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뭇 차분한 톤으로 이야기하는 탓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오래도록 천장에 붙어있는 야광별이었다. 별이 하나, 둘, 셋. 세 개. 깜박거리는 눈에 맞추어 별들이 깜박거렸다.
“어릴 때 붙여놓은 거야. 이제 와서 떼기 애매해져서.”
벽지도 같이 떼질 것 같더라고. 농담식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니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자코 천장을 쳐다보았다. 나도 니노를 따라 가만히 누웠다. 가까이 붙어 있는 탓에 고개를 돌려 니노를 쳐다볼 용기는 없었다. 매일 보는 천장이 그날따라 일렁대는 것 같았다. 어색한 건 아니었는데 왠지 이상하게 무거워지는 공기가 어딘가 불안해서 나는 말을 붙였다.
“니노는, 별 보는 거 좋아해?”
“음, 도쿄는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렇다는 긍정의 표현이었다. 나도, 좋아해. 나는 제멋대로 사심까지 섞어 말을 이었다. 니노는 대꾸하지 않았다. 평소와 같았고, 딱히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옆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니노의 눈동자가 내가 보고 있는 벽지마냥 일렁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상하게 투명하던 니노의 눈동자는 야광별 너머의 것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땀인지 차가운 우롱차가 담긴 컵의 물방울인지 모를 것이 내 손바닥을 적셨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꾸만 마음에 걸리던 고백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치부하면서 늘 하던 대로, 그러니까 웃으면서 내 이야기를 하고 내 페이스대로 말을 이끌면 니노가 무뚝뚝하지만 상냥하게 반응하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게 평소와는 다르게 니노인 모양이었고, 그 분위기를 차마 깰 수 없어서. 어쩌다 나와 버린, 우연이 이리저리 겹친 이야기가 아니라 한 달 간 본, 똑똑한 니노가 만들어가는 무대에 멍하니 있는 주역 같아서. 뭉게뭉게 드라이아이스가 무대를 감싸는 것 같았다. 발 언저리가 차가워지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서막. 나는 그 다음 대사마저 알지 못하는 주역이었다. 조마조마하게, 그 다음 배경색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는.
“예쁘네.”
날이 아직 밝은데다 형광등은 밝게 켜져 있어서 빛도 나지 않는 탁한 노란색의 별을 바라보며 니노는 중얼거렸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나는 멋대로 입술을 축였다. 어딘가 이상한 곳으로 이끌려 가는 와중에도 니노가 너무 좋아서 쓸데없이 솔직해지는 감정이 원망스러웠다. 낯 뜨거워지는 감정. 차가운 우롱차를 들고 있어서 얼얼해진 손은 오히려 뜨거워져갔다. 비어버린 대사란에 가만히 괄호가 들어간 지시문을 넣어버려도 좋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다거나하는 뻔한 것들처럼. 아직 가라앉지 않은 햇살을 등에 얹고 천천히 내려앉아도 좋을 터였다. 니노네 집에서 한참이나 게임을 하다 가만히 누워있던 나날들, 아무 말 없이 잠들어 버린 나날들, 그저 손가락 첫마디가 간신히 닿는 거리에서 낮게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있던 나날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때 나는 서툴렀고, 알 수 없는 감정에 초조해져 있었다. 유난히 낮아진 니노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괄호를 닫고 대사를 집어넣었다.
“별은 사람을 잇는다잖아. 오랜 시간을 거쳐서, 이어놓은 별들은 언젠가 만나게 되는 거래.”
나는 그게 좋아. 나는 용기를 갖고 몸을 아예 니노 쪽으로 돌렸다. 한 쪽 팔은 머리 뒤에 받치고, 눈을 니노를 쫓았다. 좋다, 라는 말에 진심을 담아서.
“…운명이란 거?”
“응, 운명이란 거.”
니노는 몸을 내 쪽으로 돌렸다. 눈을 마주치니 거리감이 새삼 새로워서 다시 몸을 돌릴 뻔했지만 동앗줄마냥 니노의 눈을 놓지 않았다. 조금 벌어진 틈에서 물컵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챙, 하고 맑은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운명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이어지는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음. 어쩔 수 없는 이별이라거나. 아니면 대판 싸운다거나.”
그렇지 않을까. 나는 내뱉지 못한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이어놓은 별들이 언젠가 꼭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길고 긴 시간을 거쳐 만나버린 사이이길. 운명이라는 것에 마구 휘감겨 떨어지지 말도록. 나는 그렇게 빌었다.
“운명, 믿어?”
니노의 투명한 눈이 나를 온전히 담고 있었다. 어쩌면 비추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흡수하지 않고, 오직 반사만 하면서 상대를 반추하게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눈동자가 내가 생각했던 대로 마구 일렁이지 않아서 안심했다. 나를 담고 있노라고, 적어도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를 담고 있노라고 넘겨짚었다.
“믿는다면?”
안 어울리나? 웃음이 끝에 걸린 말투였지만 니노는 하나도 웃고 있질 않았다.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니노는 음, 하고 침음하더니 주머니를 뒤적여서 100엔짜리 동전을 꺼냈다. 뜬금없이 나온 은빛 동전이 형광등 빛에 빛났다.
“내기할까?”
“…무슨?”
“그냥, 동전 앞뒤 맞히기 내기.”
이긴 사람이 궁금한 거 물어보기. 니노는 내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겨서 허공으로 던졌다가 손등으로 받았다. 앞면. 니노가 먼저 입을 떼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손등에 드러난 정답은 앞면이었다. 니노는 흐응 하고 짧은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니노의 모습이었다. 무심한 척, 아무렇지도 않게 배경지를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때 나는 그걸 느낄 새도 없이 숨을 쉬는 법만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말이다.
“아까, 오렌지 주스 준다지 않았나?”
“어어? 동생이 다 먹었나 봐….”
니노는 흐흥 웃기만 하고 동전을 다시 던졌다. 나는 중력을 거스르고 올라가는 동전을 좇았다. 금방이라도 커다란 가짜별에 닿을 것 같았던 동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꾸라져 니노의 손등에 떨어졌다. 이번엔 내가 먼저 하라는 듯 니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뒤, 뒷면. 나는 말을 더듬었다.
동전은 앞면이었고 니노는 다시 질문을 했다. 질문은 하나같이 가벼웠다. 내기 같은 걸 걸지 않아도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 나는 질문에 답하면서도 장난스레 웃기까지 하는 니노의 장단에 맞춰줄 수 없었다. 가끔씩 힘을 내어 입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어떻게 웃는 거였더라, 하고 굳어버린 입가는 제대로 된 미소를 담지 못했을 것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평소에 지어지는 마름모꼴 모양이 아니라는 걸 잘 알려주었다.
“이번엔 내가 할래.”
4번을 내리 했는데 질문권은 죄 니노에게 넘어갔다. 질문에는 부담이 없었지만 게임에는 오기가 생겨버려서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건네지는 100엔 동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동전을 튕겼다. 뭐라고 질문할 지는 정말로 하나도 생각해 놓은 게 없었지만 나는 무작정 동전을 던졌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앞면. 니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물어봐.”
앞면을 말한 내 손등 위에는 때늦은 벚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은색 벚꽃을 만지작거렸다. 축축한 손으로 만져서 쇠붙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머리는 새하얗게 되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농담처럼 넘어갈 질문마저 생각이 나질 않아서 나는 천천히 과거라고 하기에 민망한 지난날을 되짚어 갔다. 제일 최근에 니노를 만난 날부터 시작해서, 제일 처음으로 니노를 만난 날까지. 형광등에 노랗게 물든 니노에게서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해가 빨리 떨어지던 날, 노랗게 타오르는 해를 등지고 만난 너는 샛노란 색 햇빛에 지지 않는 뽀얀 얼굴에 말간 웃음을 띠고선. 안녕. 처음 보는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었다.
“너랑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아는 사이었나?”
‘어디서 본 적 없어요?’같은, 망한 대시 대사 같았지만 나는 꽤 진지했다.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분위기라는 게 지금껏 죽 켕기던 것들을 생각나게 했다. 생각보다 기억력은 봐줄만 한 정도라서 웬만하면 기억이 날 터였다. 어릴 때 이곳에 살았다거나, 그래서 같이 논 적이 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스쳐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다거나 하는. 그렇지만 기억은 전혀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치원 졸업 앨범을 뒤진 적도 있었다. 아니, 라는 대답이 나올 게 뻔했다. 대답을 알면서도 니노가 눈을 깜박이는 그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나는 속으로 니노를 재촉했다.
니노는 대답 대신 다만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괜히 물어봤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무얼 걱정해서 무엇에 안도했는지는 몰랐다. 그저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이 어른거리던 무언가가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닿지 않는 곳에 생겨버린 형체도 모르는 불안이 말이다. 사실은 말야, 네가 만들어낸 것에 혼자서 겁먹었을 뿐이야. 애초에 그건 없는 거였으니까.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니노는 이상한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뜬금없는 말도 자주 하곤 했다. 어떻게 보면 그 인사도 뜬금이 없었다. 내가 아는 니노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녕, 같은 인사를 건네는 애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라도 귀찮다며 얼굴을 푹 숙이고서는 못 본체 폰만 쳐다보며 걷는 애였다. 필요가 없다면 내가 장본 비닐 가방을 볼 능청거림도, 싹싹함도 다 지워버리는 애였다. 똑똑하고 눈치도 좋았지만 가르쳐 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알 정도로 똑똑한 애는 아니었다. 내가 말을 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응하는 것도, 실수라도 하면 와하하 웃어버리면서도 해결책을 금방 주는 것도, 다 좋아하는 부분이었지만 너무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던 부분이었다. 가끔씩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의외라서 오히려 이상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은 단지 내가 문장력이 부족한 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가끔씩 들어버리면, 정말로 니노가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사람 같아서. 천장에 붙어버린 가짜별과는 다르게 내가 멋대로 정해버린 차원 속의 니노는 아스라이 멀어져만 가는 기분이 들었다. 노랗게 반짝이는 니노는 내가 느낄 수 없는데서 돌고 있는 별 같았다. 야광별은 매일 밤 천장에서 빛났고, 북쪽 하늘에 콕 박힌 붙박이별은 가장 밝게 타올랐다. 붙박이별을 중심으로 천천히 도는 별들은 비록 보이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긴 시간을 기다리면 언젠가 내 눈 앞을 지나갔다. 지구 반대편에서 도는 별은 보이질 않아도 거기 있었다.
그런데 니노는.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어딘가 투명하고 만져지는데도 마음이 꼭 텅 비는 게, 과학자도 밝혀내지 못한 가장 먼 은하에서 홀로 빛나는 별 같았다. 생각하기도 벅차게 몇 백 광년 떨어진 곳에서 홀로. 그런 기분이 자꾸 들어서 불안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찾아내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 별의 자취를 가만히 쳐다만 본 건, 그게 오롯이 니노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말을 하면서 깔깔 웃는 것도, 뜬금없는 말을 하다가도 맞는 말만 해서 나를 놀리는 것도. 니노가 나에게 보여준 건 그것밖에 없어서 그걸 믿지 않으면 나는 니노를 전부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과 함께 그런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씻겨나갔다. 니노는 내 손등에서 동전을 들고 가서는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눌린 머리가 푸석해보였다. 나는 니노를 따라 일어났다. 동전을 들고 갈 때 남은 니노의 온기가 손에 퍼진 혈관을 따라 온 몸을 도는 것 같았다. 내 몸이 뜨거운 탓에 니노의 손은 항상 차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엔 아니라서 언뜻 떠나간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래, 니노는 가까이서 따뜻하게 빛을 발하는-.
“아이바 쨩은 어때?”
운명, 믿어? 니노는 한참 전에 했던 내 질문을 돌려주었다. 타이밍이 어긋난 질문에 나는 눈을 또르르 굴렸다. 굳이 따지자면 어느 쪽이려나. 나는 침묵했고 니노는 작게 웃었다. 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해선.
“별에 운명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이야기, 나는 믿지 않아.”
니노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제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나를 믿는 거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내렸다. 니노는 싱긋 웃었다. 이건 비밀인데, 하고 니노는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오똑한 코가 내 귀에 닿을 듯 말듯했다. 아기처럼 나 있는 솜털은 닿았는지 귓바퀴가 간질거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니노가 숨을 고르는 작은 소리까지 또렷이 들렸다.
“운명은 정해져 있어. 나는 그게 보이거든.”
농담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니노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눈에 그림자가 어리는 게 ‘아이바 쨩, 이걸 믿어? 역시 순수하네-’ 같은 소리는 튀어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니노는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별님한테는 미안하지만, 별에 운명이 있다는 얘기는 믿지 않아. 별은 좋아하지만 말이야. 니노는 갑자기 민망해졌는지 말이 많아졌다. 이거 아무한테도 이야기한 적 없는데. 아이바 쨩은 좋겠네-. 그래도, 이게 아까 전 질문에 대한 추가 답변. 아직까지 농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시지 않은 와중에 니노의 비밀을 둘이서만 공유한다는 순수한 기쁨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아까 전 몸을 일으키면서 바닥에 나란히 놓아 둔 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까 질문이라면-.
“…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는 잔뜩 뒤집어져 있었다. 니노는 그 타이밍에 맞춰 웃음을 터뜨렸는데 내 목소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B급 소설 같은데서나 나올 만한 설정을 마구 말해버려서는, 그게 진짜라는 듯이-정말 진짜였지만-말한 자신이 웃기는 것 같았다. 이런류의 고백이 처음이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했고. 생각이 많아진 나를 두고 니노는 바닥에 놓인 컵을 쥐어 남은 우롱차를 마셨다. 얼마 남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한 모금 하고 반이 더 들어간 것 같길래 역시 입이 작다, 라고 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주저했다. ‘너랑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나?’ 방금 물은 말에 니노는 도리짓을 했었다. 나는 간단한 그 대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황해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최대한 날려 보냈다. 그런데.
날개까지 달린 헬륨풍선은 사실은 내 몸에 친친 감긴 투명 끈이 있었던 것처럼.
국어 실력이 좋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니노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니노의, 그래, 운명에, 보였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말을 믿으면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정말 모든 게, 라서 별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될 모든 것들이 죄다. 처음 보던 날 익숙하게 인사를 했던 것도, 이름을 알았던 것도, 뜻 모를 이야기를 했던 것도. 멍한 사이에 덧붙여 설명한 말들은 보충설명이 되었다. 죄다 보이는 건 아니며 그저 단편적인 게 보일 뿐이고, 사소한 일이라면 바로 앞의 일은 금방 보인다는 이야기.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동안의 비현실적이었던 니노의 행동이, 대사가 설명이 되는 이야기였다.
사실이 된 말은 얼기설기 얽혀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운명에 보였다 할지라도 가벼운 일상 속에서 보인 거라면 나를 굳이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수많은 넝쿨이 쳐진 미로 속 찾은 중간 답안은 내가 소중한 사람이 되어있을 운명이라는 것이었으나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어느 쪽이냐 하면, 기분이 나빴다.
내가 퍼즐조각이라면 니노는 판이었다. 판 같은게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한 조각씩, 비슷한 조각과 다른 조각을 찾고, 그게 들어맞을 때는 설레는 마음에 발을 동동거리기도 했다. 그 옆에서 같이 조각들을 맞춰주고 있는 게 니노인 줄로만 알았는데. 니노는 정답을 가지고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내 옆에 있었던 거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고백이 나았다. 결론이 좋지 않더래도 이런 결론 보다야 훨씬 나았다. 적어도 그 땐 좋았지, 라며 되돌아 볼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무얼 봐야 하는 건지. 나는 니노의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겉껍데기?
“내가 니노한테 보였구나.”
어떤 식으로 보는 건지는 몰라서 부사어를 빼먹은 질문에 니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움직이는 고개에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니노는 애초에 내 집 천장에 별이 보일 때부터 이걸 얘기하려던 참인 듯했다. 중얼거리는 말을 들어보니 그랬다. 별에 운명이 있다거나 그런 얘기는 믿지도 않는다면서, 별 하면 역시 운명이 생각나버리고 마는 게 모순적이었다. 모순적이고 역설적이었다. 모든 게 다. 웃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묘하게 분위기가 불안했구나. 그런 생각에 나는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니노가 만들어낸 무대에서 니노가 원하는 최고의 대사를 이끌어낸 대배우였다. 화려한 무대장치가 돌아가고, 암전이었다. 이제 하이라이트. 곧 조명이 곧게 내려오고, 깜깜한 가운데 나는 홀로 서서. 울거나 웃거나 그런 커다란 리액션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행복을, 즐거움을 노래하는 걸로 정해져 있을 터였다.
음악은 내 대사보다 한 박자 늦게 진행될 것이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가 택한 다음 대사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무대를 내려왔다. 무대에 조명은 켜지지 않았다.
“니노는, 그냥 내가 보여서 온 거였구나.”
그냥 그런 거였어. 오직 봤다는 이유로 소중한 사람이라 멋대로 해석당해서는. 아무 감정 없는 채로 너는 내게 몇 번이나 웃어주었을까. 니노가 본 장면이 무엇이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아직 꿈꾸지도 않은 장면을 혼자서 보고는 느긋하게 그 장면을 기다렸을 니노가 싫었다. 나는 모든 게 새로웠는데, 너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각본이 얼마나 우습고 재미있었을지.
“…뭐?”
니노는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웃고 있던 낯이 싹 바뀌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조금 움찔했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티내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운명이라는 게 뭔데? 지금 내 감정도 이미 정해진 거야?”
“야, 너.”
“니노한테 뭐가 보였는데? 그게 니노의 진짜 경험이었고 감정이라고 할 수 있어? 그냥 보였던 걸 따라하는 거밖에 더 돼?”
“너, 말이 좀 심하다.”
“운명이라니, 정해진 게 어딨어. 비겁해.”
“뭐?”
애초에 별에 운명이 깃들어있니 한 건 너였잖아. 니노는 내 눈을 노려보았다. 그랬다. 운명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생각에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운명은 그런 게-. 처음 보는 표정에 기가 눌려서 나는 꾹꾹 참던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슬픈 영화를 보며 울고 있으면 휴지를 챙겨주었던 니노는 없었다. 오히려 내 눈물이 불을 지핀 듯했다.
“네가 뭔데 그런 걸 판단하는데? 그게 내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멋대로 판단하지 마. 내 경험이고 내 감정이야.”
“그래도, 싫어.”
니노는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을 때를 제외하고는 잘 내지도 않던 한숨까지 내쉬고서 니노는 나를 쳐다봤다.
“나한테 뭐가 보였냐고.”
“알고 싶지 않아.”
니노는 내 말은 무시하고 손을 손가락을 하나씩 펴갔다.
“너랑 스위츠 먹는 거. 이시이랑 사귀냐는 소리에 체한 거.”
“하지 마.”
“너랑 영화 보는 거.”
“그만.”
“방금 동전 내기도,”
“그만해.”
“너랑 키스하는 것까지.”
“그만 하라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니노는 악에 받혀서 계속 말을 이었다. 장소는 학교 뒤뜰. 날은 좋고, 너는 땀범벅에…! 나는 잠자코 방구석에서 니노가 들고 온 가방을 들어서 품속으로 던지듯이 건넸다. 가. 니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코웃음을 치고는 방을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삐리리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났다.
‘운명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이어지는 건가?’ 니노의 말이 차갑게 메아리쳤다. 처음 보는 눈을 하고선, ‘어차피 운명이니까.’라며 차갑게 뒤를 도는 니노가 있었다. 이딴 문제 따위 운명이 거부하는 거라며 깔끔히 등을 돌리는 니노가 있었다. 내가 만든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다.
*
“-그래서, 그 남은 방학 내내 연락을 안 했다고?”
“…응.”
망했네. 이시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발끈했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라니까?”
“네, 네. 근데 니노미야 쪽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며?”
“…그야 그렇지만.”
차마 운명이라니 뭐니를 꺼낼 수는 없어서 이시이에게는 대강의 이야기만 해 주었다. 간추리니 집에서 학교를 도착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이야기에 허탈감이 가득했다. 짧은 거리에 한 달간 연락하지 않은 싸움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니. 잔뜩 꼬여있는 줄 알았는데 또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 뒤로 먼저 사과하라는 이시이의 말을 뒤로 하고 멍하니 걸었다. 개학하면 자전거를 타겠다는 다짐은 언젠가부터 없어져 있었다. 먼지투성이가 되어서는 창고에 박혀있는 자전거를 꺼내서 닦을 힘도 나지 않았다.
바뀐 자리는 니노와 정 반대에 위치했다. 언제는 다른 자리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앞자리면 눈이 나빠졌다는 핑계를, 뒷자리면 키카 커서 뒤에 앉겠다는 핑계를 들어 어떻게든 같이 앉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앞자리에 앉은 니노를 흘긋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책상에 엎드려 누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완연한 가을이었다. 파아랗게 물들어서 곧 파란 이파리의 색도 앗아갈 것이었다.
한 달은 생각보다 길어서 엉망이었던 감정은 제자리를 잡았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돌이켜 볼 시간도 충분히 있었다. 매일 생각이 났고, 매일 사과하자고 다짐했고, 매일 밤 관뒀다. 밤만 되면 반짝이는 별들이 마음에 들질 않아서 나는 침대 위에 일어서서 확 별을 떼어버렸다. 예상한대로 벽지도 같이 찢어져서 엄마에게 된통 혼이 났지만 잘 때마다 복잡한 기분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야 나았다. 빨개진 눈이 익숙해져서 나는 오늘 오는 길에 몇 번이고 이시이에게 내 눈 상태를 물어보았다. 진짜 안 빨간 거 확실하지?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니노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곧잘 친구도 만들고, 벌써 같이 밥 먹자는 친구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귀는 쫑긋 열고 수업보다는 니노 쪽에 집중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자거나 그런 다짐도 진작에 없어졌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니노 때문에 다짐한 거였으니까.
시간은 금방 갔고 나는 온종일 신경을 쓰며 빨리 사과하라는 이시이의 잔소리를 받아내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새 학기 당번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이름이 ‘아’, 게다가 그 다음 글자는 ‘이’로 시작했으니까. 학교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쓰레기봉투는 터져나갈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방학식 날 버리지 않았거나, 방학동안 가끔씩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만들어낸 것 같았다. 쓰레기를 버리고 하교하라는 말에 나는 한숨을 쉬고 교복을 걷었다. 오랜만에 입은 춘추복이 낯설었다.
나는 낑낑대며 쓰레기봉투를 들었다. 무거워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는데 힘이 들었다. 나는 쓰레기봉투를 커다란 쓰레기통에 넣고는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단순한 습관이었다. 이파리가 벌써부터 빨갛고 노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문득 쓰레기통이 뒤뜰과 이어진 모퉁이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백 번은 더 되감아 본 장면에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무시하고 갈 길을 가려고 했지만 이미 발은 내 생각과 다르게 뒤뜰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엔 니노가 있었다. 뻔하고 어이없게도.
니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텅 빈 가방만 매고 이어폰만 달랑 끼고 있는 걸 보면 딱히 뭔가 일이 있어서 여기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니노는 금방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발이 간신히 닿는 곳에 조금 튀어나온 부분에 걸터앉아 있던 니노는 팔을 짚어 살포시 뛰어내렸다. 이대로 집에 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시이가 오늘 내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과, 해. 알겠지. 머리를 벅벅 긁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꾹꾹 누르기만 하던 입술을 간신히 떼어내어 말을 걸었다.
“안녕.”
“그래.”
니노의 대답은 가벼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집 가는 거야?”
“응.”
“…그렇구나.”
딱히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사이를 비집고 맴맴거리던 매미도 이제 없었다. 니노는 빼놓은 한 쪽 이어폰을 귀에 집어넣고는 그럼, 이라고 입 모양을 내고는 발을 옮겼다. 나는 나를 스쳐지나가는 니노를 두고 발을 동동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마음을 먹고 몸을 돌려 걸음을 빨리 했다.
“잠, 깐만…!”
어깨를 잡힌 니노는 그 쪽 이어폰을 빼냈다. 얘기, 좀, 해. 니노는 침묵했다. 그리고 반대쪽 발을 움직여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반대쪽 이어폰도 빼내서 어깨에 대강 걸쳐두고는 니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 그러니까.”
생각보다 말은 잘 나오질 않아서 답답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되는데, 그 말만 하면 정말 되는 건가 싶은 사념이 들어찼다. 니노는 하얀 캔버스화를 신은 발로 땅을 몇 번 차서 흙먼지를 만들어 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어…?”
“너도 이 말하려고 나 붙잡은 거 아니야?”
그건 그런데….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니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미안하다고.
“처음이라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나중에야 생각이 들더라.”
“나, 나야말로. 갑자기 화내서 미안.”
니노는 피식 웃었다.
“아, 그리고 진짜 진심이었으니까.”
실제로 미리 보인 것도 맞고, 보이니까 궁금해진 것도 맞는데. 어쨌든 안 보이는 게 더 많고. 내가 본 것보다 더 많이 같이 있었고. 니노는 이번에는 신발로 바닥에 줄을 죽죽 그었다. 하얀색이 금방 누래질 것 같았다.
“아직도 감정이 없니 따라하는 것뿐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귀까지 다.
“어쨌든 아이바 쨩이 좋아서 더 붙어먹은 거니까.”
“나도 니노 좋…, 어?”
땅바닥만 내리 쳐다보다 그제야 나는 눈을 마주쳤다. 어라, 이제야 보네. 니노는 흐흥하고 웃음을 흘렸다. 빨개진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정말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귀만 빨개져서 그 때는 하얀 니노만 보였었다.
“-그거, 기억해?”
“어, 어?”
“뒤뜰에서, 키스한다는 거.”
“아아…, 응.”
니노는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니노는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운명이라는 게 아직 거슬려?”
“아니, 그게.”
니노는 깔깔 웃으면서 내 허리를 붙들었다. 손은 언제 이렇게 단단해진 건지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바 쨩, 바보구나.”
“응?”
“그 때, 내가 하나 더 말했잖아. 아이바 쨩이 땀범벅이라고.”
“…아아?”
“그러니까, 이건 그 날이 아니야. 그 날은 내가 잔뜩 삐진 것 같으니까 알아서 잘 해봐.”
아무 말 않고 얼굴만 붉어지는 내 허리를 놓고는 니노는 어깨에 올려놓았던 이어폰을 들고 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지금도. 잘 해봐. 니노는 발꿈치를 조금 들어 물음표를 띄운 내 한 쪽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생소하지만 좋은 멜로디가 귓가를 맴돌았다. 남은 한 쪽은 제 귀에 끼우고 니노는 웃었다.
“잠, 니-.“
그리고는 뺨을 잡아 내 얼굴을 내리고는 키스했다. 얼떨결에 벌린 입술 사이로 달큰한 혀가 얽혀 들어왔다. 나는 얼음 상태로 있다 떨리는 손으로 니노의 뺨을 움켜쥐었다. 첫키스였다. 누군가 얘기하는 것처럼 종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초코 무스 케이크보다 달콤했다. 어쩌면 캬라멜 에클레어보다도 더.
*
니노는 여전히 투명했지만 가까이서 빛나는 별이었다. 미치도록 빛이 나서 오히려 저 멀리 있는 것이라 치부해버리고 말아 버릴지도 모르는 소중한 별이었다. 여전히 운명은 거기에 남아 있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준비된 장면을 맞이하겠지만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 넘버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펼쳐진 무대의 결말이 뻔한 곳에서 나는 얼마든지 애드리브를 넣을 수 있었으니까. 니노는 활짝 웃으며 그걸 반겨 줄 것이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담는 것처럼, 그렇게.
집에 가는 길에 야광별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네 개를 붙이고 싶어졌다.
비록 그게 가짜별일지라도
꼬소밍
신발을 갈아 신자마자 거짓말처럼 엄마의 심부름이 생각났다. 두부 두 모, 간 돼지고기 2인분 그리고 아이스크림. 집을 나오기 전 받았던 천 엔의 감촉이 생생했다. 어디 넣어 뒀더라. 가방 깊숙이 넣어 둔 지갑을 꺼내어 뒤졌지만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애초에 내 돈도 여기 넣어놓지 않는데 지갑부터 찾은 건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뭔가, 그럴 것 같았단 말이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주머니를 뒤졌다. 교복 바지 안에서 스마트 폰, 100엔짜리 동전 다섯 개, 그 다음으로 완전히 구겨진 천 엔 한 장이 나왔다. 나는 구겨진 천 엔을 최대한 빳빳이 펴고 집과 가까운 슈퍼로 발을 옮겼다. 구겨진 대로 가져가면 엄마와 친한 사이인 점원 이시오카 상에게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슈퍼를 나올 때가 되어서는 생각보다 무거워진 비닐가방에 어깨가 뻐근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고 기말고사는 그보다 더 얼마 남지 않아서 가방마저 무거운 것도 한몫했다. 어제도 이만큼 들고 갔는데 한 권도 제대로 보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서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가벼운 거, 몸이라도 무거운 편이 낫지 않겠나 싶어 오늘도 거진 전 과목을 넣어버린 건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중력이 두 배는 세진 것 같았다. 저절로 구부러지는 허리를 애써 펴면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해가 지고 있어서 하얀 슈퍼가 노을빛에 물들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이시오카 상이 카운터에서 물건의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이시오카 상, 오늘 좀 의외였지. 두부 두 모, 간 돼지고기 2인분 그리고 아이스크림 몇 개로는 절대 이만큼 무거울 수 없었다. 마사키 군, 이것도 들고 가고, 아! 저것도 들고 가. 공으로 뭔가를 나눠주는 분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탓에 나는 거절할 틈도 없이 비닐가방에 물건들을 욱여넣었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알잖아, 유통기한이랑 먹을 수 있는 기한은 다른 거. 은밀한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내 귀에 바짝 붙어 말하는 이시오카 상에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하하,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손잡이 하나씩 나누어 들고 있던 비닐가방을 한 손에 들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헉. 큰일이다.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이대로라면 저녁을 제 시간에 먹지 못할 지도 몰랐다. 주재료가 내 손에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손바닥을 파고드는 비닐가방 손잡이를 꽉 쥐고 빠른 걸음을 걸었다. 여름이 시작된 지는 꽤 되었지만 해질녘의 공기는 그런대로 시원했고, 쓰지도 않는 지갑을 열었다거나 이시오카 상이 공짜로 뭔가 주셨다거나 하는 일들은 일기에도 쓰지 않을 사소한 해프닝 정도로 옅게 부는 바람에 떠밀려 갈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걸 아직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다음 일 때문이었다. 사소하게 다른 일도 벌어지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아주 다른 일.
“저기.”
“…저기.”
그 애는 나를 두 번 부른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말이다. 첫 번째는 너무 작은 소리라 설마 나를 향한 소리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멀리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메아리의 흔적인 줄로만 생각했다. 두 번째에는 어깨보다 조금 아래쪽에서 자극이 왔기 때문에 알아챈 거였다. 꾹, 하고 손가락으로 찌르는 자극 말이다. 나는 뒤를 돌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나보다 한 뼘은 더 작은 그 애는 앳된데다 교복도 입고 있지 않아서 척 보기에 중학생 같았다. 하얀 피부는 지난여름 한 번도 밖을 나간 것 같지 않았다. 팔꿈치까지 내려와서 한 사이즈는 큰 것 같은 반팔을 입은 그 애의 팔은 하얗다 못해 뽀얬다. 연한 듯 또렷한 눈매에 조막만한 얼굴, 까만 머리칼은 하얀 피부에 더해져 현실감이 없었다. 동화 속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 애는 나를 불러 놓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쪽에서 말을 걸어야 하는 건가 싶어 나는 입을 달싹였다. 얼마 있지 않아 그 애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안녕.”
“어…, 안녕.”
“장 본 거야? 저녁?”
“뭐…, 그렇지.”
“헤에, 그렇구나.”
비닐가방 안을 보고 있는 듯 그 애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박혔다. 나는 움찔거리며 비닐가방을 뒤로 숨겼다. 딱히 보지 말아야 할 게 든 것도 아닌데, 생판 모르는 아이에게 사생활을 들킨 것 같아 왠지 부끄러워졌다. 그 애는 낮게 코웃음을 흘리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열이 확 오르는 기분이었다. 무겁겠다. 별 의미도 없는 문장에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머리를 마구 때렸을 것이다. 중학생 앞에서 말 하나 제대로 못하냐. 이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나마저 속인 변명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음에 또 봐.”
그 애는 마치 다음이 정말 확실히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는 뒤를 돌아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 애가 점처럼 사라질 때까지 그 곳에서 멍하니 있다가 엄마의 전화에 정신을 차리고는 집까지 뛰어갔다. 반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에 1차로 혼나고, 저녁시간 늦어지겠다고 2차로 혼났지만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을 때는 이미 엄마의 잔소리는 다른 귀로 흘러 나간 지 오래였다. 나는 팔로 머리를 받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무거운 짐 탓에 어깨가 결렸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어릴 적, 간신히 생각이 나는 단편적인 기억에서 나는 이 방의 천장을 야광별로 꾸미고 있었다. 떼기도 곤란해서 아직 이 방에 남아있는 별들이 하나 남은 기억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었다. 깜박깜박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빛도 나지 않는 별들이 깜박깜박 빛나는 것 같았다. 매일 밤 보는 광경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이 난 별 이야기 때문인지, 밖에서 풍겨 들어오는 마파두부의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그 애 때문인지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여름방학이 되었다. 오늘만 가면 한동안은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부풀었다. 어제는 집이 가까운 탓에 자주 타지도 않던 자전거에 기름칠까지 했다. 더운 바람을 맞으며 등교하는 기분은 꽤 좋아서 개학을 하면 자전거를 자주 탈 것 같았다. 한 주 전에 나온 기말고사 성적표는 어질러진 책상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을 것이다. 중간고사와 별 다를 것 없이 성적은 겨우 조금 올랐다. 무거운 가방을 매고 다녔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꽤 뼈아팠지만 어쩔 수 없나, 하고 생각했다. 애초에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고, 공부에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조금 오른 걸로 만족하는 편이 방학을 즐기기에도 나을 것이었다.
“아이바, 학교 끝나고 야구?”
“됐거든, 내가 야구부냐.”
이시이는 방학식까지 날 붙잡고 ‘그럼, 야구부 들어라.’라며 징그럽게 손을 마주잡고 흔들었다. 아무래도 학기 초에 저 야구 오타쿠한테 야구를 좋아한다고 말한 내가 잘못인 모양이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팔을 흔들리게 두었다. 긍정의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이는지 이시이는 짓궂게 혀를 차고 손을 놓았다. 나는 이시이의 장단에 맞춰 장난스레 손을 털었다. 아야야, 아파라. 이시이는 눈을 흘기며 웃었다. 엄살은. 이시이는 내 앞 자리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건 그렇고, 전학생 오는 거 알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반문하는 내 목소리가 조금 튀었지만 이시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방학식이잖아. 보통 개학날에 오지 않나?”
“내 말이. 특이하다니까.”
이시이는 의자를 까닥거렸다. 오늘 오면 친구도 만들기 애매하고. 여러모로 애매할 텐데. 이시이는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는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는 굳게 닫힌 교실 앞문을 응시했다. 복도도, 화장실도 뒷문에 가깝기 때문에 선생님이 다니시는 것 말고는 잘 열리지도 않는 문이었다. 저기로 들어온단 말이지. 전학생은 몇 번이나 받아보았고 신기하다거나 두근대는 기분도 첫 경험보다 덜했지만 방학식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마음이 들떴다. 확실히, 개학날 오면 기분 나빴을 지도. 속으로만 생각했다.
“특이한 건 너잖아. 아무도 모르는데, 전학생 소식.”
“거야, 매일 아침에 내가 교무실 출석하잖냐.”
아. 내가 들어도 건조한 음성이 나왔다. 꽃에 물을 뿌리는, 대체 왜 학생이 하는 건지 모르겠는 일이었지. 이시이는 계속해서 의자를 까닥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남자더라. 되게 어려보이고 하얀.
“-어?”
그런 애는 야구 안 하겠지. 전교생을 야구부로 만들 생각인건지. 영양가 없는 이시이의 혼잣말을 뒤로 하고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애도 어려보이고 하얬는데. 기억 저편으로 넘어갈 뻔한 조각이 방금 전 일이었던 것 마냥 되살아났다. 이 지역 중학생인 줄 알고 은근히 중학교 주변을 돌아다녔던 날들이 있었다. 금방 관뒀지만. 찾는다 해도 얼마 나누지도 않은 대화가 마음에 걸려서 찾았다는 꼴사나운 말은 할 수 없어서가 가장 큰 이유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흐려져 가는 기억이 어디까지 왜곡되고 미화된 건지 알 수 없게 되어서, 는 그 다음 이유였다.
‘다음에 또 봐’라며 웃던 그 애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가도 환영처럼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시간은 쓸데없는 생각만 만들어서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는지 헷갈렸다. 어쩌면 웃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에 또 보자는 이야기도 내가 멋대로 만든 것일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나는 입가에 머물던 손을 움직여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에는 전학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어려보이고 하얀 남자애가 그 애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손톱이 책상 모서리를 두드려서 소리가 났다. 다르륵, 다르르륵. 보통 전학 오기 전에 미리 와 보나? 아니, 그 애가 나랑 같은 나이긴 해? 나 혼자 곱씹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들을 마구 내놓았다. 아닐 거라고, 멋대로 답을 정해서는.
그럼에도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가장 빨리 든 건 나였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곧이어 열린 문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그 뒤를 따라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불투명한 창에 비치는 인영은 당연하게도 까매서 나는 가슴을 졸였다. 인영은 일렁이더니 하얀 실내화를 교실로 들였다. 그리고 차례로 하얀 다리, 팔, 뺨-. 나는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그 애였다. 아무리 눈을 깜박거리고 힘을 주고 다시 봐도. 그 애였다. 이전 학교의 교복인건지 나와는 조금 다른 푸른빛의 교복을 입고, 까만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매고 있는. 그 애는 교실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보고는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맹세코 환영이 아니었다. 나는 웃는 그 애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마주 웃지도 못한 채 눈만 깜박거렸고, 그게 웃겼는지 그 애는 실없이 웃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선생님의 조회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니노미야 카즈나리, 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애는 빈자리에 앉아 가방을 책상 위에 놓았다. 하필 자리는 내 자리 반대편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들리지도 않는 선생님의 말소리를 속으로 재촉했다. 그 애, 니노미야는 앞을 응시하다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자연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보다 그 애를 쳐다본 일이 더 많은 탓이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보이지도 않는 사각에서 그 애가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담임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종소리와 상관없이 방학식은 수업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종소리가 꼭 레이싱 게임의 출발신호 같았다. 다가오는 이시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못 본 척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애에게 다가갔다. 내 것보다 조금 낮은 감의 같은 책상을 짚고 그 애를 내려다보니 그 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싱거운 소리를 뱉었다. 아, 하고. 아무 표정도 없는 소리에 나는 묻고 싶었던 질문을 산더미에서 주먹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줄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위아래 입술을 마주 꾹 눌렀다. 내 행동이 민망해질 정도로 담담한 그 애에게 뭐부터 물어봐야할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얘기하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런 기운을 눈치 챘는지 그 애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 …응! 그렇지. 나는 우물쭈물하며 옆 자리 의자에 앉았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왠지 그런 분위기였는지 옆 자리의 나카무라가 자리를 비켜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비킨 건 아닌가 싶어 나는 나카무라의 뒤를 눈으로 좇았고 원래 노는 무리끼리 모여 휴가 이야기를 하기에 안심했다. 뭐든 간에 민폐는 싫어서. 나는 다시 그 애를 마주했다. 그 애는 인내심이 좋은지 제대로 형태를 띠는 첫 마디를 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전학 온 거야?”
“보다시피.”
그 애는 어깨를 으쓱댔다.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질문에도 답해주는 걸 보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 때, 너무 평범해서 조금 이상했던 이야기를 나눴을 때의 기분이었다. 조금 들뜨고, 그 때보다 시간은 일러서 노을이 지기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얼굴이 확 불타오르는 것 같은 기분. 그 애는 그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웃는 낯에, 뭔가 신비로운 표정. 익숙하게 그려지는 그림에 나는 금세 자신감을 되찾았다. 나는 금방 다음 질문을 했다.
“전에 만난 건, 이사 오고 나서야?”
“아니, 이사는 어제 끝났어.”
“그럼 놀러 왔던 거야?”
“뭐. 겸사겸사.”
아이바 쨩도 보고. 아, 아이바 쨩이라고 불러도 되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은 없지만. 아이바 쨩이라니, 초등학생 때 이후로는 불려본 적 없는 호칭을 곱씹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혀가 어색했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그래서 타이밍을 잃어버린 다음 말은 꺼내질 못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동자가 거는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대신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럼 나는 니노라고 부를래.”
“아아, 물론.”
생각보다 담백하게 긍정하는 그 애에 나름 패기롭게 던진 말이 바랜 느낌이었지만 ‘그 애’ 대신 니노라는 제대로 된 호칭이 생겼다는 데 위안을 삼았다. 니노는 책상 위 가방에 팔을 얹었다. 푹 꺼진 가방이 척 봐도 아무것도 들어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첫 날인데다 방학식이니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게 어쩌면 더 자연스러웠다.
“왜 방학식에 온 거야?”
니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는 듯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왜 방학식에 왔냐는 거지?”
내 질문과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 돌아왔다. 나는 아무 말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니노는 가방에 얹은 팔을 굽혀 턱을 괴었다.
“아이바 쨩이 빨리 보고 싶어서?”
“…어?”
반 박자 늦은 주제에 튀어나온 말이라곤 고작 감탄사뿐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내가 웃겼는지 니노는 콧소리를 냈다. 농담이야.
“별 이유는 없어. 그냥 어쩌다 보니.”
“부모님 일이라거나, 그런 거?”
“응, 그런 거.”
“그래도, 방학식 날에 오면 친구 사귀기도 애매하잖아.”
“상관없어.”
그리고, 아이바 쨩이랑은 이미 친구잖아? 니노는 손가락으로 내 어깨를 꾹 찔렀다. 첫 만남 때와 비슷한 감각에 나는 움찔했다. 그리 센 자극도, 옅은 자극도 아닌 니노의 자극. 살포시 버튼이 눌린 것 같았다. 말갛게 웃는 니노와 멍하니 노을 진 니노를 바라보는 나. 지울래도 지워지지 않는 영상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 되었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진 자극이 기억을 얹고 어깨서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쩍 웃음이 퍼지는 니노의 표정처럼, 그렇게.
슬며시 올라간 니노의 입꼬리에 나는 입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키며 눈치를 봤다. 부담스러울까 싶어 나는 몇 번이고 말을 고르고 고르며 갈라진 입술을 혀로 훑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생각해 둔 문장을 되뇌며 나는 입을 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막상 내뱉은 말은 우왕좌왕하고 정리되지 않았고 서툴렀다.
“그럼, 나랑 놀아!”
그러니까, …방학에, 아니, 그러니까! 나는 손까지 휘저으면서 허둥댔다. 니노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깔깔 웃었다. 데이트 신청하는 모태솔로 아저씨 같아. 웃은 것 보다 그 다음 대사가 더 충격적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체했다. 그렇지만 태어날 때부터 표정 숨기기는 젬병이었다. 공기가 후끈해진 게 얼굴이 달아오른 것 같아 나는 두 볼을 가렸다. 그리고 괜히 큰 소리를 내고 입을 쭉 내밀어 웅얼댔다.
“아니거든! …싫음, 말고.”
“좋아. 방학에 놀러가자.”
니노의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두 팔은 다리 사이에 넣고는 의자를 짚고 있어서 상체가 조금 숙여져 있었다. 키가 큰 건 내 쪽이라서 니노는 고개를 위로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형광등 빛에 일렁이는 눈동자가 은근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투명해 보이는 눈동자는 뭐든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적어도 나를 빨아들이는 데는 성공했는지 입가가 올라가고 자세가 변하는 게 곁눈으로 뻔히 보이는데도 나는 멍하니만 있었다.
니노가 고개를 완전히 내리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고 예고도 없이 내게 달려들어 내 바지춤을 더듬는 손에 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우왓. 무조건 이것보다 더 이상한 소리. 양 팔도 심장도 허공에 붕 뜬 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니노의 정수리만을 필사적으로 노려보았다. 다른 곳을 쳐다보다 다른 애랑 눈이 마주치는 편이 더 민망할 것 같아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정중앙보다 조금 왼쪽에 치우친 가르마를 따라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멀미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지만 왠지 멀미가 그런 기분일 것 같았다.
찾는 건 내 폰이었다. 니노는 바지주머니가 불룩한 걸 봤는지 금방 내 폰을 꺼내서 화면을 켰다. 자판을 빠르게 치더니 이번에는 자기 폰도 꺼내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됐다. 짧은 혼잣말을 끝으로 나는 폰을 다시 돌려받았다. 나는 폰과 니노만 번갈아 쳐다보며 끔벅댔다.
“그, 나 오늘 뒤엔 이삿짐 정리로 바쁘니까.”
긴 얘기는 메일로 하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환하게 켜져 있는 화면 상단에 ‘二宮和也’ 네 글자가 박혀 있었다. 연락해. 니노는 습관인 듯 다시 익숙하게 팔을 괴었다. 90도로 꺾인 손바닥에 니노의 뺨이 먹혀들어갔다. 고개는 태양빛을 받으면 자동으로 끄덕이는 인형마냥 끄덕거렸다. 그렇지만 니노의 번호가 생겼단 두근거림보다 휴대폰을 보였단 알 수 없는 창피함이 더 컸다. 그 날 비닐가방을 숨겼던 것처럼 이상한 기분. 나는 이시이가 멋대로 설정해둔 배경화면을 떠올리고는 경악하며 집에 가면 뭣보다 빨리 잠금을 걸어놓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정말 바쁜 모양이었는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집으로 가도 된다는 말을 하러 들어온 선생님과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니노의 자리를 봤을 때는 푹 꺼진 가방도, 푸른빛이 도는 교복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있었다. 레이싱 게임이 이제야 끝이 난 듯 무언가 들뜬 마음에 공란이 느껴졌다. 나는 같이 집에 가자는 이시이에게 대강 대답을 하며 폰을 꼭 쥐었다. 그러다 배경화면 생각에 괘씸해져서 이시이 머리를 툭 쳤다. 이시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
메일이 온 건 밤늦게였다. 먼저 메일 할까, 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바쁘댔으니까 먼저 메일 해봤자 나만 초조할 게 뻔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메일 하지는 않았지만 기다리긴 엄청 했단 거였다. 그래서 목욕까지 하고 와서 뒷머리를 대강 털면서 폰을 봤을 때는 머리를 털던 손까지 멈추고는 자세도 바꿔 앉았다. ‘ニノ’라고, 내가 그새 바꿔버린 이름이 알림창에 박혀 있어서.
[자?]
시간은 아직 10시였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는 걸 생각했는지 메일은 짤막했다. 나는 손에 묻은 물기를 잠옷 바지에 대강 닦아내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니. 완전 깨 있어.]
[다행이다. 늦어서 미안.]
[괜찮아!]
니노는 타자가 빠른 모양이었다.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답장이 바로 왔다.
[내일도 바쁠 것 같아서. 모레라거나 어때?]
[좋아. 어디 살아? 중간에서 만나자.]
그런대로 근처에 살아서 아직 길이 익숙지 않을 니노 대신에 내가 그리로 가기로 했다.
[뭐 할까? 좋아하는 거 있어?]
좋아하는 거. 이시이 때문인지 야구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망할. 니노의 답장이 워낙 빨라서 일단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같이 야구하거나, 경기를 보러 가는 것도 실제로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사진]
글 대신 내일 날씨 예보 캡처본이 왔다. 33도를 웃돈다는 기호와 함께 해가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쪄죽을 일 있냐.]
필터를 간신히 하나 거친 것 같은 문장에 나는 풋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를 계속 굴렸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 뭐 있더라.
[스위츠 좋아하는데.]
[난 단 거 별로.]
[엑. 어떻게 그래??!]
나는 말도 안 돼, 라고 중얼거리면서 메일을 보냈다.
[초코케이크라면 먹긴 하니까. 스위츠 먹으러 가자, 그럼.]
야구는 칼같이 거절하더니 잘 먹지도 않는다는 스위츠는 괜찮다는 걸 보니 실내라는 게 커다란 점수를 차지한 것 같았다. 니노가 보낸 날씨예보가 머리 위를 동동 떠다녔다. 나는 알겠다는 메일과 함께 손에 기합을 넣었다. 분명히 초코케이크밖에 안 먹었으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다. 세상에 맛있는 스위츠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기필코 니노가 좋아할 스위츠를 찾아내리라 다짐했다.
몇 번 더 메일이 오가고 계단을 몇 번을 오른 건지 모르겠다며 피곤하다는 니노와 잘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폰을 침대맡에 두고 침대 위로 뛰어 누웠다. 내 무게에 침대가 일렁일렁 움직였다. 따라서 일렁대는 천장의 별들을 눈에 담으며 눈을 감았다. 화이트 초코로 만든 작은 별이 콕 박힌 초코케이크를 먹는 니노가 꿈에 나왔다.
*
니노는 겨자색 티를 입고 나타났다. 여름과 어울리는 색깔이었지만 오래 입은 건지 사용감이 있었다. 옷의 사용감이라거나, 평소에 신경 쓰는 편도 아니었는데 내가 입은 옷이 새것이라 그런지 묘하게 튀어보였다. 니노는 두리번대더니 도로 반사경 앞에 선 나를 보고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녕. 갈까? 10년은 본 사이처럼 우리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다. 이야기가 끊겨 매미소리가 틈을 비집고 울릴 때도 있었지만 어색함은 없었다.
가기로 한 스위츠 가게는 버스를 타고 가기엔 애매한 거리라 조금 걸어야 했다. 있잖아, 아이바 쨩-. 33도라고? 더워-. 니노는 가게에 도착해서야 말끝을 늘이는 걸 멈췄다. 가게 안은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빵빵하게 돌아가는 에어컨에 나는 새삼스레 여름을 느꼈다. 니노는 폭신한 의자의 등받이에 머리까지 뒤로 젖히고 앉았다.
“나 신경 쓸 필요 없이 아이바 쨩이 먹고 싶은 걸로 사오면 되니까.”
힘없이 손을 흔드는 꼴이 자기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니노 위로 손을 저어 에어컨 바람이 잘 오는지 확인하고 테이블 위에 놓아둔 지갑을 움켜쥐었다. 몇 년 만에 지갑에 제대로 돈을 넣은 건지. 집을 나오기 전 천 엔짜리 몇 장을 지갑에 넣을 때보다 더 두근대는 마음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옮겼다. 기필코, 맛있는 걸.
나는 한참 지나서야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니노는 나를 보고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은 내 얼굴보다 조금 아래를 향해 있었다. …그거, 다 먹을 수 있는 거야? 이번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의심스럽다는 눈빛이었다.
“에, 많아? 거짓말.”
“디저트가 아니라 메인디시 수준이잖아.”
점심 안 먹고 왔어? 아니, 그건 아닌데. 나는 테이블에 스위츠를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건 초콜릿 무스 케이크. 이건 딸기슈. 이건 캬라멜 에클레어.”
“…확실히 내가 마음대로 사오라고는 했지만.”
“세 개가 많아? 둘인데?”
“난 안 먹는다니까.”
“초코케이크도 있으니까 한입씩만 먹어주라, 응?”
나는 엉덩이까지 들어 얼굴을 들이댔다. 니노는 나를 바라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크를 쥐었다. 포크가 초코케이크를 갈랐다. 어때? 니노의 입이 몇 번 오물댔고 나는 긴장한 기색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이곳도 사실 초코 무스 케이크가 맛있어서 고른 것이었다. 맛없다고 말하면, 아니 그저 그렇다고 말하기라도 하면 다른 것에 자신이 없었다.
“맛있어.”
“정말? 역시 그렇지?”
다행이다-. 여기 초코 무스 케이크, 이 근처에서 제일 맛있어. 내가 다른 곳 초코케이크를 10개는 더 먹어봤는데 말이지. 여기가 제일 촉촉하고, 달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에 나는 말을 멈췄다. 아이바 쨩, 긴장 풀리면 말 많아지는 타입이야? 귀찮네-. 나는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고 그게 웃긴 모양인지 니노는 팔로 입을 가려 웃었다.
포크는 무심하게 다시 움직였고 이번에는 에클레어였다. 끄트머리까지 들어찬 땅콩캬라멜 크림에 위에는 캬라멜 장식이 올라가 있었다. 이건 나도 처음 먹어보는 거였다. 다른 맛을 먹어본 적은 있어서 오직 그 경험과 점원분의 추천으로만 정한 거였다. 나는 무릎 위에 놓은 두 손을 꼭 쥐었다 폈다.
“-어라.”
맛있네. 니노는 에클레어를 조금 더 덜어 먹었다. 한 번 더 입에 넣는 걸 보고서야 나는 마음 놓고 포크를 들 수 있었다. 단 게 들어가니 마음도 한껏 풀어져서 나는 마구 떠들었다. 줄어가는 스위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아서 나는 물을 가져다 놓고 목을 축이며 말했다. 니노는 대개 들어주는 쪽이었는데 가끔씩 자기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근데-,”
“우웅?”
“이시이랑 사귀는 중?”
“ㅋ, 커억, 누가, 뭐, 라고?”
니노는 깔깔 웃으며 양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을 건넸다. 물을 마셨는데도 기침은 멈추지 않아서 니노가 팔 한 쪽을 두드려 주었다. 등이라면 모를까, 하나도 도움 되지 않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니노는 ‘여기였어?’ 같은 이상한 말만 늘어놓고 웃었다. 가득 차 있던 물을 거의 다 마시고서야 기침이 잦아들었고 나는 찡한 코를 감싸 쥐며 물었다.
“대체 왜???”
“이시이 얘기만 하길래.”
니노는 어깨를 으쓱댔다. 윽.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확실히 그랬긴 했지만. 여름방학에 야구 경기 보러 가자는 말을 했다고 막 이야기 한 참이었다. 야구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좋아하는 쪽이라며 날씨만 좋으면 자기도 가겠다고 한 것도 니노였고. 대화도 막힘없었고. 종종 웃기도 하길래 좋은 분위기인 줄 알았더니. 이시이 좋아하냐는 물음에 당연히 친구로서 좋다는 생각으로 딸기슈를 우물거리면서 끄덕거린 게 떠올랐다. 그럼, 그 질문이. 나는 경악했다. 아니면 말고. 니노는 별 얘기 아니었다는 듯 그릇에 포크를 긁어댔지만 나는 생각회로가 고장 난 것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나섰다. 저녁시간 전에 들어오겠다고 했다는 니노 때문이었다. 아이바 쨩 때문에 저녁은 못 먹겠다며 니노는 배를 두드렸다. 내가 먹은 양이 니노의 배는 되는데 배가 작은 모양이었다.
“재밌었네―.”
헤어져야 할 때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한여름이라 해는 아직 지지 않았고 낮보다 시원해진 바람은 앞머리를 간질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끈적하고 더운 날씨였다.
“응.”
그런데도 배가 부른 탓인지 덥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엉터리 이유지만 말이다. 니노는 내 대답이 마음이 들었는지 눈꼬리를 접었다.
“역시 좋아. 만질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그러게.”
니노는 발을 멈추고 내 팔을 잡아다 끌었다.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는 말에 나는 얼렁뚱땅 동조했다. 팔에 모든 열기가 다 모인 것 같았다. 내 손목을 잡은 니노의 하얀 손에 눈을 떼지 못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아이바 쨩?”
“…어, 어?”
“뭐야, 어딜 봐. 내 말 듣긴 했어?”
니노는 내 팔을 강하게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웃는 모양이 기분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니노는 부러 입술을 비죽거렸다.
“좋아,”
“어?”
“…하는 거, 또 가르쳐 달라고.”
다음엔 그거 하고 놀자. 니노는 활짝 웃고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잘 가. 메일 할게. 고개를 드니 이미 니노 집 앞이었다. 나는 얼결에 손을 흔들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는 나는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거,
“…니노.”
헙. 나는 입으로 나온 말을 도로 넣으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지만 이미 형태를 잡은 감정은 부풀대로 부풀었다. 손틈 새로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어떡해.
“나, 니노 좋아하나 봐.”
좋아하는 것에 야구와 스위츠밖에 답을 내놓지 못했던 바보가. 언제부터 니노만 생각나서 아무것도 답을 내놓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처음부터. 나는 멍하니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쳐다보다 내 뺨이 하늘보다 더 빨개졌을 때 즈음 집으로 발을 돌렸다. 그 날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천장의 별빛이 너무 센 탓이었다.
*
[그럼 내일 봐.]
응, 이라고 쳐서 보내고는 나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방학은 반틈이 더 흘러가고 있었고 완연하게 초록색 빛으로 물든 세상은 싱그러웠다. 식물을 키워보겠다고 엄마가 집에 화분을 몇 개 놓는 바람에 초록색 여름 냄새가 집 안쪽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생명의 기운이 담뿍 느껴지는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나는 더 흐물흐물해져 갔다.
나는 팔을 위로 쭉 펴서 폰을 쳐다보았다. 한 손으로는 화면을 밀어내리면서 메일기록을 확인했다. 만난 지는 한 달이 남짓 되었는데 쌓인 메일의 개수는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위로 올려도 시작점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천천히 넘긴 탓도 있는 것 같긴 했다. 이미 수십 번은 더 본 메일이었지만 볼 때마다 손가락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한 달 새에 쌓인 연락만큼 만나기도 많이 만나서 나는 니노를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매일 연락이 끊이질 않는데다 전화도 많이 하고, 만나는 건 가깝다는 핑계로 이틀에 한 번 꼴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자주 보면 이제 나 좀 지겨워지지 않아? 흐흥.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그렇지만 아프게 꽂히는 말이 안부인사가 되었을 정도니.
니노는 게임을 참 좋아했다. 만나는 곳은 처음 몇 번은 밖이었다가 금방 니노네 집이 되어버렸는데 그것도 게임의 탓이 컸다. 장마도 한몫했지만. 미니게임부터 비디오게임까지 안하는 게 있나 싶을 정도로 하는 양이 많았다. 듣자하니 내가 없으면 무조건 게임기를 잡는 것 같았다. 내가 있을 때도 게임하잖아. 니노는 내 말은 무시해버렸다.
언젠가 하루 종일 니노 집에 있던 적이 있었다. 니노는 게임을 했고, 나는 그 주변에서 만화를 읽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나도 밥을 먹을 생각을 않아서 나는 니노에게 말을 걸었다. 안 먹지. 배도 안 고프고. 평소에도 그렇다는 말에 나는 그 때부터 뒷목을 잡으며 밥을 했다. 한 정성을 생각해주는 건지 니노는 그 때만큼은 게임기를 손에서 떼고 몸을 일으켰다. 어째 관계가 친구에서 밥만 해주는는 사람으로 내려간 것 같아서 울적해지려 하면 일시정지된 게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저 중요한 타이밍에, 일시정시하고 와줬어. …안다. 짠내 난다고 이시이도 말했다.
이시이의 얘기를 하자면 방학이 되고 니노를 세 번째로 본 날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 야구 경기가 잡혀서 운 좋게 약속이 생긴 날이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덥거나 꾸물했으면 이시이와 다른 야구광팬들과 어깨동무하면서 봤을 테니까. 아주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 날은 이시이도 있어서 데이트감은 전혀 없이 스위츠 가게보다 10배는 덜 로맨틱한 곳으로 가는 건데도 심장은 100배로 더 뛰었다.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기억나지 않는 장면이 많은데 말이 꼬였던 부분은 너무 잘 생각이 나서 고통스러웠다. 저 선수 ‘좋네’-, 같은 말만 나오면 비정상적으로 행동이 딱딱해지기도 했고. 온 시선을 야구에 집중하느라 그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던 이시이마저 헤어지고 나서 메일을 보냈을 정도였다.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어제 밤 샜어?]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니노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버렸더랬다. 이시이에게는 금방 전화가 왔다. 스위츠 가게에 가서 자기랑 사귀냐는 질문이나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엄청 웃었고. 웃을 때가 아니라고! 끊을 거야. 나는 씩씩 댔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다 어딘가 뒤로가기 버튼이 눌린 건지 화면이 바뀌었다. 열심히 올렸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폰을 쳐다보았다. 메일란 제일 상단은 니노, 그 다음은 이시이였다. 이시이의 최근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고백하는 건?]
한숨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아서 끝까지 답장을 하지 못했던 메일이었다. 나는 또 한숨을 쉬고 눈을 또르르 굴렸다. 그게 말처럼 쉽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일은 처음으로 니노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이었다. 새로운 환경에는 새로운 마음이 깃든다는 말도 있고. 어쩌면, 아마도.
[몰라, 멍청이 이시이.]
그런데도 역시 결론은 나질 않아서 나는 이시이에게 화풀이하듯 메일을 보냈다. 알 수 없이 붕 뜬 기분이 나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실례하겠습니다―.”
집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지만 니노는 습관처럼 말을 붙였다. 엄청…, 초록이네. 깔끔하게 회색으로 통일되었던 니노네 집과는 달리 화분에서 쑥쑥 자란 초록색 식물이 어색한 듯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니노를 내 방으로 이끌었다.
“생각보다, 엄청 깨끗…이 아니네.”
니노는 방문에 들어서자마자 오, 하는 소리를 내고는 두리번거리다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아이바 쨩, 밀어내는 게 청소는 아니니까. 이게 뭐야, 이건 언제 빨았고. 이건…, 아이바 쨩, 완전 구겨진 성적표가 내 손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급하게 청소한답시고 한 짓이 문제인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니노는 의자에까지 올라가서 성적표를 높이 들었고 중심을 잃어서 떨어질라 함부로 의자에 같이 올라가지도 못하고 아래서 손을 뻗는 나를 보고 깔깔 웃었다. 니노는 높이 성적표를 펼쳐들어서 눈으로 훑어 내렸다. 한 달 전에 본 참담한 성적이 어른거려서 나는 팔을 떨구고 망연히 니노만 쳐다보았다. 나름 잘 친 거긴 해서, 내 입으로 참담하다 하기도 뭐했지만.
“아이바 쨩…, 공부 해야겠다.”
그리고 정했다. 다음 시험은 정말 힘낼 거라고. 니노는 한참을 깔깔거리다 내가 걱정한대로 의자를 내려오다 다리를 살짝 헛디뎠다. 내가 밑에서 잡아준 덕인지 금방 중심을 잡은 탓인지 큰일은 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안 된다고 니노를 침대에 앉혔다. 계속 괜찮다고 일어서는 니노를 잠자코 앉히게 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는 음료라도 가져오겠다고 방을 나섰다. 니노를 잡느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거리에 벌게진 뺨을 달래기 위한 것도 한몫했다는 건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
집에 분명히 오렌지 주스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냉장고 속에는 물과 우롱차뿐이었다. 나는 똑같이 생긴 컵 두 개를 꺼내 우롱차를 따랐다. 컵 안으로 불그스름한 물이 채워졌고 작은 알갱이들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나는 컵을 양 손에 들고 방으로 갔다. 문은 덜 닫혀 있어서 양 손을 쓸 수 없었지만 발로 어떻게 열렸다. 침대에 앉아 있으랬더니 니노는 일어서서 내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더 앉아있지.”
“진짜 괜찮아, 유난은.”
니노는 발을 움직였다. 봤지? 괜찮으니까. 니노는 내가 건넨 우롱차를 받아들고는 계속 방을 돌았다. 달리 특별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신기한지 니노는 한 손을 턱에 대고 눈을 굴렸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비닐가방을 숨기거나 폰 배경화면에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감정 대신 다른 감정이 들어찼다.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두근대는 감정. 혹시 사소한 걸 보고도 내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제멋대로이고 염치없이 두근대는 감정. 이대로 계속 니노 옆에 있으면 내 심장소리가 니노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니노는 얼마 있지 않아 내게로 왔다. 니노가 앉자 침대가 조금 튀었다. 보잉보잉 거리는 느낌이 간질거렸다. 니노는 거의 딱 붙어서 우롱차를 두 손에 쥐고 한 모금 들이켰다. 꼴깍 넘어가는 소리마저 잘 들리는 거리였다.
“뭘 본거야?”
궁금했던 질문을 그제야 했다. 니노는 짧게 웃었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이렇게 생긴 데서 사는 구나-, 하는. 짧은 감상? 나는 입을 달싹이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한 손으로 쥐었던 컵을 두 손에 쥐어 무릎에 얹고는 만지작댔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니까, 그게 행동으로 나타난 거다. 혹시 사실은, 아니 만약에, 니노가 날 좋아하는 건 아니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만들고는 입에 담지 않았다. 다 이시이 때문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나는 모든 책임을 이시이에게로 넘겼다.
어라. 니노는 그대로 누웠다. 우롱차는 두 손에 꼭 쥐어져 배 위에 얹어졌다. 나는 니노와 똑같이 누웠다. 천장은 다를 게 없었다. 왜 그래? 고개를 돌려 본 니노의 눈이 깜박깜박거렸다.
“별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