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풀어 오르는 무언가는 아이바의 심장 고동이고, 망상이고, 사랑이었다.
네임.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어 이제는 학명으로 분류된 하나의 현상이자 증상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몸에 타인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의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단순하고도 복잡한 이 현상은 갈수록 많은 인구에게 나타나 결국 학계에서 공식 발표까지 하고야 말았다. 세계 각국마다 있을 법한 붉은 실, 인연의 전설이 결국 실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네임 부위에 상처가 나면 그 상대도 통각을 느끼기도 한다. 극히 일부의 경우인데, 이들은 운명으로 묶인 사람들, 통칭 ‘운명’運命;destiny이라고 불린다. 누군가에게는 로맨틱한 하늘의 장난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니노미야 카즈나리二宮和也, 입사하자마자 찾아낸 나의 운명.
아이바 마사키는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이직을 선택했던 것도 운명이었던 걸까.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바로 파티션 하나 너머 옆 부서라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우연히 스쳐 지나가던 자리에 쓰여 있던,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이름. 제 팔에 있는 것과 단 하나의 획도 틀리지 않았다. 어쩐지. 그 자리에서 아이바는 찌르르한 무언가를 느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당신이 내 네임이에요, 하는 건 네임 사이에서도 당연히 실례이고 동시에 무례한 행동이라.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자 목례만 하고 지내기를 한 달. 아주 우연스럽게 팔에 있던 흉터가 눈에 들었다. 그동안 안부를 묻거나 짧은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고, 덕분에 시선을 느낀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화상 자국이라고 말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아이바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셔츠 소매를 걷었다가 보인 그 흉터는, 어릴 적 아이바 마사키가 난데없이 불에 덴 것 같다는 고통으로 며칠 고생했던 부위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있는 부위이기도 하고. ‘운명’인가! 아이바는 그렇게 생각했다. 들떴다. 설레고 기뻤다. 아이바는 벌써 니노미야를 짝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네임이던 짝사랑 상대가 알고 보니 운명이기까지 하다니,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한 번에 일어난 것이다! 아이바는 그 기세를 몰아 고백했다. 운명인 것 같아요.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이바의 네임은 잔뜩 긴장한 아이바를 앞에 두고 무표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좋아…해주신 건 고마운데요. 운명은 아닌 것 같네요. 제 몸엔 아이바 씨 이름이 없거든요. 니노미야는 네임이 없었다. 노네임. No-name. 그럴 리가. 아이바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경악과 실망이 섞인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이바란 인간에게 있어 끈기와 인내는 그를 이루는 8할 정도라, 이후로 니노미야에게 그것을 선보였다. 친절을 가장한 어필. 운명이 아니면 어때. 밤새 네임과 노네임 간의 러브스토리를 검색하며 정독한 다음날부터였다. 책상 위에 오늘도 힘내라는 쪽지를 작게 접어 주스와 놓고 간다던가. 점심을 사러 나가는 니노미야 옆에 따라붙는다던가. 물론 그런 날엔 싸갔던 도시락을 가방 깊숙이 숨겼다 저녁으로 먹었다. 복사를 한다 싶으면 괜히 복사할 게 없냐 주위에 물어서까지 따라붙기도 했다. 그런 아이바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얼마안 가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아직 유효하냐는 말까지 앞에 붙었던 완벽한 한 장면. 아.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하나 있는데, 아이바는 학생 시절부터 드라마를 많이 보고 자랐다는 것이다. 장르는 로맨스로, 어머니와 사촌 여형제들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바는 환상 아닌 환상을 많이 품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중략) 사귀게 되고 나서 아이바가 가장 먼저 실천한 일은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는 것이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정성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음료나 간식을 준비했다. 편의점이나 근처 카페에서 산 것이지만, 아이바는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해했으니 서로 윈윈인 셈이었다.
어색하던 시기를 지나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한 두 사람은 잘 지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건 한 쪽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때때로 어라, 싶은 지점이 있었는데. 전자는 아이바, 후자는 니노미야였다. 아이바는 니노미야에게 ‘운명’을 피력했다. 처음에는 수줍게 우리가 운명인가 봐요, 하며 이유까지 덧붙이는 입꼬리가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본인이 먼저 고백했던 주제에 손이라도 먼저 잡히면 어깨가 튀던 아이바. 마냥 두근대고 설렜어도 매일 같이 보는 사이인데다 둘의 나이도 어린 편이 아니었으니, 조금씩 하던 데이트를 따라 자연스럽게 스킨십의 정도도 그다음을 향했었다. 손을 잡고 걸었으면 입을 맞췄고 그 뒤엔 더 깊게, 함께 밤을 보낸 건 달이 밝던 주말 밤이었다. 처음 가 본 아이바의 집이었고, 침대 옆 스탠드를 은은히 조절해둔 채. 전희가 긴 것 같았지만 그만큼 저를 생각해주고 배려하는 것 같아 니노미야는 애정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도, 니노미야가 견딜 수 없어 매달릴 때조차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몸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이때부터였다. 니노미야가 서서히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건. 니노미야는 본래 빠른 눈치를 타고났다. 눈치가 빠르다 못해 사람의 속내를 읽는 수준인 그의 누나만큼 까진 못 미쳤어도, 일반적인 경우보다는 분위기를 읽는다거나 남다른 낌새를 알아차린다거나 하는 것이 빨랐다. 그랬기에 니노미야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연인이, 저에게 무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밤을 같이 보낸 이후로는 주말이 오는 금요일만 되면 이틀을 같이 보냈다. 언제는 아이바의 집이었고, 언제는 니노미야의 집, 또 언제는 호텔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암묵적으로 당연해져버린 약속이었다. 항상 몸을 겹쳤고 열기를 교환한 뒤에야 잠에 들었는데. 아이바는 니노미야의 팔 안쪽이나 허벅지 안쪽, 등줄기나 목선 따위를 그 어둠 속에서 유심히 보거나 매만지곤 했다. 평소 렌즈나 안경을 낄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은 편인 아이바가, 렌즈를 오래 끼고 있으면 눈이 건조해짐에도 니노미야의 몸을 관찰, 그래, 꼭 관찰 같았다, 하고 나서야 안경으로 바꾸곤 했다. 연인의 얼굴이 잘 안 보여서 그런다기보다, 정말 무언가를 꼭 봐야만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에 대해 짐작과 확신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평소 버릇처럼 말하는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카즈에게도 조금 있으면 내 이름이 나타날 거야. 우리는 운명이니까.”
그놈의 운명 소리. 몇 번이야 간지럽고 듣기 좋았다. 그걸 말하면 아이바는 꼭 눈을 접어 웃었거든. 니노미야는 아이바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고, 그 눈에 자신이 담기는 걸 더 좋아했고,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바가 운명을 운운하며 웃을 때면 사랑을 담뿍 받는 느낌이라 정말 우리가 운명이면 좋겠다, 하고 믿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을 계속해서 주입하듯 듣다 보면 의문이 생겨났다. 운명이 아니면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건가? 우리는 꼭 운명이어야만 연인일 수 있는 건가?
노네임으로 살아온 니노미야는 낭만주의자적 성향인 아이바와 다르게 아무래도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결국 하루는, 일 때문에도 몸 컨디션 때문에도 기분이 저조했던 것을, 아이바에게 풀어버리고 만다. 짜증이 확 치민 걸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둘은 저녁을 먹으러 막 식당에 들어와 주문을 한 참이었다. 낮부터 지끈거리던 머리가 두통약을 삼켜도 가라앉질 않는다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늘 그랬듯 맥주를 함께 주문했는데. 아이바가 그걸 취소했다. 니노미야는 눈썹을 휘며 아이바를 보았다. 왜? 약 먹었다며, 약 먹고 술 먹으면 몸에 안 좋아. 하.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알지만 꼬박꼬박 지킨다 해도 건강은 늘 상하고, 당장 이 맥주 한 잔으로 두통이 조금은 가실 수도 있는데, 아이바는 대체 뭘 알고. 니노미야는 홧김에 뱉어버리고 만다. 어쩌면 지금 머리 아픈 건 네가 늘 말하는 것 때문일지도 모르지. 뭐?
“그 ‘운명’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듣기 좀 거북하거든. 근데 너는 끊임없이 얘기하잖아.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덕분에 요새 그 생각만 계속 난다고.”
“거북… 그랬어? 아니, 그랬으면 말을 하지. 그럼 안 했을,”
“안 해? 누가. 네가? 아이바 마사키가? 운명을 그렇게 맹신하는 아이바 마사키가?”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니노미야는 상대를 비꼬는 어투만큼은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고 실제로 그래왔다. 그렇다고 아이바에게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정말 어딘가 상태가 안 좋은 건지 한구석에서는 그만 입 닫아야 한다고 위험신호를 자각하지만 열린 입은 계속 쏟아낼 뿐이었다.
“카즈,”
“퍽이나 안 했겠다. 그렇게 매일 아이바 마사키 네 글자가 내 몸에 있나 없나 확인하는 주제에.”
“카즈나리.”
아이바가 입술을 물었다. 굳은 얼굴이었지만. 니노미야는 덩달아 제 입술도 세게 짓이겼다. 딱딱하게, 화로 경직된 얼굴은 일전에 본 적이 있었다. 업무 전달이 꼬여 큰 실수가 있었다고 했다. 아이바의 탓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넘겨받은 동료가 잘못한 것이 원인이 되었고 그게 결과적으론 팀에게 누를 끼친 것이 되니, 평소엔 늘 생글생글 웃던 아이바라도 그때만큼은 화를 감출 수는 없었다. 몇 번이고 충분한 당부를 했음에도 벌어진 일이라 더욱 그랬다. 아이바와 니노미야의 자리는 가까웠고, 조금 소란이 나는 것 같기에 슬쩍 얼굴을 들어 아이바를 찾았던 니노미야는 그때 그런 얼굴을 처음 봤었다. 곧 자리를 벗어나는 뒤통수를 따라갔을 정도로 걱정됐고, 아니나 다를까, 아이바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는 기색이 가득해서. 그런 아이바의 너른 등을 쓸어주며 니노미야는 제 담배를 하나 건넸었다. 아이바는 오래 전에 끊었다고 들었음에도 당장 한 개비가 필요해 보였다. 예상은 맞아서, 그날만큼은 한 대를 끝까지 태우고서야 옅게 웃을 수 있던 아이바. 그렇지만 지금의 아이바는. 화가 났다기보다 어딘가…
결국 니노미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이바를 끌고, 먹지도 않은 음식값을 치르고 나오는데 뒤에서 손목이 잡혔다. 카즈. 니노미야는 돌아보지 않고 마저 끌었다. 순순히 끌려왔다.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옆으로 꺾어 조금 으슥한 골목길, 조금은 급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니노미야가 불을 붙였다. 이것만. 피고 얘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무리하게 다가서지 않고 한발 뒤에서 그 작은 등을 보며 기다리길 몇 분. 숨을 크게 내쉬고 다 핀 꽁초를 지진 니노미야가 아이바를 돌아보았다. 냄새나니까 이 거리에서 말할게. 일단. 미안.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어.
“너한텐 그런 말투 쓰고 싶지 않았는데. 좀 지쳤나 봐, 오늘. 미안.”
“…….”
평소의 아이바라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을 텐데.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듣고만 있었다. 그만큼 아이바도 상처를 받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한 니노미야가 괜히 마른침을 삼킨다.
“하나만 물어볼게.”
“…응.”
“너는, 우리가 운명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운명이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운명이니까,”
“아니지. 아까도 말했듯이 나에겐 네 이름이 없으니까. 일단 네임 관계부터 성립하지 않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렇지만. 팔에 그 흉터. 나도 네가 다친 그때, 똑같이 거기가 아팠다니까? 운명이 아니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 그걸.”
“내가 아닌 다른,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확률. 0은 아니잖아.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 네 운명이라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카즈.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니야. 너 말고는 없어.”
“네가 자꾸 그런 말을 하니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게 된다고. 모든 걸. 계속.”
니노미야는 고개를 떨군다.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 위를 서 있는 두 사람의 구둣발이 보였다.
“나도 싫어. 너랑 이런 얘기 하면서 기운 빼고 싶지 않아. 나한텐 기분 좋은 우연이었는데, 그 우연을, 너만큼이나 나도 좋아했던 우리의 같은 부분을, 더 가다가는 싫어하게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마사키. 아니라고 해줘. 운명이어야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럼 내가 끝까지 네 운명이 아니면? 내가 아니라 진짜 네 운명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 때가서 안 되겠다고 할 거야?”
쉼 없이 쏟아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이 전혀 없었다. 잘 알았다. 아이바는 환상 같은 것을 좋아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깨부수는, 현실을 직시하게끔 만드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는걸. 그러나 언제까지고 시달릴 수는 없었다. 둘이 함께 나란히 가야 할 길을 상대에게 치우쳐서 가고 싶지 않았다. 매달리듯 가고 싶지도, 끌려가고 싶지도 않아. 연애란 그런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왔던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존중해 주저하던 걸 이번만큼은 그만두고.
“마사키. 우리가 운명이어야만 만날 수 있는 거냐고.”
“…그건 아니야.”
아닌데. 운명이면 더 좋은 거잖아. 낮게 중얼거린 문장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바닥과 닿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은, 각진 울림이었다.
운명을 맹신하던 아이바에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드라마를,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꿈이 언제까지고 지속되리란 보장은 현실엔 없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니노미야가 제게 오고, 꿈이라면 깨기 싫을 정도로 행복했던 나날이었는데, 서서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니노미야에겐 제 이름이 없고, 저는 니노미야의 이름이 있고. 그게 가장 컸다. 니노미야는 평생 노네임일 수도 있지만 이러다 누군가의 네임이 떠오를 수도 있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의 운명은 니노미야인데, 니노미야의 운명은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 겁이 났다.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는 니노미야를 애타게 부르다 아이바는 잠에서 깨곤 했다.
노네임인 니노미야가 차라리 누군가의 네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른 이의 네임이 있는데도 자신을 택해준 거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초조해져갔다. 네임 열에 여섯이 가지고 있는 불안 증세였다. 피터팬 증후군, 신데렐라 콤플렉스와 유사한 이 증상은 망상에서 시작되는 네임의 대표적인 반동 현상이다. 간혹 일어나는 범죄의 원인이 되기도 해 사회적으로 대두될 정도의 심각한 사안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불안의 해소는 결국 스스로에게 달려있었다. 아이바의 불안을 듣고 난 니노미야가 흔들리는 눈을 한다. 전혀 몰랐던 얘기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라서. 처음부터도, 성장하면서도 쭉. 니노미야는 노네임이었기에 네임의 사고방식 같은 걸 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해,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 납득까지는 할 수 있었다. 그랬지만 막상 애인이라는 사람이 운명을 바라고 네임을 바라는 그런 건 조금. 견디기가 힘들었다. 네임을 처음 만나본 것도 한몫했다. 자신이 될 수 없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바라는 건 충분한 부담감을 가져온다. 어느 정도의 부담과 어느 정도의 미안함은 연애에 있어 수반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 했지만. 이번만큼은 무게가 다른 것 같아.
서로 이만큼 털어놓은 상황에서, 니노미야는 잠시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그려봤다. 태연하게 대화를 하다가도 운명의 ‘운’ 자라도 나오면 안절부절 눈치를 보는 아이바와,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척하는 자신, 아니, 어쩌면 달라지는 것 없이 그대로일 지도 몰랐다. 아이바는 계속 운명을 이야기하고 듣다 못한 자신은 회피하고. 그러다 보면 대화는 줄어들게 뻔하고. 이제 반 년째 만나는 중이었다. 아이바가 좋았다. 좋았고, 아직도 좋고, 잔뜩 사랑하지만. 일렁이는 아이바의 눈을 감당하는 건 힘들겠다고 직감했다. 니노미야는 아이바와 있는 미래를 그리는 걸 포기한다. 더 늦기 전에 동료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아이바는 운명을 만나야 행복해질 거라고. 많은 대화와 지금의 사고방식을 고친다고 해도, 거스르지 못할 거였다. 네임이니까.
네임은 꼭 퍼즐 조각 같은 거야. 들어맞는 조각을 찾기까지 계속 헤매는 거지.
맞는 조각을 못 찾으면?
비슷한 조각을 찾아서 끼워 맞추거나, 만족하지 못한다면 맞는 조각을 계속 찾는 거지.
언젠가 스쳐가며 들었던 대화였다. 퍼즐 조각. 아이바와 자신은 맞지 않는 조각이구나. 아니. 나는 네임이 아니니까, 애초에 조각이 아닐 지도.
“그만하자.”
“뭐?”
이렇게 헤어짐을 빨리 결정한 적은 없었다. 속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장에 확신이 드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고 또 현실이라. 니노미야는 아이바를 온전히 마주했다.
“너는 운명이라 믿었지만 우린 아니었고. 나도 믿고 싶었지만 정말로, 아니었잖아. 운명이.”
아이바는 그 말을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차오른 눈물을 흘려보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아이바는 운명이 아니어도 좋다고, 운명 그까짓 거 뭐 어떻냐고, 니노미야를 잡지 못했다. 하다못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어떻게 그런 말을 쉽게 꺼내냐고, 원망의 말도 하지 못했다. 제 자신이 바보 같고 답답한데도 끝끝내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그러기엔 제 안에서 ‘운명’이라는 무언가가 너무 큰 둥지를 틀어놓은 지 오래였고 그건 당장에 허물어진 수준이 아니라서, 감히 바뀌겠다는 다짐 혹은 입바른 말 조차도 아이바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뚝뚝 울 수밖에, 고작 그것뿐이었다. 지금 아이바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니노미야는 쓰게 웃었다. 니노미야는 니노미야대로, 우는 아이바를 달래줄 수 없어진 탓이다. 이별은 빠르고 허무했다. 운명이 아닌 사랑은 전부 이런 건지. 채워져있다 비어버린 만큼이나 본질이 같아서, 공복과 허한 마음은 겪으면 겪을수록 더 괴로운 걸지도 몰랐다.
…
이들 두 사람에게 있어 어떤 변화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후의 일을 이야기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 덧붙인다. 사람 앞 일 모른다고 종종 말하지 않나. 딱 들어맞게도 니노미야는, 샤워하던 와중 제 몸에 떠오른 네임을 발견하게 된다. 참을 수없이 간지러워 북북 긁었던 화상흉터가 까지더니. 물이 걷어낸 거품 자리, 일어난 껍질까지 뜯어내자. 도톰했던 흉터 위로 하얗게 네 글자가 솟아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相葉雅紀.