤딱빤딱한 전단이 들려 있었다. 사쿠라이는 전단지에 흐르는 광택보다 더 매끈한 얼굴이었다.
「 나는 정면승부 타입이거든. 」
‘정면승부’라는 단어는 다소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사쿠라이의 나긋나긋한 말투는 「신사들의 화법, 젠틀과 매너의 기초」 같은 제목이 붙은 책이 있다면, 반드시 부록 CD에서 모범 교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열의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물을 펄펄 끓여 오백 엔짜리 크기 공기 방울을 만들 것 같았다.
아이바가 사쿠라이에게 횡설수설 늘어놓은 고민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는, 아이바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사회성'과 ‘생존형 외향성'이야 갖추고 있어서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건다는 전제가 있었고, 직원에게 배포된 고객 응대 매뉴얼 대사, 예를 들어 "체크인/체크아웃하시겠어요?"에 한정되긴 했지만) 대화는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고, 치바 지사에서 도쿄 본사로 이직했음에도 '원래 본사에서부터 근무한 것 같다'는 아이바 마사키 서른 생애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지정할만한 쾌거를 이뤄냈다. 사쿠라이를 비롯한 동료들은 아이바의 '외향성 오프 모드'를 보곤 이렇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아이바의 '오프 모드'는 말 그대로 오프 모드로, 말을 붙이는 것은 물론이요 대화할 때 시선조차 제대로 맞추기 어려워해 낯선 이와의 대화 한 번에 머릿속 경광등에 빨간불이 켜져 위이이이이잉 울려대는 초 내향적 인간이었다.
(아이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적적으로 직장 동료에서 룸 셰어를 할 정도로 가까워진 사쿠라이 쇼는, "듣고 보니까 엄청 무리했구나. 나랑 있을 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돼"라는 말로 아이바를 위로했다. 아이바는 따스한 동료의 배려에 눈물 홍수 위기를 맞았다.
「 …이대로라면 곤란해서. 」
아이바는 울컥 올라온 눈물을 꾸역꾸역 눌러 참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쿠라이는 그 뒤로 아이바가 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아이바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안주를 열심히 먹는 사쿠라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고, 취기에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을 추스르기도 어려워 사쿠라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개책이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아이바는 사쿠라이가 한 아름 들고 온 전단지 중에서 아마추어 취주악단 전단을 들어 올렸다. 「 하고 싶을 때 하는 윈드 오케스트라」라니. 카피라이팅을 누가 했는진 몰라도 이름부터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취주악 오케스트라임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설명도 굉장히 간결했다. 「 자격 조건: 취주악을 하고 싶은 사람 — 초심자, 아마추어, 프로 모두 OK! 」 와 엔터 두 번으로 띄어 쓴 여백 뒤 가지런하게 인쇄된 지휘자와 콘서트 마스터의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 끝.
“나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쿠라이가 식탁 위에 숙취해소제와 초콜릿 우유를 함께 올려두었다. 어쩌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지도? 사쿠라이는 전단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냉장고를 열어 진열된 식료품을 훑어보았다. 아이바는 초콜릿 우유부터 뜯어 빨대를 꽂았다. 식도를 타고 내려오는 코코아 분말과 원유의 혼합이 전날 밤 무리한 아이바의 위벽을 진정시켰다.
“그것도 네가 취주악에 관심이 있어야지.”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진 취주악부였어.”
“정말? 악기는?”
“클라리넷.”
베란다에 널어놓은 하얀 티셔츠가 깃발처럼 펄럭였다. 집 안으로 들어온 가을바람에 전단이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날리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아, 주워야지. 아이바가 전단지를 주우려 몸을 낮춘 순간, 무릎을 꿇은 사쿠라이가 아이바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하자!!!”
“에?! 엣?! 에엑?! 뭘?”
“취주악! 윈드 오케스트라! 클라리넷!!”
아이바는 당장에라도 증기기관차처럼 콧김을 퓽퓽 내뿜을 기세인 사쿠라이를 겨우 진정시켰다. 눈이 동그랗고 큰 덕에 만화마냥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빔이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삶이 청춘 스포츠 만화였다면, 사쿠라이는 분명 ‘코시엔에 가자!’를 외치는 열혈 야구 소년이었겠지. 아이바는 자신의 삶의 장르가 청춘 스포츠가 아닌 평범한 일상 에피소드임에 안도했다.
생각해보니, 사쿠라이는 치바에서 잠깐 파견 근무를 했을 때도 주말이나 오프 때 꼭 도쿄에 올라갔었다. 동호회 활동이라며, 괜찮다면 놀러 오라며 티켓을 건네주어서 작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가 올라가서 공연을 봤었다. 윈드 오케스트라 공연이었다. 근무지가 도쿄였다면, 낯가림이고 뭐고 다 던지고 오케스트라에 함께 하고 싶다고 지원서를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멋진 공연이었다. 작년에 정기공연했던 동호회가 여기야?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나랑 동호회 같이 하자는 말이 됐는데. 마침 클라리넷 빈자리가 하나 나서. 평소의 차분한 텐션을 되찾은 사쿠라이는 멋쩍게 웃었다. 꼭 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였다. 아이바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손을 빼 내저었다.
"잠시만, 무리야. 나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 「그 사람」이 플루트를 연주했다며!"
아이바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매만졌다. 아이바의 손끝이 클라리넷 키를 누르듯 목덜미에 난 오각형 별 모양 점을 지나쳐갔다. 아이바의 머릿속에 플루트 음색을 닮은 소리가 계이름을 말하듯 한 음절 한 음절, 천천히 속삭였다. 아이바의 입술이 그대로 뻐끔거리다가 끝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의 상대」는 과장이라니까."
네임 - 조디악 사인 신드롬(Name zodiac signs Syndrom).
일명 '네임사인'이라 불리는 이 증후군은 맥박이 가장 잘 느껴지는 곳에 '육체와 영혼의 합이 가장 잘 맞는 상대'의 정보가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네임-조디악 사인'이란 명칭은 몸에 새겨진 정보의 모양이 별 모양과 별자리와 닮은 것 같아 '조디악 사인(zodiac signs)', 그리고 그 흔적에 손을 가져다 대면 상대방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네임(name)'을 붙인 합성어였다. 네임사인으로 새겨진 이름은 네임사인이 나타난 당사자와, 나타난 이름의 주인만이 읽을 수 있었다.
몸에 갑자기 별과 별자리 모양이 나타나는 것도, 손을 대면 자신 외에는 이름을 읽을 수 없는 이유도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서로의 이름이 네임사인이 나타난 연인은 그렇지 않은 연인보다 아드레날린, 도파민이 5배 더 많이 분출된다는 연구 결과와 그에 관련된 논문이 쏟아져나왔다. 또한 가까이 있으면 안정감을 느낀다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이런 현상도 뇌파 관찰 실험과 연구로 증명되었다. 커플이 아닌 경우엔 동료 의식이 끈끈하고 강했고, 남다른 유대로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이 관계성을 두고 ‘전생에 연이 있다’, ‘운명’, ‘소울메이트’라는 표현을 썼고. 학자들은 그 관용적인 표현에 ‘네임메이트’라는 명칭을 붙였다. 학자들은 여러 케이스를 통해 ‘네임사인’ 발현 조건으로 네임메이트로 지정된 사람끼리 서로의 유전 정보를 교환한다 — 즉 신체 접촉이 있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물론 신체 접촉을 거쳤다고 해서 바로 네임사인이 생기고, 네임메이트의 이름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거문고자리의 베가, 독수리자리의 알타이르, 백조자리의 데네브가 이루는 ‘여름의 대삼각형’ 별자리처럼, 네임사인은 세 개의 밝은 별을 가진 별자리가 생겨야 비로소 완성되고, 이름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바의 고민 두 번째는, 본인이 이 네임사인 증후군을 진단받았다는 데 있었다.
대학 졸업 학기, 취직 준비 하다가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빠른 시일 안에 추가 검사를 하라는 안내문이 왔다. 덜컥 겁이 나 부리나케 지정 병원으로 가서 면담했다. 의사는 아이바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거기 점이 여러 개 있죠? 별 모양 점. 아이바는 목덜미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냥 특이하게 생긴 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바는 그 전날까지만 해도 네임메이트를 소재로 한 순정만화를 읽으며 주인공들의 삽질에 답답해 침대 위를 뒹굴었었다. 낯선 이름이 머릿속에서 들리자, 만화가 현실이 됨을 깨달았다.
네임메이트를 찾을 단서는 두 가지. 이름과 기억의 단편으로 남은 단서였다. 어디에서나 네임메이트와 만난 기억은 아주 선명하다고 했다. 멜로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이라서. 의사들은 ‘생존 본능’. 네임메이트인 사람은 ‘둘 다’. 아이바는 이력서를 쓰다 지치면 네임사인을 만지며 기억을 더듬었다.
네임메이트를 한 번에 떠올릴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만화의 명장면을 몇백 번이고, 주변에서 질린다고 할 정도로 읽어 펜 터치 하나하나를, 활자의 간격과 서체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한 것처럼. 겨우 교집합을 만들어냈다. 아이바의 네임메이트(추정)는 아이바 또래의 남자였다. 일본인이었고. 플루트를 연주했고….
“…네 잎 클로버.”
아무래도 그때 나는, 낯을 덜 가렸던 모양이네. 아이바는 네임메이트(추정)에게 말을 걸었던 그 때 용기 반의반만이라도 지금의 자신에게로 가져오고 싶었다. 네임메이트를 만나면.
「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까. 」
이대로라면, 소심해서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는 나라면. 전부 전할 수 없어.
“플루트를 계속하고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애초에 플루트를 부는지 확신도 없고.”
“혹시 모르잖아. 우연이 세 번이면, 앞으로 더 만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엄청 긍정적이네…."
누군가는 굉장히 낭만적인 증후군이라 했다. 네임사인은 기억상실증만큼 여기저기서 소재로 자주 쓰였다. 네임메이트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별자리 도안을 만들어 문신을 새겼고, 타투이스트의 포트폴리오엔 '네임사인', '이름별자리', '운명의_상대', '네임메이트', 등이 해시태그로 붙은 게시글들이 올라오곤 했다. 아이바는 SNS를 탈퇴하며 중얼거렸다. 현실은, 멜로가 아닌데.
“우연이 세 번이면 운명이야.”
사쿠라이 쇼는 설득력과 추진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세 번의 기회를 놓친 게 아니라?”
“그러면 몸에 나타날 리가 없지. 인간의 몸은 쓸모없는 활동을 하지 않아.”
“….”
“접점을 계속 만들어 놓고, 여러 사람과 교류하다 보면 정말 네가 네임메이트를 만났을 때 한마디라도 먼저 할 수 있는 내성이라던가, 요령이 생길 것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아이바 마사키는, ‘설득’과 주위 사람의 ‘추진력’에 잘 휩쓸리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 일주일 뒤, 목요일. ― 현재로 돌아와서,
아이바는 사쿠라이를 기다리는 동안 주민센터 화장실을 세 번 들락날락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과민성 대장 증후군. 긴장하면 예민해지는 몸뚱어리는 이번에도 문제였다. 이럴까 봐 물도 많이 마시고 유제품은 입에도 안 댔는데. 아이바는 세면대에서 손을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씻고 나오며 집에 얌전하게 누워 있을 바디필로우 인형 생각을 했다. 끝나면 꼬옥 안고 뒹굴거릴거야.
그래서 그런데, 사쿠라이 군, 언제 와…. 아이바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바의 상체는 어느새 까만 클라리넷 가방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바디필로우용 길쭉한 토끼 인형과 클라리넷 가방은 품에 가득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클라리넷 가방이 바디필로우만큼 푹신하지 않은 거였지만. 머릿속 경광등은 노란불을 켜둔 채로 느릿하게 돌았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아이바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복도와 연습실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색 운동화였다. 아이바는 다 가려질 리가 없는 클라리넷 가방을 끌어안고, 위로 눈만 살짝 내놓았다. 시야는 한순간에 하얀 운동화에서 반쯤 감긴 눈으로 옮겨갔다. 피곤함일지 권태일지 모를 우수를 담은 보리차 색 동공이 아이바를 마주치자 천천히 커졌다. 고요 속에서 어색한 시선만이 오갔다. 맥박 소리는 심장에 크레셴도 기호라도 붙었는지 점점 커져만 가는데.
“…아, 안녕하세요.”
머릿속 경광등의 알고리즘은 어떻게 된 건지 초록불로 바뀌었다. 아이바의 보폭으로 겨우 다섯 발자국 떨어진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맑고 밝은 연갈색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동공에 비친 형광등 빛 동그란 하이라이트가 짤강거리는 얼음처럼 반짝거렸다.
“안녕하세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인사를 주고받기까지의 과정에 리타르단도를 붙였는지, 아니면 늘임표를 붙였는진 모르겠지만 10초도 안 되는 시간이 10분 같았다.
선배. 뉴페이스 온 것 같은데? 남자는 뒤에 선 사람에게 아이바의 존재를 알렸다. 선배라고 불린 남자는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보다 훨씬 더 무기력한 인상이었다. 쇼 쨩이 말한? 쇼 쨩은? 없어. 아, 라인 왔다. 늦는대. 쇼 쨩이 늦다니, 별일이네. 아이바는 선후배의 대화를 듣고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꺼내 라인 앱을 열었다. 1분 전에 보낸 [ 살려줘! ] 딱 하나만으로 사쿠라이가 처한 상황이 짐작이 갔다. 다잉 메시지가 돌파구가 되는 건 추리 소설이나 드라마 한정이라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사쿠라이는 사쿠라이대로 대 핀치인 상황이었다. 이미 퇴근 카드를 찍은 아이바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었고.
“차라도 한 잔 드실래요? 녹차밖에 없지만요.”
후배 쪽이 커피포트에 정수기 물을 받았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 사람이 있다면 괜찮을 거야. 막연한 안정감이 들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신뢰가 갔다. 연습실 공기가, 편안해졌다. 아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통이 가라앉았다. 심장 소리는 끊임없이 아첼레란도, 포르티시모, 비바체, 또 크레셴도로 뛰었다. 아마 이런 퍼커션 악보가 있다면 팀파니에 머리를 박을 거야. 아이바는 녹차 티백 꽁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커피포트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바는 맞은편에 앉은 단원 2인조를 힐끔 바라보았다. 두 남자는 의자 위에 내려놓았던 가방에서 악기를 꺼내 익숙하게 조립하고 있었다. 선배는 바순이고, 후배는 플루트였다. 그들은 공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아이바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클라리넷이라고 들었는데요.”
특히, 후배—플루트 쪽이 열심이었다.
사쿠라이 씨가 단체 라인 방에서 ‘클라리넷 새로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직장 동료고 친구예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했거든요. 단체 라인방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사쿠라이는 아이바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단체 라인방은 아이바가 정말 오케스트라를 할 마음이 있을 때 초대하겠다고 했었다. 체험 입부네요. 플루트는 아이바의 클라리넷 가방을 빤히 보다가 싱긋 웃었다.
“언제부터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했어요.”
“엄청 오래됐네요….”
“제, 제대로 한 건 중고등학교 취주악부 6년이고. 공부다 알바다 취직이다 뭐다 해서, 바빠져서 취미로만 가끔…이라서. 지금은 완전 초심자 수준이 되었는걸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그나저나 신기하다. 그렇게 오래 하는 사람이 있구나. 당장 이 선배도 대학교 때 바순 시작했는데. 사쿠라이 씨도 유포니움 분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플루트 했다던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신기해.”
“내가 선배 봐서라도 올해 안에 다른 악기 배운다.”
플루트가 선배 바순을 흘겨보았다. 바순은 콧노래를 부르며 플루트 후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 플루트 하잖아. 그거야 바쁘니까! 창작자가 편집자의 고통을 알아?! 넌 내 담당 아니잖아. 아, 진짜 내가 퇴사만 하면 피콜로 한다. 내가, 어? 그러잖아도 코사카 씨 피콜로 후임 키우고 싶어 하던데. 플루트랑 피콜로랑 연주 방법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고 하니까…. 바순은 열을 내느라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진 플루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플루트가 어정쩡하게 클라리넷을 든 아이바를 인식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동그란 귀가 벌겋게 익었다.
“…추한 꼴 보여서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편집자가 바쁘고 힘들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서요….”
"아무튼, 오늘은 체험 입부지만 잘 부탁드려요. 아이바 씨."
아이바 씨. 듣고 있던 아이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 이름을 알고 있어. 플루트 뒤에서 바순을 마저 조립하던 선배의 눈도 조금 커졌다. 사쿠라이가 라인방에 내 이름을 말해줬나? 아니다. 아이바는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와도 라인 한 줄, 메일 한 통도 주고받지 않았었는데. 중고등학교 때 취주악부 동창인가? 그렇다면 ‘아이바’ 씨라고 부를 리가 없는데? 으아, 내가 너무 민감하게 생각하는 걸까? 세상이 팽글팽글 돌아갔다. 제 이름 알고 계세요? 큰 맘 먹고 질문을 꺼내려고 해도, 소리가 목 안에서 턱 막혔다. 플루트는 뒷목을 만지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아이바의 클라리넷 가방을 가리켰다.
“이름 적혀 있어서요.”
아, 괜히 이것저것 망상했잖아. 아이바는 민망해져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타이밍 좋게 사쿠라이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바! 나 살았어! 금방 갈게!! 헐떡이는 소리가 웅웅 울리는 걸 보아하니 복도나 지하철일 터였다. 아이바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씨익 웃는 플루트를 보고 전화기에 속삭였다. 이젠 날 좀 살려줘.
클라리넷 파트는 친절했다. 아이바가 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아이바에게 천천히 맞추어주었다. 클라리넷에 숨을 불어넣는 요령, 소리를 매끄럽고 정확하게 내는 방법 등을 일러주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6년을 취주악부에서 구른 손가락과 입술과 혀와 폐는 금세 그 시절의 기량을 냈다. 성인이 대부분인 이 윈드 오케스트라는 삐죽삐죽 날이 선 사춘기 청소년들이 모인 취주악부보다 더 둥글둥글하고 훈훈한 분위기였다.
“어때?”
연습이 끝나고, 유포니움을 끌어안은 사쿠라이가 물었다. 아이바는 사쿠라이의 연주를 듣기 전까진, 사쿠라이가 유포니움보단 클라리넷이나 플루트. 혹은 트럼펫이나 트롬본도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몸이 몇 개인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앞서서 사람들을 잘 이끄는 것 같고…. 아이바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전부 친절하시고. 내가 연습을 더 하면 될 것 같아.”
“내일도 연습 있는데, 올래? 모임은 매주 목·금·토.”
“응. 내일 일찍 마치면.”
사쿠라이는 마음이 놓였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이다, 별로면 어떡하지, 엄청 걱정했다구! 사쿠라이가 껴안은 금색 유포니움에 형광등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아, 그래서 유포니움인가. 튜바 다음으로 무거운 금관악기. 부드럽고 튀지 않은 음색으로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받쳐주어 돋보이게 하면서도, 그 무난한 음색으로 솔로로도 손색없는 악기. 유포니움 엄청 어울리네. 정말? 고마워. 사쿠라이가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클라리넷을 오래 불었더니 볼이 안이 얼얼했다. 아이바는 양 볼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에게서 조언을 구하는 단원, 악보에 메모하는 단원.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며 연습실 문을 열고 나가는 단원, 〈정기연주회 프로그램 곡 추천〉이라고 적힌 화이트보드 밑에 연주곡 제목을 적는 사람들….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고등학교 취주악부의 풍경과 다름없었다. 그중에서도 아이바의 눈에 제일 띄는 이는 따로 있었다. 아이바는 악기를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하는 두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 사람."
“누구?"
"저기, 플루트. 바순 담당 남자분이랑 얘기하시는 분….“
"아, 저 바순은 오노 씨. 네 바로 옆에 앉은 플루트는 니노미야 씨.”
아이바의 손에서 리드가 잎사귀에 맺힌 아침이슬이 톡 떨어지듯 미끄러졌다. 아이바의 두 눈은 카키색 야상 파카에 팔을 꿰어 넣는 남자에게로 고정되었다. 75년 주기로 지구에 찾아온 혜성을 찾아낸 천문학자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듯이. 머나먼 기억을 떠올리고 놀라움으로 끝이 없는 새하얀 설원처럼 번져가듯이.
“…플, 루트가…?”
“니노미야. 니노미야 카즈나리 씨. 카즈야라고 쓰고 카즈나리라고 읽는대.”
아이바는 목덜미를 더듬었다. 손끝이 아이바의 목 위에 뜬 별을 짚었다.
니, 노, 미, 야, 카, 즈, 나, 리.
아이바의 성군(星君)에 붙여진 이름이, 피아노 건반을 눌러 음계를 만들어내듯이 귓가에 속살거렸다.
“…니노미야, 씨….”
아이바는 저도 모르게 별자리들의 이름을 불렀다. ‘니노미야’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바는, 30년 평생 대중가요에서 불러대는 ‘너와 나 단둘이’니 ‘오직 너와 나만 이 세상에 존재해’ 같은 가사가 넘쳐나도 공감을 못 했었다. 니노미야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처음 인사를 받아주었던 때처럼 미소를 짓자. 순식간에 밤이 실내로 밀려 들어왔다. 니노미야의 뒤로 은하수가 흐르고, 유성군이 쏟아졌다. 아이바는 처음으로 세상에 둘만 남겨진 것 같다는 표현을 이해했다. 니노미야가 가볍게 고개를 꾸벅였다.
“다음 연습 때 뵈어요.”
문이 닫혔다. 별이 숨는 아침이 되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이바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의자에 짚었다가, 사쿠라이의 옷깃을 덥썩 잡았다. 뭐야, 왜 그래? 사쿠라이가 놀라 사시나무처럼 더 오들오들 떠는 제 룸메이트를 내려다보았다. 살려줘. 입술이 바짝바짝 메마르고, 초록불을 유지하던 경광등이 노란불을 거치지도 않고 시뻘건 색을 뽐내며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아이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진짜 죽나? 이 「살려줘」가 아이바 마사키 30년 인생의 마지막 한 마디이자 다잉 메시지가 되나?
다행스럽게도, 사쿠라이는 그의 룸메이트가 다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을 인간은 아니었다. 사쿠라이는 아이바의 양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아이바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어떡해’, ‘살려줘’, ‘큰일이다’, ‘진짜야?’를 웅얼웅얼 쏟아냈다. 사쿠라이는 아이바의 어깨를 두드려 아이바의 정신을 불러왔다.
"주어 목적어와 이유를 빼놓고 설명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니, 니노미야 씨가. 니노미야 씨가."
"네임메이트?"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일 힘이 없었다. 진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잖아.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구나. 장난 아니다. 사쿠라이가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런데?”
아이바는 몇 년 전 우연히 읽은, 네임사인을 주제로 쓴 칼럼의 구절을 떠올렸다. 로맨스 소설 작가를 다수 담당한 편집자의 글이었다. 그 칼럼의 부제는 다음과 같았다. 《‘행복’으로만 과대포장되고, ‘행복’만이 인정되는 네임사인과 그들을 닮고자 하는 일반인들의 로맨스에 대하여.》
「 네임사인이 온전히 나타날 확률은 전 세계 인구 중 10%다. 일본 인구 중 약 9%가 AB형, 왼손잡이가 10%니 의외로 주위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와 10%의 만남은 흔히 말하는 ‘로맨틱’이지만. 왼손잡이와 왼손잡이, AB형과 AB형의 만남이라고 하면 로맨틱의 환상은 손쉽게 깨진다.
인간들은 ‘네임메이트’ 혹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궁극의 특별함’을 부여하려 하고, ‘네임메이트’와 ‘운명’으로 정의된 관계성이 완벽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완전무결함에 집착한다. 네임사인의 화려한 포장을 벗겨보면, ‘네임메이트’도 ‘운명’도 웃고 화내고 울고 즐거워하는 ‘아주 보통의 연애’와 다를 게 없는데.
그저, 많은 이들이 나의 연애와 나의 사회적 교류를 조금 더 극적으로, 특별하게 여기고 싶을 뿐이다.
그런 욕망이 네임메이트의 망상으로 이어져 부자유와 속박을 정당화하며, 네임메이트가 완벽한 사이라고 세뇌한다. 」
“…니노미야 씨는, 네임메이트를 만나고 싶을까?”
칼럼 작가의 이름은 니노미야 카즈나리였다.
그의 프로필에 실린 자기소개는 딱 한 줄이었다. 「카즈야라고 쓰고 카즈나리라고 읽는, 니노미야 카즈나리.」
♬
마사키의 외가인 도쿄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지 두 장에 빼곡하게 찬 이런저런 안부 인사와 근황 전달을 다 자르고 요점만 추려내면, 「 준이 학교에서 취주악 합주 공연을 하는데, 괜찮다면 응원해주지 않을래? 마사키가 와준다면 준이 기뻐할 거야. 공연이 끝나면 함께 특대 파르페 먹으러 가자. 」 —였다. 장소는 오차노미즈에 있는 작은 소극장이었다.
마사키의 집에서 오차노미즈까지의 거리는 32km. 가는 방법은 총 세 가지. 첫번째. 집에서 10분 거리의 역까지 걸어간 다음 464엔을 내고 41분 동안 소부센을 타기. 두번째. 9천 8백 엔에서 만 천 엔을 내고 택시에 40분간 탑승. 세번째. 어른이 운전하는 차에 타서 40분간 꾸벅꾸벅 졸기.
초등학교 5학년 아이바 마사키에겐 만 2천 엔이라는 큰 돈이 없었다. 따라서 2번 방법은 포기. 3번 방법은 하필이면 공연 당일 아침에 차 타이어에 구멍이 나는 불상사가 생겼다. 곧장 정비소로 향했지만 차 자체에서 이것저것 손볼 것이 많았다.
결국, 마사키는 500엔을 쥐고 홀로 소부센을 탔다. 특대 파르페도 파르페지만, 사촌 동생이 중요했다. 동생이라면 친동생인 유스케도 있었지만. 맨날 자는 사이에 덮는 이불을 빼앗겼네 마네, 아껴둔 푸딩을 먹었네 마네 하며 싸우는 엄마와 아빠의 또 다른 아들보다야 ‘형아(兄じゃん)’라고 불러주는 사촌 동생이 백 배는 귀여웠다. 손바닥 두 뼘 차이가 나는 예쁜 꼬맹이가 마사키 형아(まさき兄じゃん)하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다니는데. 어떻게 안 귀여워할 수 있어. 마사키는 오차노미즈 역 플랫폼에서 이모를 만나자마자 운동회 100미터 달리기 때보다 더 열심히 뛰어 공연 5분 전에 간신히 착석했다.
이모이모. 준은 무슨 악기야?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리코더? 마사키는 이모의 옆자리에 앉아 재잘재잘 물어댔다. 공연을 앞둔 대기실 복도엔 [공연 관계자 외 출입 금지]를 붙여놓았다. 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마사키는 아쉬운 얼굴로 선물이 든 동전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 플루트야. 음악 시간에서 배웠지? 」
「 응. 준은 근사하네. 」
「 마사키도 할 수 있어. 플루트는 초보자도 쉽게 소리를 낼 수 있거든. 」
「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울릴까? 」
「 마사키가 플루트를 좋아하면 어울릴 거야. 」
조명이 모두 꺼졌다. ‘소극장’이 ‘대극장’으로 보였다. 준이 저기에 선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 괜찮을까? 마사키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세라 몸을 움츠렸다. 이모,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와? 글쎄. 300명이었나? 잘 모르겠네.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마사키는 귀를 막았다. 300명의 박수 소리. 300명의 눈. 속이 울렁거렸다. 옆 동네 학교 소년야구부와 경기를 할 때 꼭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이모. 나 쉬는 시간에 화장실 다녀와도 돼? 준한테는 바로 못 가서 미안하고 해줘. 마사키는 이모의 걱정스러운 쓰다듬을 받으며 두 손을 꼭 모았다. 준이 긴장하지 않게 해주세요.
― 제16회 나츠조노 초등학교 문화제 학예회를 시작합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마사키의 염려가 무색하게, 아이들은 학예회를 무사히 해냈다. (소리가 작았던) 웅변. (송판이 부서지지 않은) 가라테 시범. (좀 우당탕 넘어진) 발레, (헤매고 헤매서 음을 두 번씩 연주한) 핸드벨 합주, (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던) 오카리나 5중주…. 마사키는 아이들이 등장하고 빠지며 선생님이 소개 멘트를 할 때마다 감탄했다. 저 애들은 떨리지도 않을까? 사소한 실수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도 있을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저 무대 위에서 받아낸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1부 마지막은 고학년만으로 구성된 취주악단이었다. 하얀 재킷을 입은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저기, 준이네. 이모는 기다란 은색 막대기를 든 아이 하나를 가리켰다. 이모는 그게 보여? 난 모르겠는데. 마사키는 이모가 가리킨 방향에 주목했다. 맨 앞에 선 선생님이 손에 쥔 막대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악기를 들었다. 막대기가 기운차게 내려가고, 공연장의 공기가 반짝이는 악기들의 울림으로 물들었다.
마사키는 열한 살 생애 세 번째로 양팔에 오소소 돋는 소름이 무엇인지 경험했다. 첫 번째는 온 가족이서 치바 마린즈 홈 경기를 응원하다가 과자를 뜯는 사이 머리에 홈런볼을 콩 맞은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외갓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다이키치와 놀다가 다이키치가 마사키의 키만큼 높게 점프해 아이바를 덮친 일이었다.
세 번째는, 바로 지금이었다. 많이 들어봤지만 제목을 모르는 연주곡들이 지나갔다. 운동회에서 이런 악기들로 연주하는 기운찬 행진곡들을 틀어줬었다. 아이들이 연주하는 곡은 그런 행진곡이 아니었다. 거기에 녹음된 음악이 아닌, 지금 이 순간밖에 들을 수 없는 음색으로 소극장을 뒤흔들었다. 큰 악기들은 묵직한 소리를. 가는 악기들은 새소리처럼 가느다란 음색을 뽐냈다. 뒤에서 두드리는 북들은 마사키의 심장과 함께 둥둥 뛰었다. 그래도 세 번째로 연주한 도레미 송은 알았다. 마사키와 비슷한 관객이 많은지, ‘도는 도넛의 도, 레는 레몬의 레, 미는 모두(みな)의 미―’를 따라부르는 작은 아이들의 목소리, 아이들을 조용 시키려는 부모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합주가 마사키의 몸을 흔들었다. 아이바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신기하다. 풍선을 백 개 쥐고 날아가려는 자신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은, 이런 느낌일까?
1부가 끝났다. 마사키가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말리고 왔는데도, 대기실 앞은 인산인해였다. 키가 큰 어른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 사촌 동생을 만나기엔, 마사키는 너무 작은 꼬마에 힘이 없었다.
공연 끝나고 준에게 멋있다고 해야지. 또 하는 거 있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다 보자. 마사키는 이모에게 건네받은 팸플릿을 뒤적이며 발을 돌렸다. 대기실은 1층, 공연장은 지하 1층. 마사키는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 소년야구부 감독의 체력을 길러보라는 조언을 떠올렸다. 비상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1층 정도야 걸어가는 게 좋겠지. 마사키는 별생각 없이 문을 슬쩍 밀었다. 대기실 복도의 불빛이 서늘한 층계참과 위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쏟아졌다. 하얀 코트를 입은 조그만 등이 보였다. 눈대중으로 보아하니 마사키와 비슷한 덩치였다. 동그랗게 굽어 있던 등이 펴졌다. 붉어진 눈가. 연갈색 눈동자.
「나니아 연대기」의 네 남매가 옷장 문을 열고 알지 못했던 세계를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사키는 창백하고 조용한 세상에, 홀로 앉아 훌쩍이는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마사키는 잽싸게 비상구 문을 닫았다.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이 소년은 용사를 기다리는 안내자도 아니고, 그저 혼자 있고 싶어서, 시끌벅적한 대기실을 피하고 싶어서, 엘리베이터에 익숙해진 인간들이 잊어버린 비상구의 문을 연 것뿐이다. 마사키는 그 정도의 눈치가 있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소년을 모른 체하고 아무렇지 않게 비상구 문을 열거나, 계단을 올라갈 만큼 얼굴에 철판을 깔진 못했다.
"안 괜찮아."
마사키가 우물쭈물 대는 사이, 소년이 먼저 선수를 쳤다. 소년은 마사키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허벅지 위에 올려둔 은색 악기가 삐쭉 나왔다. 이거 이름 뭐였더라. 플, 뭐였는데. 플레이스테이션? 그건 게임기 이름이잖아. 플. 플. 마사키가 이모에게서 들은 지식을 기억해내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 플루트! 마사키는 계단을 다섯 칸 내려와 소년의 옆에 앉았다. 놀란 소년이 플루트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움츠러들었다. 소년은 플루트를 향한 마사키의 반짝반짝한 눈망울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들었어?"
"뭐를?"
"…틀린 거."
마사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틀렸다니, 아까 합주에서 실수라도 있었던 걸까. 소년은 밝은 눈을 깜빡였다. 《My favorite things》에서…. 아니. 아니다. 됐어. 소년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 마사키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또, 한숨. 소년의 작은 손이 눈가를 슥슥 문질렀다.
마사키는 풀이 죽은 소년의 상황을 자신의 상황으로 바꾸어보았다. 상황은 8회 말 만루.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스코어는 동점. 마운드에 타자가 서서 배트를 휘두른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공은 경쾌하게 배트에 맞아 쭉쭉 뻗어 나간다. 외야수 아이바 마사키는 홈런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공이 떨어진다, 떨어진다. 마사키, 잡아! 마사키는 있는 힘껏 점프해 공을 향해 손을 뻗는다. 공은 글러브 끝을 가볍게 튕기고 데구루루 굴러간다. 3루에 서 있던 상대편이 홈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2루, 1루에 있던 상대편도 홈을 밟았다. 안타를 친 선수는 3루에 앉아 가볍게 제자리뜀박질을 했다.
결과는 역전패였다. 마사키의 팀은 8회 말에 뒤집힌 점수 차를 메꿀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나고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데, 눈물이 마구 나왔다. 벤치로 돌아가기 무서웠다.
마사키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조금 다르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애도,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가기 싫은 거니까.
“내가 비밀로 해줄게.”
소년이 고개를 마사키 쪽으로 홱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소년은 마사키를 조금 나무라듯 째려보았다. 마사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네가 말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거짓말. 입에 발린 말 하지 마. 안 믿어."
"그치만, 진짠데…."
소년이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가 삐죽 내밀었다. 마사키는 아예 몸을 소년 쪽으로 틀었다.
“저기 서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해. 나라면 벌벌 떨면서 울었을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내 무대가 아닌데도 쿵쾅쿵쾅거렸다구. 조명이 꺼지고 다시 켜질 때마다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리고…. 마사키는 관객석에서 자기가 다 떨렸던 마음을 마왕을 무찌르러 떠나는 용사의 무용담처럼 쉬지 않고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소년은 가만히 듣고 있다 냉정한 한 마디를 뱉었다. 그거, 병원 가보는 게 좋아. 마사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붕붕 흔들었다.
“플루트는 무지무지 근사했는걸? 새소리 같은 소리가 반짝반짝했어.”
이렇게 부는 거지? 마사키는 아직도 집에 있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리를 가로로 들고 부는 모습을 흉내 냈다. 방향이 틀렸잖아. 소년은 귓불을 만지작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귀 끝이 눈에 띄게 붉은색으로 익어갔다. 아, 그럼 이렇게? 마사키는 소년이 지적해준 대로, 방향을 고치고 에어 플루트를 연주했다. 소년이 ‘대체 너는 뭘 하는 거야’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마사키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따끔따끔한 시선을 느낀 마사키는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주머니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열었다. 도는 도넛의 도, 레는 레몬의 레, 미는 모두의 미. 마사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동전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 소년의 작은 손 위에 올려주었다.
"이거 줄게."
소년은 움츠렸던 손바닥을 펼쳤다. 개나리색 면 재질 천에 연두색으로 네 잎 클로버를 수놓은 오마모리는, 신사에서 파는 것보다 영험함이나, 신성함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보단 유치원에 다니는 한참 어린 동생이나,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애들이 가지고 다닐 것 같은, 조금 엉성하고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다. 쭈글쭈글하고 빛이 바랜 데다가 손때가 잔뜩 묻어 세월감이 느껴졌다.
“있잖아. 네 잎 클로버는 토끼풀 만 송이 중에서 딱 한 송이가 핀대. 그래서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이 오는 거래.”
“….”
“정말이야. 오늘은 너의 날이니까, 내 행운을 나눠줄게. 나 오늘 전철 타고 왔는데 아슬아슬하게 안 늦었거든! 1학년 때 만든 건데 아직도 통한다?”
“….”
“…좀 이상하게 생겼지?”
소년의 손에서 네 잎 클로버가 찌그러졌다. 동그란 이파리가 구부러져 하트 모양이 되었다.
“응. 이상하게 생겼어.”
“진짜? 큰일났다. 준이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별로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네가 가져가면 되겠네.”
소년이 엉덩이를 슥 밀어 마사키와의 거리를 한 뼘 사이로 좁혔다.
“준인지 슌인지 그 애한테 나 틀린 거 말하지 말기다?”
마사키는 새끼손가락을 들고 소년의 앞에 내밀었다.
“손가락 걸고 약속할래? 말하면 바늘 천 개 먹기.”
“백만 개 먹기.”
“백, 백만 개 먹을게. 평생 비밀! 무덤까지 가지고 갈게!! 말하면 오니가 잡아먹는 것도 추가!!”
마사키는 소년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
“단도직입적으로 여쭙습니다. 뭐가 문제인데?”
아이바의 사촌, 마츠모토 준은 영 마뜩잖은 얼굴로 아이바를 노려보았다. 차가운 맥주잔 표면에 맺힌 액화된 물방울이 아이바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처럼 똑, 똑, 흘러내렸다. 아이바는 일부러 눈동자를 또로록 굴려 벽면에 붙은 맥주 광고 포스터를 흘깃 보았다가 어색하게 두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 마츠모토 준은 향상심과 도전 정신이 강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분 플루트가 재밌었는지 다른 관악기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그중 호른에서 자기 적성을 찾았다. 아이바가 기억하는 청소년기의 마츠모토는 친척 모임에서 ‘20년 뒤 톱 호르니스트의 단독공연을 도쿄 도 거실에서 볼 기회는 흔치 않다’며 진지하게 말하고선, 마우스피스에 첫 숨을 불어넣는 순간 관객의 시선을 한 번에 휘어잡는 비범한 소년이었다.
“…그때부터였나, ‘마사키 니쨩’에서 ‘마사키 군’이 된 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으응. 그냥.”
아이바는 얼버무리고 맥주 두 모금을 넘겼다. 목구멍이 따가웠다.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마츠모토는 정말로 호른에 재능이 있었다. 마츠모토는 이럴 줄 알았다면 호른을 늦게 시작한 걸 후회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플루트를 비롯한 다른 악기를 건드려본 경험이 있었기에, 호른이 오케스트라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마츠모토는 대학 졸업 후에는 유명 윈드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외국에 초청받아 공연도 하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커버 영상, 호른 입문 영상을 올리기도 하며 젊은 호르니스트로서의 인지도를 단단히 쌓아나갔다.
아이바가 오케스트라 입단을 결심하고 일주일 후. 정기 연주회의 프로그램이 정해졌다. 객원 참여자도 정해졌다. 마츠모토는 연초에 다른 공연이 미리 잡혀 있었는데도 객원 호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면이 있던 지휘자와 콘서트마스터에게는 “낯을 가리는 사촌 형 아이바가 적응할 때까지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단원들에게는 “호른을 처음 잡았을 때 마음으로 돌아가 즐겁게 연주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댔다. 실상은,
“만났잖아.”
아이바의 네임메이트일지도 모르는 니노미야가 궁금해서였다.
마츠모토는 아이바의 네임사인 증후군에 대해 자세히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친동생도, 심지어 부모도 아이바가 ‘네임사인 증후군 보유자’임을 알지만 네임메이트의 이름까진 몰랐다.
마츠모토도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아이바 가(家)와 마츠모토 준의 차이는 눈치가 빠르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첫 합주 다음 날, 아이바는 오랜만에 본가에 돌아온 마츠모토에게 SOS 라인을 보냈다. [ 준, 안 바쁘면 초등학교 졸업앨범에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있는지 찾아봐 줄 수 있을까? ] 1분도 안 되어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를 건너뛴 마츠모토의 첫 마디는 「 이제 말해? 」 였다. 아이바는 그날 새벽 두 시까지 꼼짝없이 마츠모토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이바〉만큼은 아니지만 〈니노미야〉도 꽤 희귀한 성씨 아냐?”
마츠모토는 니노미야를 빤—히 보고선, ‘혹시 니노미야? 나 기억나?’ 스킬을 시전했다. 전혀 모르겠다는 니노미야에게 ‘나츠조노 초등학교 취주악부! 같은 플루트 파트였잖아요. 공연도 했었고. 아, 내가 지금은 호른 불고 있어서 기억이 안 나려나?’ 라는 대사를 막힘없이 말했다. 아이바와 사쿠라이는 마츠모토의 연기력에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저 대사, 30분 전에 ‘초등학교 동창 중엔 연락하는 애들이 없어. 니노미야가 누구였더라?’ 고 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대사인가. ‘5학년 되고 얼마 안 가서 전학을 갔거든요. 아, 그랬었나~’라 대답한 니노미야도 만만찮게 자연스러웠다. 아니아니, 니노미야 씨는 정말로 마츠모토를 십여 년 만난 거니까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지.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니까.”
아이바는 전국에 '니노미야 카즈나리'라고 읽는 동명이인의 수를 근거로, 니노미야의 네임이 자신이 아닐 확률, 니노미야에게 네임이 없을 확률, 니노미야에게 애인이 있을 가능성 — 이 부분에서 아이바는, "백 프로야! 니노미야 씨는 귀여운데 잘생기기까지 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데다가 플루트 연주도 아마추어 중에서도 엄—청 수준급이야. 나 같은 사람한테도 자주 말을 걸어줘.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분명히!"라고 열정적으로 쏟아내었다. — 니노미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싫어할! 인간관계를 쌓을 상대로는 전혀 아닌! 최악인! 가능성이라고 쓰고 경우의 수라고도 쓰는, 부정적인 가설들을 줄줄 읊어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츠모토는 옆자리에 앉은 사쿠라이와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사쿠라이 씨, 제 사촌 형이 굉장히 신세 많이 집니다.”
“아뇨. 익숙해졌어요. 나쁜 것도 아니고요. 저런 상황에선 부정적인 생각이 치고 올라오잖아요.”
“저희가 괜히 술을 먹였을까요. 삽질이 더 심해졌는데.”
“그래도 털어놓아야 할 곳은 필요하니까요.”
“동의합니다.”
겨우 세 번 만났을 뿐인 마츠모토와 사쿠라이는 단짝 이상으로 손발이 잘 맞았다. 네임메이트 사이인가를 진지하게 진단받아야 하는 건 너희 둘인 것 같은데. 아이바는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잔에 남은 맥주를 꿀꺽꿀꺽 넘겼다. 마츠모토와 사쿠라이의 목덜미엔 네임사인이 보이지 않았다. 소매를 살짝 걷어 드러난 손목에도 네임사인이라고 생각되는 흔적조차 없었다.
"안 물어봤으니까 모르잖아."
마츠모토가 한숨을 쉬며 아이바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니노미야 씨의 애인 여부나, 네임사인 여부나. 전부. 아이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아무리 잘 대해준다고 해도 이제 알게 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물어봐…."
“삽질만 하지 말고. 동명이인이면 얼른 다른 니노미야 카즈나리 씨를 찾아야 하잖아.”
“그치만.”
아이바는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잡아당기다가 식탁에 이마를 쾅 박았다. 맥주잔이 들썩였다.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도, 다른 니노미야 카즈나리 씨를, 니노미야 씨만큼 좋아하지 못할 것 같아.”
아마 사쿠라이 군도, 준도 이해를 못 하겠지만. 아이바는 꿍얼거렸다. 사쿠라이도 마츠모토도 니노미야의 왼쪽 얼굴을, 속눈썹 아래로 그늘지면 밀크커피 색이 되는 부드러운 눈을. 사근사근하다가도 장난을 칠 때(주로 오노에게) 카랑카랑해지는 목소리를, 양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면서, 팔을 들어 얼굴 반절을 가리고 귀를 발갛게 물들이는 모습을, 아이바만큼이나 무의식적으로 눈에 한가득 담고, 집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테이프를 감듯 천천히 떠올리진 못했으니까. 커피포트에 물이 끓으면 ‘이번에 코코아가 새로 들어왔어요.’나. 볼이 아파서 문지르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건네는 니노미야를. 플루트를 연주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듯 유려하게 오가는 작은 두 손. 턱을 괴면 눌리는 볼살. 악보 위에 필기하는 왼손…. 니노미야 카즈나리라는 성군은 관측하면 할수록. 지구 상의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새 반했어?”
“….”
“…반했네.”
“….”
“파이팅.”
“파이팅, 이 아니야!!”
“니노미야 씨와 가까워지고 싶다면서 불러낸 사람이 누구인지 10초 내로 기억해 내세요.”
아이바는 벌떡 고개를 들고 텃밭에서 뽑히는 무처럼 일어났다가 마츠모토의 눈짓 한 번에 슈퍼마리오가 밟은 버섯처럼 푹 앉았다. 나네. 치바 현 출신 남성 30세 아이바 마사키네. 아이바는 다시 식탁에 머리를 기댔다. 세상이 어지러웠다. 알코올 탓인지, 고민 탓인지. 팽글팽글 돌았다.
“…사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냐. 절대로.”
“그러면?”
“그냥. 니노미야 씨가 정말로 내 네임메이트라면 이번에는, 오래 보고 싶어. 그렇고 그런 관계까진 안 바라. 내가 어떻게 그러겠어.”
“….”
“그냥,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어. 니노미야 씨가 네임메이트가 아니어도 좋아.”
아주 나중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도 멀어지지 않는 사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올라오는, ‘그런 일이 있었지’ 라고 둘 다 배를 잡고 웃는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사이.
“니노미야 씨도 같은 마음일까?”
“…역시 내가 귀찮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친한 친구 사이〉로만 될 수 있는 관계가 될까, 라는 거지.”
무슨 말이야? 아이바는 빠끔 고개를 들었다. 사쿠라이가 씩 웃었다.
“궁금하면 니노미야 씨에게 합주 연습 같이하자고 물어봐. 옆자리잖아?”
“그거 괜찮다. 영화 같이 보자고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그러니까, 사귀고 싶은 마음 없다니깐….”
“…누가 들어도 연애상담 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마츠모토가 눈을 가늘게 뜨고 꿍얼거렸다. 됐다. 고생하는 사촌 형을 위해서 내가 사줄게. 마츠모토가 지갑을 들고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를 들은 점원이 계산대로 후다닥 달려갔다.
먼저 밖으로 아이바는 비니를 푹 눌러 귀를 덮었다. 술기 오른 오른뺨이 금세 시려지는 날씨였다.
— 반했어?
혼란스러웠다. 나, 니노미야 씨에게 반한 걸까? 나는, 니노미야 씨를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걸까? 마츠모토와 사쿠라이가 물어봤을 때 아니라고 바로 부정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어.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야. 마음도 마음이지만, 니노미야가 쓴 칼럼의 활자들이 신경 쓰였다.
「 로맨틱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지 않은가, 사랑의 유통기한은 3년이라고.
네임메이트와 관련 없이, 모든 연애는 시작할 때 서로가 자신의 운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운명이 아님을 깨닫는다. 」
…니노미야 씨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온 걸까.
아이바는 입술을 오리처럼 쭉 내밀었다. 연애감정이고 자시고, 그렇게 많이 데인 듯한 글을 쓴 사람인데. 니노미야 씨를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좋아합니다. 사귀어주세요. 같은 말을 할 수가 없잖아. 아니, 애초에 내가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일 리가 없잖아!
하얀 운동화 밑창이 거리에 굴러다니는 흙 알갱이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짧은 감탄사. 익숙한 목소리의 음역이, 아이바가 헤매는 끝도 없는 생각의 미로에 들이박아 강제로 출구를 만들었다.
“아이바 씨?”
니노미야였다. 하얗고 흐린 입김을 단 니노미야가 씩 웃었다.
“여기서 다 보네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푹 뒤집어쓴 야상 파카 모자를 벗은 니노미야는 얼굴이 조금 붉었다. 근처 이자카야에서 가볍게 마셨던 건지, 알싸한 알코올 향과 연기 냄새가 났다. 니노미야 옆에는 오노도 있었다. 아이바가 급작스러운 니노미야의 등장에 당황해 잠깐 얼어붙은 사이, 가게에서 나온 사쿠라이와 마츠모토가 니노미야와 오노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바도 오노와 어찌어찌 인사를 했지만, 니노미야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니노미야 씨네. 니노미야 씨…. 니노미야 씨의 퇴근 후 가벼운 술자리. 니노미야 씨는 취하면 얼굴이 빨개지는구나. 아이바는 모자에 눌린 머리를 대충 매만지는 니노미야의 작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키색 야상에 반쯤 파묻히고, 하얀 오리털이 달린 파카 모자에 관자놀이를 기대기도 했다. 니노미야 씨는, 밖에선 이런 모습이구나.
”어디 아프세요?”
니노미야가 훅 들어와 작은 손을 아이바의 이마로 뻗었다. 보드라운 손등이 아이바의 이마에 톡 닿았다. 알코올과 불 냄새가 뒤섞인 찬 공기가 폐부로 훅 들어왔다.
“열 좀 있는 것 같은데. 얼굴이 빨개요.”
“아, 안면홍조가 있어서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마츠모토가 기막혀했다. 사쿠라이도 어떤 알고리즘을 거쳤길래 ‘안면홍조’라는 대답을 내놓았는지 이해를 못 한다는 얼굴이었다.
"술도 조금 드신 것 같은데요?"
니노미야가 키득키득 웃었다. 가깝다. 아이바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너무. 가까워.
솔직히, 지금 오케스트라에서의 배치도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클라리넷 파트의 가장 뒤, 플루트 파트의 가장 뒤. 의자에서 일어서서 정리하는 짧은 간격을 공유하는 거리였다. 어깨가 스치기도 하고,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왼쪽 얼굴을,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오른쪽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 악보를 넘기는 소리를 듣는 거리. 자신의 파트가 아닌 곳의 키를 두드리는 손을, 선율을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변화를 느끼는 거리. 서로의 연주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다. 아이바도, 니노미야도 앞에 지휘자가 있으니 대놓고 서로를 바라볼 순 없었지만, 어쩌다가 눈이 마주치면 니노미야가 먼저 미소 짓는 눈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 조용한 교류가 오가던 거리가 좁혀졌다.
아이바의 영역과 니노미야의 영역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겹쳤다. 왼쪽 뺨과 눈, 콧날만 보이던 옆모습에서 앞머리에 가려진 숱이 적은 눈썹을, 밝은 갈색 눈을. 뺨에 난 점과 턱에 찍힌 점 두 개를, 전부 볼 수 있었다. 니노미야 씨, 고양이 입이네.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제대로 보았다, 가볍게 굴곡이 진 입술과 입술 사이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안면홍조는 확실히 아니네.”
아, 세상에. 아이바는 양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술, 술기운 때문에요. 니노미야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운데, 왜 입꼬리가 간질거릴까. 아이바는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눌렀다.
한쪽은 수줍게 웃기만 하고, 한쪽은 그걸 보고서 또 웃고. 어느새 공기가 달라진 둘만의 세상을 지켜보던 마츠모토가 짙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흐뭇하게 구경하던 사쿠라이도 목도리를 고쳐맸다.
"나랑 사쿠라이 씨 먼저 갈게."
"어, 잠깐…!"
"이렇게 셋이서 따로 더 한잔 하기로 했어. 그렇죠, 오노 씨?!"
눈치 없는 사촌아, 룸메야,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주잖아. 마츠모토와 사쿠라이는 아이바에게 지긋한 눈빛을 보냈다. 아이바는 그 속뜻까지 읽지 못하고 에? 에? 에? 진짜?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사쿠라이는 기분 좋게 취해 헤실 거리는 오노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곤 활짝 웃었다. 오노는 눈을 꿈뻑이며 양옆의 미남을 번갈아 보다가 사쿠라이의 눈짓에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곤 고개를 세차게 주억거렸다. 그렇게 됐어. 아이바와 니노미야 둘만 남겨두려는 의도를 눈치챈 듯싶었다. 미남 둘과 어쩌다 보니 한통속이 된 게 마냥 즐거운지 풀어진 웃음에 조금 장난기가 비쳤다. 아이바도 니노미야도 머리 위에 물음표를 가득 띄웠다.
“갑자기?”
“인생도 낚시도 타이밍이야, 니노.”
“하?”
니노미야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감탄사를 뱉어냈다. 예능이었다면 큼지막한 명조체 자막이 띄워졌을 법한 반응이었다. 저기 맛있어요. 오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멀지 않은 라멘집에 쳐진 노렌을 가리켰다. 그럼 다음 연습 때 봐. 마츠모토가 손을 흔들고 아이바에게 눈짓으로 무언의 사인을 주었다. 잘해봐. 아이바의 등골에 가는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설마야? 아이바의 입 모양을 읽은 마츠모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그 설마시다. 마츠모토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고, 사쿠라이는 빙긋 웃고는 오노의 등을 떠밀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전사와 새끼 사자는 절벽에 떨어져도 살아남아야 비로소 강함을 인정받는다. 아이바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존재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열하고 싶었다. 니노미야가 있어서 이성으로 꾹꾹 누르고 있지만. 니노미야만 지평선 너머 점이 된다면 윈드밀로 바닥을 쓸며 길거리 미화에 앞장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쿠라이도 마츠모토도 '정면승부 타입'이다. 저 불도저급 추진력은 나는 무리라고! 무리! 완전 무리! 전혀 무리!
“…아이바 씨?”
속으로 엉엉 울며 헤드스핀을 돌리던 아이바를 현실로 불러온 이는, 아이바를 휴대전화 진동 최대치마냥 바들바들 떨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인 니노미야였다. 네임메이트일지도 모르는 사람. 니노미야 카즈나리. 팀파니에 헤딩하는 연주자처럼 심장은 터질 것 같이 쿵쾅쿵쾅 뛰는데, 또 머리에선 적신호가 아닌 청신호를 보내왔다. 기묘한 패닉이었다.
"아이바 씨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네…?"
"바로 돌아가세요?"
마음 같아선 니노미야와 마주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바는 ‘괜찮으시다면 저랑 한잔 하시겠어요?’라는 한 문장을 쥐어짜 낼 배짱도 없을뿐더러 여기서 술이 더 들어갔다간 니노미야의 앞에서 안주를 다 게워내거나, 북받친 술기운에 엉엉 울거나, 말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속마음을 횡설수설 내뱉거나… 하여튼 '아이바 마사키'라는 한 인간의 인상을 최악으로 남길 거란 직감을 느꼈다.
“지하철 타고 가시죠?”
“네, 소부센 타고요….”
“잘됐네. 나도 소부센 타는데. 바람맞은 사람들끼리 같이 가요.”
“에?”
“가는 김에 편의점 들러서 숙취해소음료도 한 병 사고.”
니노미야는 파카 모자를 탈탈 털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상쾌한 미소가 아이바의 얼굴을 붉힌 열기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양 볼에 꽉 붙잡았다.
아이바는 지식검색 서비스와 QnA 서비스를 자주 들락날락했다.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논문보다야 답변이 하나같이 간결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어서 좋았다. 아이바는 아주 가끔 질문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의 질문은 아래와 같았다.
Q. 한국어의 ‘ㅔ’와 ‘ㅐ’, ‘ㅚ’와 ‘ㅙ’의 발음 차이가 궁금합니다.
Q. 잼 뚜껑을 아무리 숟가락으로 두드려도 안 열려요.
Q. 돈스타브에서 하운드한테 자꾸 물려 죽어요.
물론 충분한 검색과 시도를 거친 뒤에 큰 맘 먹고 휴대전화 자판을 꾹꾹 눌렀다. 답변은 하나같이 쿨했다. 영어의 ‘a’는 ‘애’, ‘e’는 ‘에’와 가깝습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돌려보세요. 뚜껑 부분에 김을 쬐거나 뜨거운 물을 부으세요. 저런, 힘내세요! 뉴비에게 하운드는 힘들죠? 등등. 도움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를 떠나, 아이바는 지금 이 순간. 인터넷 브라우저 앱을 켜 질문 글을 작성하고 싶었다.
Q. 과음하지 않았는데도 필름이 끊기는 일이 있나요?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배경은 이자카야 앞에서 편의점 안으로, 파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니노미야가 아이바에게 숙취 해소 음료를 건네고 있었다.
“취한 게 아니라, 감기인가?”
니노미야는 자주 눈을 깜빡였다. 말을 하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도 있었다. 니노미야는 따뜻한 음료수를 진열한 온장고 앞에 쪼그려 앉아 음료수를 하나 꺼냈다. 레몬꿀차 드실래요? 숙취에도 좋대요. 그대로 페이드 아웃.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아이바의 손에는 숙취해소제 대신 따끈따끈한 레몬꿀차가 들려 있었다. 온장고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레몬꿀차가 아이바의 두 손을 덥혔다. 아이바의 목이 삐걱대며 왼쪽으로 돌아갔다. 하얀색 자판기.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둔 선로. 파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니노미야의 작은 입술이 보였다.
“…그 부분은 작정하고 목관 혹사라니깐. 특히 클라리넷.”
니노미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 그렇,죠. 아이바는 어색하게 맞받아쳤다. 낯가림이고 떨림이고 그 이전에 ‘생존형 사회성’이 발동되었다. 발을 가볍게 동동거리던 니노미야의 눈에 아이바의 얼굴이 비쳤다. 반쯤 감긴 니노미야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아이바 씨는 특별히 어려운 부분 있으세요?”
어려운 부분이라. 아이바는 네임사인을 손으로 덮었다.
“…전부 어려운데요….”
아이바는 말끝을 흐렸다. 뒷말은 할 수 없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니노미야 씨, 저는 니노미야 씨가 제일 어려워요.
제 감정은 ‘니노미야 씨가 네임메이트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으로 만들어진 호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믿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언젠가부터 저만이 읽을 수 있게 된 이름이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아니어도. 니노미야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니노미야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니노미야 씨의 사소한 습관에, 몸짓에 의미를 두는 건 ‘네임메이트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오는 특별함에서 시작된 건 부정할 수 없거든요. 의식적으로 ‘네임메이트’ 태그를 떼려고 해도, 어느 순간 붙어버려요.
그게 싫어요.
내가 아니라 다른 게 ‘니노미야’라고 정해준 것 같아서.
니노미야 씨를 이대로 영영 아무것도 모르고, 뜬구름만 잡을 것 같아서.
“니, 니노미야 씨.”
아이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면 눈에 뵈는 게 없어져서 용기가 치솟는다고 했는데, 그건 모르겠고,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더 분명하게 느껴지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덜덜 떨리는 손도 잘 느껴지고. 앞머리에 가서 간질간질한 걸 보니 니노미야의 시선은 여기쯤 닿았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아이바는 기도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바 마사키 씨, 텔레파시가 들린다면 잠시만 힘을 빌려주세요.
“그. 부, 부탁이 있는데요. 아, 안 들어주셔도 괜찮, 은, 데요.”
“일 관련이면 돈 받고요. 돈 빌려달라는 거 아니면 생각해 볼게요.”
니노미야가 예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받아쳤다. 느껴진다. 온 세상 아이바 마사키의 용기가 조금씩 모인다. 용기는 혀끝에서 맴도는 문장을 정돈한다. 떨림은 차분히 가라앉히고, 음정을 분명하게 고른다.
"…같이, 합주 연습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런데, 니노미야 씨가 더 보고 싶어요. 자꾸자꾸 보고 싶어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곧 JR 조시 행 소부 본선 전철이 도착합니다. 탑승하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노란색 안전선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조시 행 소부 본선 전철이…
"전 클라리넷 파트가 아닌데요?"
"크, 클라리넷 파트는 연습 시간마다 함께 하고 있구요. 니, 니노미야 씨가 옆자리고. 그래서, 니노미야 씨 플루트가 잘 들리거든요. 니노미야 씨 플루트 연주에도 잘 맞추고 싶어서요…."
아, 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 횡설수설거리고! 아이바는 다시 속으로 눈물을 좔좔 흘리며 헤드스핀을 돌았다. 헤드스핀으로는 모자라서 윈드밀로 지구를 다섯 바퀴 돌고 백턴을 80번 연속 돌았다. 아이바가 내면에서 기네스북에 다섯 번 등재되고도 남을 아크로바틱 쇼를 펼치는 사이, 전철이 도착했다. 니노미야가 먼저 전철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일 바로 할까요?”
“네엑?!?!”
대답이 빨라!! 아이바 씨, 전철 안이에요. 니노미야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아이바는 손으로 떡 벌어진 입을 텁 막았다. 아니, 룸메이트도 사촌도 그렇지만 니노미야 씨도 추진력 엄청나잖아. 오노 씨도 느긋해 보이지만 바순 조립할 때 보면 한 번에 짜란 완성하고. 내 주위엔 뭐 이렇게 훅훅 치고 나가는 사람뿐이야. 못 따라가겠잖아…. 아이바의 머리 위로 흔들거리던 손잡이가 뒤통수를 스쳐 지나갔다.
다리 아픈데, 앉으세요. 니노미야는 빈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이바는 쭈뼛대다가 니노미야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리가, 자꾸만 가까워져.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들었다 놨다가 뒤흔든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철이 철로를 지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도 했다. 잔버릇이, 많네. 아이바는 전차가 달리면서 내는 철컹거리는 소리와 휘잉, 슈웅 바람 소리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묻혀주기를 바랐다.
“아이바 씨.”
니노미야가 아이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니노미야의 손가락이 전철 밖을 가리켰다. 눈 깜짝할 새 아이바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 니노미야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연습실에서 뵈어요.”
아이바는 열차가 떠나자마자 승강장 바닥 위에 쪼그려 앉았다. 선로 위를 감도는 서늘한 공기가 볼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바는 지식검색 사이트에 작성할 글 제목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배치했다.
Q. 체내에 흡수된 알코올도 휘발성이 있나요?
아이바는 고개를 저어 물음을 털어냈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니노미야는 정말로 연습실 키를 짤랑짤랑 흔들며 아이바를 반겼다. 옷을 넉넉하게 입는 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니노미야도, 아이바도 휴일이라 그런지 작은 손을 거의 덮는 옷소매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 진짜로? 」
아침. 오차즈케로 해장하던 아이바의 룸메이트가 눈을 달걀만 하게 뜨고 놀랐다. 응, 그렇게 됐어. 아이바는 덤덤하게 말했다. 좀 떨리긴 하는데, 너무 순식간이서 배가 안 아픈 것 같아.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사쿠라이는 손을 들어 아이바에게 타임을 선언하곤 ‘아이바 마사키 네임사인 대책위원회’의 동료인 마츠모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아이바는 오차즈케를 후루룩 비워냈다. 그릇이 달각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 너희들이 주장하는 연애감정은 몰라도, 호감인 건 확실하니까. 」
「 연애감정이 아니면? 네임메이트의 본능적인 끌림? 」
「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쓴 다른 칼럼을 떠올렸다. 《정해지지 않은 운명의 변수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단 칼럼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았다.
「 모든 것은 변수가 존재한다. ‘인간’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한, 인간이 그들의 가장 큰 변수임은 변하지 않는다.
운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전적 정의로 운명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것이기도 하지만. 접점이 없는 것이라도 끼워 맞추면 언제라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운명이다.
또 다른 운명은 내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
니노미야는 그 문단에 주석으로 “과대 포장된 네임사인”에 대해 이야기한 칼럼 내용 일부를 달았다.
「 네임메이트들의 ‘운명적인 만남’이 실상이 네임사인이 아닌 이들의 사랑과 별 다를 게 없다는 말은, 뒤집으면 '아주 보통의 연애'도 '운명적인 사랑'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양립하지 못하는 역설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순간만큼은 우연도 운명이라고 말하니까. 」
“잘 부탁드려요. 니노미야 씨.”
「 어떤 의미로든 ‘첫눈에 반했다’는 드라마의 시작을, 매료된 바로 그 순간에 깨닫는 건 어려우니까. 」
「 …반한 거. 슬슬 받아들이는게 어때? 」
「 연애감정 아니라니까. 친해지고 싶을 뿐이라고! 」
“저야말로요.”
이 만남은 당신 말대로 내가 만들어나가는, 또다른 형태의 ‘운명’일 거라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씩, 아주 천천히.
당신이라는 별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또다른 형태의 운명.
아이바는 니노미야가 쓴 칼럼의 일부를 마지막을 속으로 되뇌었다.
연습실에 별이 빛나는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